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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루 Oct 28. 2020

제자리로 가는 길

1. 본래 있던 자리 2. 마땅히 있어야 할 자리

익숙해졌다는 것은 떠날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TV에 케이블 방송이 나오지 않고, 침대와 비데가 없는 생활. 출근길에 있었을 시간에 식사 준비를 하는 아침과 간단한 요가 후 책이나 영화를 보는 하루. 때로는 늘어지게 낮잠을 자는 일상. 1만 보 걸음을 목표로 매일 오후 4시 반께에 떠나는 오후 산책. 어느덧 숨처럼 자연스러워진 이 생활의 끝이 보인다.


그 사이 사랑방 손님과의 만남으로 은행나무집에 머무는 기간이 일주일이 길어졌다. 하루가 가는지, 한 달이 가는지 모른 채 그저 흘려보내며 지냈던 우리의 시간은 점점 온전한 24시간으로 돌아왔다. 떠날 날이 정해지고, 달력 위에 떠날 날을 표시하고 나서부터 나는 무언가 초조해졌다. 은행나무집에 내려올 때 기대했던 일들 때문이다.


엄마는 기침이 많이 좋아졌지만 많이 걷거나 무리한 활동을 하면 여전히 숨이 달린다. 수술 부위를 아파하는 날도 있어 혹시나 재발을 하거나 전이가 되면 어쩌지 하는 불안함은 쉬이 가시지 않았다. 나는 지금도 돌아가기가 두렵다. 이제야 겨우 스스로를 괴롭히던 중압감에서 벗어난 까닭이다. 사람에게 상처 받고 또 상처 주는 모습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


일생에서 가장 힘든 시기에 귀향한 우리는 완벽한 치유를 찾지 못한 것 같았다. 좀 더 머물렀다면 달라졌을까 생각해보면 엄마는 그랬을지도 모르겠다. 상처가 아물기까지 좋은 공기를 마시며 시골길을 거니는 삶이 나을지도. 하지만 나는 시간이 더 주어진다 해도 답을 찾지 못했을 것 같다. 우울의 원인을 알면서도 결국엔 조금만 더 해보자는 결론을 맺을 수밖에 없는 것이 지금의 내 모습임을 결국엔 알게 됐다.


엄마는 제자리로 돌아가는 것이라 했다. 잠시 내팽개쳐 놓은 도시에서의 삶이 제자리라고 생각하고 싶진 않았다. 그래도 돌아가야 한다면, 돌아가기로 마음먹었다면 그곳에서 순간이 오기까지는 살아가야 한다. 지금  당장 돌아가는 곳이 한 달 뒤, 반년 뒤, 일 년 뒤는 어디로 바뀔지 알 수 없다. 그래서 나는 어디가 됐건 지금 있는 곳을 내 자리로 생각하기로 했다.


무언가 답을 원하며 시작했던 길의 끝은 생각보다 대단치 않다. 내가 있어야 할 곳도, 어떻게 살아갈지에 대한 고민도 결국은 모든 것이 진행형임을 깨달은 것이 그나마 수확이다. 비록 '모든 것을 멈추고 시골로 떠난 청년이 제2의 삶을 찾았다'는 희망찬 이야기의 주인공이 되진 못할지라도, '달리던 길에서 벗어나 잠깐 딴짓을 해도 내 자리는 있었다' 정도의 이야기는 할 수 있지 않을까. 돌아가는 길은 그거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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