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기억, 아픔 소화하기

부정, 화,허무함,슬픔, 다시 또 분노, 무기력과 우울, 깊은 슬픔

by 후루츠캔디 Jan 01. 2025
아래로

진실을 인정하는 과정입에서 사탕을 살살 녹일때처럼 달콤하지 않았다. 상담 시간이 지나고 나자 정작 내가 상담 중 뱉은 말이 용납되지 않았다.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어린시절 상처가 있어도 덮어두고
현재 잘 살면 그만 이다.


40살 전후의 여자 성인에게 10살의 어린시절을 소화하라니. 누구보다도 내 아이를 기다려주고, 매일 건강식을 만들고, 열심히 일하고, 누구보다 최선을 다해 맡은 바 열심으로 임하는 나에게...다이아 또는 은쪽이 엄마처럼 아이에게 소리지르지도 욕을 하지도 않고, 비난을 하거나, 문제를 전가하지도 않고, 부모에 대한 혹은 남편에 대한 험담도 혹여나 모공에서 흘러나올까 조심했다. 10시에 눕고 새벽 5시에 일어났다. 문제 행동이라는건 존재한 적도 없는 사람인 내 안에 원인이 있을 수 있다니.


늘 나 자신보다 주변을 배려했다. 바람을 핀 적이 있나, 과욕을 부린적이 있나, 아이를 방임한 적이 있나, 털 끝하나 때린적이 있나, 술과 담배를 한 적이 있나, 집 밖에서 오후 5시 이후에 시간을 보낸적이 있나... 몹쓸 욕망이 자극될 까 드라마를 보지도 않고 살고 있으며, 내가 가진 행복의 크기가 깎일까 남들 다 하는 인스타 계정도 없다. 남과 비교하거나 비교당하기 싫어 사람들도 너무 가까이 하지 않는다.  캐나다에서조차 초등 고학년부터는 모두 갖고 다니는 스마트 기기도 아이들이 중학생인 현재까지 사주지 않고 버티고 있는데...팩트를 근거로 찾아 설명하려해도 도무지 문제없는 사람이니까...




곰곰히 생각해보니 나란 사람이 극도의 자기절제력을 갖고 스스로를 통제하는 것이 습관화 된 사람이란 생각과 그 기저의 불안이라는 감정을 잡아냈다.


캔디님은 제가 보았을 때 긴장도가 높으십니다. 숫자로 표현해볼게요.

네, 맞아요 선생님... 사실 그것 때문에 좀 불편할 때가 있어요. 사람이 불안을 느끼는 건 당연할 것 같은데 저는 좀 지나친 것 같아요. 예를 들면, 어떤 상황에서, 10점 만점에 불안레벨 1-2만 느끼고 남은 8-9에너지는 사고나 느낌에 치중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저는 그렇지 않아요. 1000이 되어 쇼크를 느끼고 얼어버립니다. 이민을 와 새로운 도시로 갈 때에도 첫 몇 주간 4-5정도의 불안을 느끼지만 집에오면 불안을 누그러뜨릴줄 알아야하는데, 아이를 챙겨줘야해서인지 아직도 불안수준이 3-4이상 되어야합니다. 그런데 3-4가 아닌것 같아요.

어느정도죠?

10점만점에 1000정도 되는 것 같아요.

아까와 같네요.

네, 꼭 큰 충격을 받은 사람처럼요. 심각하게 미친소리같아 입밖으로 꺼낸 적 없지만, 심지어 저는 이민을 올 때에도 전 혹시나 남편이 나를 외딴섬에 팔아버리는 건 아닐 까 하는 생각으로 한동안 전전긍긍 했다구요. 아무것도 스스로 결정을 내릴 수 없을 정도로 의식이 마비되는 것을 발견합니다. 특히 외부에 나가 정신차려야하는 중요한 상황에서도요.

이민 후에 생긴 습관인가요?

아니오, 한국에서도 그랬어요. 이 모습들이 한국에서는 유교문화가 있어, 웃어른 앞에 예의를 차리는 모습으로 보여져 배려를 받을 수 있었어요. 그래서 단 한번도 나의 이러한 성향에 대해 문제 의식이 없던 것 같아요. 그리고 그 때는 나이도 20대 초중반으로 어렸기 때문에, 사회에서는 선배나 상사를 거쳐 의사결정을 해야했기에 아무 문제가 없었지만, 캐나다에서는 점점 상황이 달라짐을 느껴요. 물론... 내가 본 열 사람중 다섯명이 넘는 사람은 그런 나를 나 자신보다 먼저 알아봐주고 '괜찮다, 위험한 상황이 아니다' 라며 내가 불편해 할 수 있는 팩터들을 줄여주려 최선을 다하고,  미안해하고 배려하는 모습을 보여주지만 사실, 같은 상황안에서 나만큼 불안해하고 긴장하고 불안해하는 사람은 없는 것 같아요.  왜 나는 사람들의 친절을 받고, 용기를 내어야할까요? 전혀 용기씩이나 필요없는 상황에서도요. 제 남편은 이런 나를 놀리는 것이 제게 스트레스이지만, 그다지 개의치 않으려 노력했던 것 같아요. 선천적으로 나는 섬세하고 부드러운 사람이라 생각했어요.


캔디님의 어린시절로 가봅니다.

고통속에서 울고 있는 아빠가 보여요.

그때 느낌이 어땠나요? 그 느낌과 현재 캔디님이 말하는 불안의 느낌이 어떻게 다를까요?어떤... 연관이 있을까요?


헉...



이 둘 사이 연결고리를 찾으려는 선생님의 질문에, 갑자기 온몸이 굳고, 가슴이 답답하고, 숨을 쉴 수가 없었다. 맞다, 그것이었다.


제 감정은
아빠의 고통을... 공간을 꽉 메운 울음과 신음의 형태로
맨 몸의 어린 내가 경험한 날...
 그 날의 쇼크와 연결되는 듯 해요.




아이 였을 때의 감정, 생각, 행동을 어른이 되어서도 지속 하고 있는 행위를 우리는 흔히 미성숙이라 정의내리지 않는가. 내가 경험하는 정서와 현재 나의 상태를 미성숙이라 정의내리는 것이 옳은가. 모든 트라우마는 미성숙이라는 결론을 낳는가.


본인이 하는 행동이 남에게 악행이 되든 말든 자신을 우선순위에 두고 사는 사람도 자신의 미성숙을 모르고 버젓이 잘 만 살아가더만,  잘못도 하나 없이, 그저 주어진 운명대로 동생의 병을 내가 원하지 않는, 감당할 수 없는 형태로 직면했다고해서 그것이 내 생 전반에 '긴장과 불안' 이라는 형태로 영향을 주었다고, 그래서 더 노력해, 더 살아냈다고 그것이 '어린시절'부터 고착된 불안 때문이기에 나의 모든 행동이 그저 미성숙이었다고? 그래서 그렇게 매순간에 자칫 죽을듯 애를 애를 쓰며 살았다고?


어이가 없고 황당했다. 그 후엔 억울하고 화가 났다.


없던 척, 존재하지 않았던 척, 다 지난 일인 척...오랫동안 뱃속에 꽁꽁 누르고 살았던 무의식에 존재했던 기억을 고백하는 형태로 폭발시키고 난 후,  동안 큰 병을 앓듯 많이 아팠다.


머리가 팔팔 끓고, 구토가 계속 나왔다. 눈의 실 핏줄은 계속해서 터져 있었고, 주변에 사람이 있건 없건 하염없이 눈물이 흘러나왔다.


심리학자들이 흔히 말하는 수용의 5단계 중 가장 고통스러운 처음 몇 스텝들을 밟고 있음이 체험되었다. 부정하기, 화, 부정,화, 부정, 화 ....우울,...




인정하기 싫었다. 펄펄 끓는 진실을 받아들이기 버거웠다. 모두 가짜이길 바랬다. 내가 공부하기 싫은데, 성적을 낼 자신은 없으니 잔꾀로 합리화 하는 것이길 바랬다. 그동안 어떻게 성벽을 쌓아올렸는데, 마지막 학년, 학기 중반을 달리고 있는 마당에 이렇게 무너질 수는 없는 일이었다. 상담을 통해 사알~ 사탕빨듯 나의 피로를, 힘듦을 위로받을 줄 알았는데, 이런 왕건이가 튀어나올줄은 상상도 못했었다.


화가 났다. 한겨울에도 하이힐에 짧은 골덴 반바지를 입고 사람들의 시선을 즐기며 낙태전문 산부인과에 어린 나를 보호자 자격으로 앞세워 입장하던 철없고 미성숙한 엄마가 싫어, 나는 그런 사람이 되지 말자 다짐으로 아동학을 전공하고, 자연주의 출산과 모유수유를 만 3년 실행하고, 어린이집도 보내지 않고 외국가서도 혼자서 내 아이를 키운 나였다. 나를 본 이가 그 누구라도 내 엄마의 모습을 절대로 절대로 자연스레 유추해 내는 일이 없도록 최대한 멀리 떨어지려고 애를 쓰며 달려온 내 평생이다. 유난떤다 말도 많이 들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내가 이 생을 살아내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난 늘 내 아이 앞에서는 성숙하고 완전한 엄마여야했다. 늘 자연식으로 해 먹었고, 동화구연하듯 재미나게 매일 책을 열 권도 넘게 읽어주던 자상한 엄마이다. 밥도 시켜먹거나 사먹이지 않고 늘 내 손으로 직접 해 먹었다. 학교를 보낼 때에는 늘 현관 앞까지 나와 아이들이 눈 앞에서 사라질 때까지 아이를 쫓는 내가 그런 엄마다. 아이가 나갔다 들어오면 정성껏 간식을 챙겨줬고, 늘 감기걸릴새라 깨끗하게, 따뜻하게, 풍요롭게 키우려 노력했다. 자기애적 욕구를 아직도 병적으로 갈구하는 누구들처럼 자식에게 특정 직업을 강조하지도 강요하지도 않고 늘 자기탐색을 독려했던 나이다. 그렇게 키운 내 아이가 학교 생활을 힘들어 해, 내 아이를 위해 과학이라는 새로운 영역에 대해 훤칠한 성적으로 졸업해 의사까지 되려던 나이다.


단 한번도 이기적인 생각을 한 적 없고, 단 한번도 내 가슴을 내 배를 충족시키려고 한 적 없었다. 자는동안도 깨어있는 동안도... 심지어 반쯤 깨어있는 동안도 늘 어떻게 아이들의 마음을 가슴을 그리고 신체를 충족시킬지만 생각했던 나였다. 자신이 늘 스스로가 없이, 자식을 위해 남편을 위해 억울한 인생을 살고 있다며 희생자 컴플렉스를 비추는 사람들을 혐오하며 '원래 엄마라면 그렇게 하는 게 당연하다'라 혼잣말로 훈계했었다. 억울했다. 화가났다. 모두가 각자 힘들테니 남들 다 노는 20대 30대라고 말하지는 않겠지만, 젊은 시절을 송두리째 아이만 생각했다. 이 사람들만 구원하려고 했다. 거기에 자신의 어린시절부터 유린당한 자아에 대해 잔뜩 약올라있는 K-장남출신 남편의 성장과 마음의 안식을 돕던 나다.



결국 아무 노력도 안하고 생긴대로의 자신만 추구하던, 자식보다 남편보다 자신이 늘 먼저였던, 앞서 앉아계신 아주머니가 여섯살 무렵의 나를 위해 양보해주신 버스자리마저도 낼름 빼앗아 앉은 그 여자. 내 엄마의 '미성숙'과 같은 결론이라니. 깨닫지 못하고 늘 많은 형제들 사이 빼앗김당해와서 자식의 자아도 질투했던 내 엄마의 미성숙과 이와 반대로 끊임없이 이타적이고 성숙하려 노력하는 나의 미성숙이 같은  결론이라니. 새로운 시각안에서 인지적 도식이 아직 정리되지 않았던 난 너무 분했고, 살아온 시간이 아까웠다.


 동안의 나의 행적을 정의하는 단어와 엄마를 정의하는 단어가 동일하다는 것에 억울해서 마음이 찢어질 것 같았다. 온 신경이 터져 나갈 것 같았다.


하루는 화가 났고, 하루는 멍했으며, 하루는 눈물이 났다. 화가 가라앉은 줄 알았는데 다시 화가 났고, 멍했고, 다시 눈물이 났다. 이번에는 눈물이 흐르는 것이 아니라 펑펑 소리까지 나왔다. 화와 슬픔으로 얼룩진 내 감정의 파도는 약 3개월간 지속되었다. 늘, 언제든 내 감정은 내 맘대로 통제하며 사는것에 자유로웠는데, 사실 통제라기보다 억누르고 살아왔다, 감정을 '주체할 수 없다'라는 말의 의미를 실감했다.



그럼 나와 같은 '불안'의 트라우마를 가진 사람은 행복할 자격도 없네? 노력할 자격도 없네? 어차피 트라우마 그 직후부터 사고, 행동, 결정, 느낌 등 모든 도식이 왜곡될테니 이 세상에 존재하는것이 아까울만큼 의미없는 인생이라는 말이네?



이 모든 것이 환상같았다. 무력했다. 허무했다. 화가 났다, 슬펐다.


아이의 자폐증상을 상의하러 갔던 병원에서 Dr. Itco가 도움될거라며 오히려 엄마인 내게 로우도즈로 주려했던 항불안제에 황당할 필요가 없었던 것이었다. 초집중을 하기위해 대규모 강의실 맨 앞줄에 앉아서 눈과 머리를 반짝이며 공부하는 내게 유기화학 교수가 바닥이 푹꺼지는 한숨을 쉬며 '이거 다 해봐야, 여러분의 인생에서 달라질것이 아.....무것도 없어, 내 꼴을 봐' 라고 말할때, 뭐 저딴 아스깨끼가 다 있어 라 생각했었다.  '어린아이들을 데리고 30대에 과학 공부하는 엄마'라글을 썼더니  MissyUSA 속풀이 게시판안에 상주하는 익명 악플부대 미친여사님들이 '어린시절 상처나 치료하세요, 공부는 무슨 공부 ㅠㅠ ㅋㅋ' 라며 내게 보여준 투지가 사실은 진실이었을지도 모른다.



틈만 나면 마음껏 울었고, 마음껏 화냈고, 또 한동안 내 존재에 대해, 내가 할 수 있는 것에 대해, 내 힘에 대해 무력했다.


현실과 나의 근 10년동안의 삶, 그리고 그보다 훨씬 더 이전의...30여년전의 삶이 한 데 뒤엉켜 내 근방 1m에서 이리뒹굴 저리뒹굴한채 내 정신을 괴롭혔던 날들이었다.







이전 12화 깨우침, 그 매콤한 맛

브런치 로그인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