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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루 Aug 24. 2020

할머니의 깨 항아리

추억할 수 있는 공간에 대한 감사

"얼마 전에 엄마 항아리에서 깨가 나왔어. 그게 아직 있더라."


어느 날 이모는 엄마와 내게 할머니의 깨 항아리 이야길 했다. 우리가 시골집에 오기 불과 며칠 전의 일이란다. 엄마와 이모는 할머니가 밭에 심기 위해 따로 저장한 깨일 거라 짐작했다. 할머니가 돌아가신 게 2015년 초순이었으니 원래는 그해 봄에 세상 빛을 봤어야 하는 녀석들이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까지 이 집에서 수년 더 사셨지만 깨 항아리를 발견 하시진 못하신 모양이다. 그동안 빈집을 들락거리며 돌봐온 이모도 이 발견을 적잖이 신기해했다. 할머니가 애지중지 했던 대부분의 항아리들은 오래전에 깨끗하게 비워진 상태였다. 나는 문득 할머니를 기다린 깨 항아리가 그를 대신해 고향으로 돌아온 엄마를 맞은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날부터 은행나무집에서의 생활은 엄마의 엄마 찾기였다. 오래됐다고는 하나 할머니의 손길이 미치지 않은 곳이 없으니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엄마는 매일 엄마와의 일화를 이야기했다. 엄마의 엄마는 아흔이 넘어서도 기억이 밝았다. 그 많은 자식들의 생일을 기억했고 미역국을 끓여냈다. 어릴 적 기억으로 가끔 담배를 피우셨던 것을 알았지만, 식사 때 소주 한 잔 씩 반주도 하셨단다.


150센티도 되지 않은 작은 체구였지만 생활을 짊어진 어깨는 강했다. 집에서 한참 떨어진 야산 밑 논두렁까지 일꾼들의 새참을 수 없이 날랐다. 우리는 이제는 남의 땅이 돼버린 그 논 부근을 산책할 때면 항상 그 이야기를 했다. 엄마의 엄마는 은행나무집을 찾는 사람을 그냥 보내지 않았다. 장사꾼들을 집에 들여 밥을 대접했고, 가난한 사람들과 나누는 정이 깊었다.



엄마 이야기를 하는 엄마는 행복해 보였다. 내게 한 없이 너그러웠던 그는 엄마에겐 감사하고 애틋한 존재였을 것이다. 내가 힘들고 아플 때면 엄마가 보고 싶은 것처럼, 타향살이를 한 엄마도 은행나무집과 엄마를 수 없이 떠올렸으리라. 할머니 역시 품에서 떠나 엄마가 되어버린 딸을 항상 그리워했을지도 모른다. 이렇게 생각하니 외가까지 가는 먼 길을 불평했던 어린 시절이 미안해졌다. 멀고도 먼 그 길이 엄마에게는 1년에 몇 번 없는 행복한 길인 것을 그때는 몰랐다.


이제는 엄마는 엄마의 흔적으로 그를 추억한다. 어린 시절을 보낸 은행나무집과 손때 묻은 살림살이들. 마지막으로 남겨둔 털옷들과 삭아버린 뒷간 슬리퍼. 낡아서 덜컹거리는 상다리를 야무지게 고쳐놓은 나무못까지. 엄마는 없지만 이 공간에는 엄마가 가득하다. 할머니를 보낸 지 3년이 채 지나기 전 돌아가신 할아버지는 이 집만은 팔지 말라는 말을 남기셨다고 한다. 덕분에 몸과 마음이 약해진 엄마가 여기 왔고 엄마의 기억을 더듬는다. 추억할 수 있는 이 공간은 두 분이 엄마에게 남기신 마지막 선물이다. 나는 무엇으로 엄마를 추억하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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