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무렵 내 머릿속은 온통 내 삶의 돗대는 어디를 향하는 것일까, 나는 왜 무표정일까, 나는 왜 어깨에 힘이 없나, 사람을 만나도 왜 즐겁지 없나싶은 생각들로 가득했다.공부하는 것도 육아도 일상도 지칠대로 지쳤는데, 허니제이의 춤에 대해 보여지는 열정은 내 딱딱하게 굳어진 마음에 지진을 냈고, 크랙 틈으로 마음 저 깊은 곳에 내 의식이 다다르게 했다. 생각의 늪에 빠른 속도로 빠지게 했다.
처음 대학에 입학할 때만 해도 자신있었던 각종 시험, 퀴즈, 과제들이 학교생활 3년 2학기쯤이 되고, 4년이 지나자 부담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매 테스트마다 불안을 이겨내며 100문제 120문제씩 풀어내고, 서술해내고 그런 경험들이 하나 둘, 열, 스물씩 축적이 되니, 시험에 자신감이 붙을 만도 한데, 성적이 잘 나올 수록 힘들어졌다고 말하는 것이 옳을까? 이제는 떨어질 일만 남았다는 부담감, 기존의 성취도 만큼을 스스로에게 보여줘야 한다는 스스로에 대한 무언의 압박이 풍선처럼 부풀었다. 심지어는, 이제 더 이상 시험을 보러 시험장에 갈 수 없는 상태까지 커진 불안이 커다란 돌덩이처럼 마음에 꿍 하고 떨어져 누르는듯한압박감으로 다가왔다. 나 왜이래? 지금까지 어려운 고비 다 넘겨왔잖아? 이게 사람들이 말하는 번아웃인가? 애써 도착한 시험장에서 구토에 이어 공황장애가 몰려왔다, 디퍼럴 스케줄을 짜야했다.
이것은 내가 지금까지 해낸 공부의 양, 이해의 속도와 상관있었다. 사람들은 많은 양의 공부를 빠른속도로 이해하고 암기할 수 있는 사람을 무척 부러워한다. 그러나 사실, 더 많은 량의 공부를 더 빨리 이해해낼수록,빨리 먼저 지친다.우리의 몸과 머리는 공평하다.이미 한국에서 경영학과 아동학과 즉, 전공 2개를 따온 내가 이곳 캐나다에서 인접학문이나 기존에 했던 학문에 성쌓기하듯 석,박사를 했다면 지금 내가 뜬금없는 과학공부를 하는 것보다 오히려 쉬울 수 있었다. 자신만의 뚜렷한 목적의식 즉, 동력원 없이 주변의 강한 에너지를 저항하며 버티며 앞으로 나아가는 것에는 무리가 있다.
부모님의 챙김을 받으며 혹은 혼자몸으로 자유롭게 공부하는 20대 대학생때는 자신들의 생활이 얼마나 천국인지 모른다. 이 시기에 자신이 할 수 있는 한 최대한 난이도가 높고, 에너지가 요구되는 일과 사랑, 공부를 하길 바란다. 집에서 차려주는 밥 먹고 다니며 공부하는 학생들과 식구들에게 밥을 차려주며 초등학교 저학년 아이들을 돌봐주며 몸은 지쳤으나 정신력만으로 짜투리시간에 공부해야하는 내 입장의 차이를 부정할래야 할 수 없다. 혼자서 운전을 잘한다고 교통사고를 방지할 수 있는 것이 아니듯, 여기에 짬짬이 추가되는 부부관계 갈등까지...살고자하는 에너지로 4년을 버텨왔으나,이제는... 앞으로 나아갈 에너지를 태초에어미 젖빨던 힘까지 끌어올려도, 운동을 해서 쳐 올리려고 해도 이제는 도무지 힘이나지 않았다. 4학년 마지막 학기를 앞두고는 급기야 더 이상 긴장이 되지 않고, 몸이 축 쳐진 상태가 되었다. 몸의 아드레날린도, 스트레스 호르몬인 코티졸도 급할 때 잠깐 짧게 끌어올려 쓰는 것이지, 그것이 습관화 되어버리면 핀이 나가버린다는 말이 맞았다. 눈에 힘을 주고 긴장을 빡세게 하고, 온힘 다해 몇년을 달렸기 때문에, 몸의 교감 호르몬이 모두 바닥났다. 여성의 몸의 난자 뿐만 아니라. 인체 자체 그리고 여타 호르몬도 모두 소모품이라는 말을 이제야 비로소 실감했다.직접 해보지 않으면 알 수 없는 부분이었다.
학교 안팎의 누가누가 내가 망하기만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을 알고 있고, 내 주변의 이기적인 경쟁자들로 모여가는 느낌이 나의 고통에 박차를 가했다. 미세하게 그 모든 것을 느끼지 않으려해도 섬세하게 남을 배려하는 속 깊은 성격 상 다른 사람의 감정과 나를 연결시켜 느낄 수 밖에 없었다. 사람들이 하나 둘,심지어는 클래스의반 이상씩 나의 능력과 상관없이 자신들의 힘에 붙여 그만둘 때, 나는 '내 존재가 혹시나 다른 사람들을 밟고 있는거 아닌가' 하는 죄책감도 연달아 들었다. 힘들어 펑펑 우는 아이들, 혼란스러워 하는 아이들, 어딘가에 잔뜩 약올라 건들기만 하면 터질 것 같은 아이들...
이겨도 져도 괴로웠다. 잘할 수록, 세상이 쉬워지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 얼마든지 존재하는 나만큼 잘 하는 사람들로만 솎아진 집단에 점점 가까워지고, 그 집단 안에서 내가 평범해지며, 이제는 서로가 서로를 돕고 격려하는 것이 아닌, 한시라도 빨리 한명이라도 먼저 밟아 날려버리려고 하는 분위기가 연속되기 시작한다. 대학 안 서바이벌은, 1-2학년에는 잘/잘못이 비교적 쉽게 갈리는 다수 안에서 지속되어 비교적 쉽지만, 이미 일년에 반이상이 빠져나가는 이후에, 3-4학년에서는 정서적 유착감이 없는 내 옆사람 빼고는, 아니 그 사람과도 언제든 경쟁관계에 놓여, 경쟁자 수가 적어진 대신 경쟁의 강도가 더더욱 높아진다.
나만 긴장감이 높아진 것이면 상관없는데, 모두가 고도로 긴장되고 예민해져 조금만 손해보았다 싶으면 철저히 밀어버리는 실존판 오징어게임같은 상태가 되어버린다. 개인주의 캐나다 대학이 공동체적 유대관계안에서 성장하는 한국사람에게 절대 쉬운 곳이 아니다. 아무리 경쟁이 심하고 치열하다해도 한국인이 느끼는 한국은 한국인이 느끼는 캐나다 안 대학의 경쟁보다 훨씬 편안하다.내 나라가 아니라 내가 아무래도 열세라 내 스스로 의식하는 것을차치하고서도 말이다.
캐나다라하면 대략 자율적으로 자신의 미래를 스스로 설계하여,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하는 아이들이 대부분일 것 같은 순진한 기대가 들지만, 특정집단에 내 아이를 소속하게 하려는 부모와 가족은 이곳에도 있다. 아이의 장래희망과 미래직업, 직장 또는 직장내 특정 부서나 포지션 등은 세상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들이 아닌, 부모의 철저한 가이드를 통해, 부모자신과 그의 인맥에 의해 결정된다. 모든 분야가 그런 것은 아니지만, 운나쁘게도 내가 속한 의대 준비반이나 법학시험준비반이 특히 그렇다. 부모에 의해 세뇌된 아이들이 말로는 자신의 꿈이라 설파하지만, 찌그러진 얼굴표정에서 느껴지는 심적부담, 떨어진 체력, 함께 뛰고 있는 남에 대한 적개심과 경계심, 자신의 권리라도 되는 양 공부한답시고 상대를 배려하지 않는 것이 아무렇지 않은 히스테리와 성격이상상태는 목적의식없이 부모의 꿈, 세상의 기대를 겨우 맞춰주며 죽은목숨으로 살아가고 있는 대학생들의 전형이다. 한국의 고3보다 캐나다의 헬쓰사이언스, 라이프 사이언스를 비롯한 의대 준비생들의 압박감과 고통이 더 길다면 길지, 결코 쉽지 않다. 대학졸업 성적으로 의학전문대학원에 진학하기 때문이다. 나를 탐색하며 충분히 무너졌다 일어나며 젊음을 즐기기는 것에서 먼, 부모의 꿈을 대신 이뤄주는 것에 순종하는 아이들이 아시아가 아닌 캐나다에서는 소수 일 것 같지만, 10중 9할임에 놀랐다. 언어, 민족, 종교와 관련없다. 한국 대치가 아닌, 캐나다... 그것도 소도시에서.
모두 같은 방향으로 뛴다는 전제하에 최상급이 되라는, 투입 대비 절대 산출의규칙은 개발도상국시기를 성공적으로겪은 나라 국민들이 고도의 자본주의, 무한 경쟁이 판치는 시기를걷는 방법이다.
그러나 자신의 삶에 주인이 된 아이들은 부모를 비롯한 세상 대세에 무조건적으로 순종하지 않는다.
죽지만 않기 위해 인터넷으로 정규 카운셀러 협회에서 카운셀러를 검색했다. 내가 왜 이럴까, 30대 중반의, 아이가 둘인 내가 굳이 대학이라는 선택지를 택해 어린애들 사이에서 살아남아야하는 이유가 뭘까, 내 아이가 나를 새로운 과학 전공자로 만든거라고? 그럼 내 아이가 왜 이럴까, 우리 가족은 왜 이민을 선택했을까, 여유있게 자연스럽게 살기로 이민왔으면서 내 삶은 왜 이리 치열해야 할까, 나는 왜 이렇게 나 스스로를 궁지에 몰아 세우길 반복하는 걸까, 계속되는 선택 속에 과연 나 자신이 존재하는 걸까. 나는 어떤 가치를 추구하는 사람인가, 내가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을 나 자신은 알고 있나, 이대로 학업을 마무리 하게 된다면, 나는 이 모든 질문의 답을 결국 찾지 못한 채, 사회로 던져지게 된다. 그렇게 되면, 학교에 들어오기전과 무엇이 크게 다를까?가만히 있을 수 없는 노릇이었다.
살면서 한번, 정말 단 한번만 내 내면의 행복을 추구해보자. 그럴 자격 누구나 있잖아? 열두살무렵부터 서른 대여섯 살 무렵, 그러니까 삶의 초기 약 20여년 동안 내 감정보다 사회적 발걸음에, 세상이 나를 이끄는대로 어떻게든 턱걸이로라도 세상의 기준에 나 자신을 맞춰야했던 내가, 처음 딛었던...나를 위한 첫 발자국, 첫 시도였다.
선생님, 저는 캔디라고 합니다.
다행히도 좋은 선생님과 연결이 닿아 주1회 60분-90분씩 상담이 시작되었다. 시험때문에 너무 바쁜 달에는 한 달에 한번, 그리고 시험이 끝나 여유가 생기면 한 달에 두번, 그리고 방학때에는 주 4회 연속으로 그렇게 선생님과 만났다.
선생님과 자연스럽게 인사하고, 1-2회기에는 내 자신이 그리 부담스럽지 않은 일상 이야기를 꺼내었다.
선생님은나의여러면들을 궁금해 하셨다, 그리고 내적인 면과 외적인 성취의 균형을 맞추려는 나의 시도를 격려해주셨다.
선생님과 라포가 형성되고, 현재 내가 책임 져야하는 아이들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던 차에 3회기차에 황급히 튀어나온 이야기는 동생이 백혈병으로 피토하는 장면 이었다.
늘 자상했지만, 철옹성 같이 단단하고 끄덕없어보였던 내 아버지가 고작 열 살밖에 안된 내 앞에서 꺼이꺼이 울며 '아빠 이제 어떻하지?'하며 절망했던 것을 목격한 이야기,..
나와 단둘이 마주앉은 작은 방 안을 꽉 채우고도 남아돌아 울려버졌던 아빠의 40년묵은 오열, 그건 내 인생 대부분의 오답을 해결할 수 있는 생각보다 큰 단서였다.왜 40살이라는 중년의 아빠는 10살짜리 어린 나와 그 순간 단 둘이길 택했을까, 왜 아빤 내게 40년 인생동안 꾹 참고 펑펑 게워내는 슬픔, 아픔, 분노, 좌절, 두려움을 토할거면서 내게정면으로, 무릎꿇고 아빠 말 듣기만 하라고 했나...(부모의 이혼, 실직, 파산, 죽음, 잦은 싸움, 심리적 또는 신체적 인권유린 등 갑작스럽게 맞닥들인 공포의 경험이나 가족의 삶의 변화 위기에 놓였던 어린시절 경험을 소화하고 싶은 모두를 위한 전자책그리고 종이책을 출간예정중에 있습니다. 여러분의 행복을 위해 당시 감정, 생각, 현재삶에 끼치는 영향, 극복방법에 대해 다룰 예정입니다 )
그 때 아버지의 모습을 보며 내가 느꼈던 쇼크. 큰 산처럼 나를 품어주고 늘 든든히 지켜주던 존재에 대한 심리적 절망을 경험했다. 10살 딸 아이에게 40살의 아빠의 실성 직전의 감정과 비명섞인 울음은 내 존재의 안전에 대한 위협이었다.사람은 자신이 경험해 본 감정만 이해하고 소화할 수 있다는 가정하에 10살 아이 평생에 느껴본 감정 카테고리안에 40살의 복잡 미묘한 감정 폭탄은 이미 기존 도식의 와이어를 엉클어놓기 충분했다. 아얘 기존 감정도식을 망칠만큼 덮어버리기에 충분했다. 아빠로부터 내게로 폭탄처럼 쏟아졌던 감정이 내 안에서 갈 곳을 잃은 채, 불안과 혼란(쇼크)이라는 재생에너지를 생산했다. 한 단어도 안되는, 그저 15분짜리 눈물뿐이었지만 그 15분안에 마흔 살 한 남자의 사십년짜리 인생이 담겨있음을 충분히 직감할 수 있었다. 폭풍같은 두려움과 공포로 얼룩진 채, 나를 앞에 두고 펑펑 토해내는 아빠를 보며 불안과 공황을 경험했다.
놀라 경직된 내 얼굴이 15분뒤에야 보였는지, 아빠는 곧장 '어린애 앞에서 내가 뭐 하는지 모르겠다'하며 의연한듯 웃으며 미안하다 하셨지만...이미... 늦었다.이미아빠의 40년 묵은 감정을 이해하고 받아들였다기보다 반대로내가 그 감정안에 침몰 되어버린 후 였다.
그 후로 나의 많은 것이 변했다.나 자신의 기분, 생각 즉 내 입장에 집중하던 과거의 내가 이제는 내면의 채널이 열리기 시작해 다른 사람의 마음을 읽을 수 있게 되었고, 동시에 정작 나 자신의것은 포기하기 시작하게된 것도 이때부터였던거같다.
아빠가 불쌍했다. 위기에 처한 아빠를 돕기 위해 정작공포에 떨고 있는 나 자신을 잊은 채, 우리 가족을 이상황으로부터 구원하기위해 아무것도 할 수 없어 발을 동동 구르던 10대 초반의 시간들...
그래서 이 커대한 불안과 참담한 상황을 어린 아이의힘으로 통제하며 이겨내려아이나름대로 생각해낸 최선의 방법인, 의사선생님이 되고자 마음먹었었던 나의 어린시절 이야기였다.
20년도 더 된 이야기를 마치 어제 일어났던 일인 것 처럼 상대에게 참 생생히도 기억해 상대에게 전달하고 있는 내 자신에 먼저 놀랐다.짧게는 3-4년, 재발 추적 검사 등 길게는 10여년의 시간이 지나 동생이 완치되며. 이 일은 없던 일 처럼 덮어두고 한동안 잠잠해 보이던 내 삶에, 결혼과 출산, 육아의 과정이 다가왔으며, 내 아이를 키우고 있는 현재의 나 였다. 내 인생의 파노라마가 쭉 지나갔다. (자세한 이야기는 저의 다른 매거진에 낱낱이 기록되어있습니다.)
현존하는 아이의 부족한점을 샅샅히 찾아내고, 병명으로 규정지으며, 이 선생님, 저 선생님 찾아다니며, 뾰족한 해답을 찾아내려 돌아다니던, 아이의 부족한점이라 말하던 부분은 사실, 사람이기에 성인이 되는 과정에서 생기는 자연스러운 불균형인데, 이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지 못하고, 먹이는 것, 입히는 것, 재우는 것, 가르치는 것 뿐만 아니라 장장 의사가 되어 아이를 보호하겠다는 헌신으로서 메꾸려고 한 나의 모습은 아이를 위한 진짜 사랑이라 보이지만, 사실은 나의 어린 시절 그대로의 '불안' 이'지금의 내 아이라는 형태로 발현' 된 것 일 수 있음을 알게 되었다.
많이 놀랐던 어린시절의 상처를 없는 척 누르고 살다, 내 아이라는 트리거에 의해 상처가 자극되어 그때의 불안과 대응방식이 튀어나와 현재 나의 의식이 지배당하고 있는 상태 말이다. 현재가 과거에 의해 지배당하고 있으니, 꼭 전쟁으로 인한 상처가 아니더라도 사람들은 흔히 이를 트라우마라고 불렀다.
그러니까 사실은 말이야, 내 아이로 표상되는 문제 안에는, 나 자신이 있었어, 나 자신 안에는 나의 어린시절이 있네. 이 어린 아이가 아직도 불안해하고, 울고 있어. 감정이 감당 못할만큼 강렬했던 나머지 어린아이는 그 감정을 처리할 수 없어 마음에 묻어두고 아무렇지 않은 척 삶을 살게 돼. 그런데 이 커다란 감정은 사실 완벽히 덮힌 것이 아니야. 제발 알아달라고 내 삶을 왜곡하면서 계속 삶의 변환점에서 심술을 부려, 삶의 반직선 안에서 지나친 불안과 피로를 만들고, 결정을 왜곡하면서 말이야. 이 무의식이 드라이빙 하는 삶이 아닌, 나의 현재가 주도권을 갖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반드시 묻어둔 감정을 알아채 주어야만 해. 입에서 꼭꼭 씹어 소화시켜 시간이 지나 배 밖으로 나올 수 있도록 길을 터 줘야해. 이제는 안전한 내가 불안했던 어린 나를 만나 껴안아주고, 위로해주고, 예뻐해줘야해. 아이를 안아주고, 위로해주는 순간, 나는 이제 더 이상 어린아이가 아닌, 성인임을, 과거와 현재를 분리할 수 있게 돼. 그것이 그 아이와 완전히 작별할 수 있는, 내가 경험한 유일한 방법이더라.
생각보다 상당수의 여성은 엄마가 되면, 자신이 인지할 수 있는 수준이든 그 이상이든 사실 불안하다. 내 아이를 잘 키워야하는데, 자원이 충분치 않은 것 같아 절절절 맨다.이 학원, 저 학원, 이 센터, 저 센터, 그리고 이 병원, 저 병원... 헤매는 것은 사실 아이를 위한 헌신이라는 엄마의 겉옷을 입은, 그저 미성숙한, 어린시절 상처를 억누르고 있는 모습일 수 있다.
이 깨달음은스스로 인식해 내기 직전까지, 아이나 남편, 그리고 주변인에게 투사된 채, 지속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