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임풍 May 04. 2024

인간 심리의 오류 인식


이중 기준(double standard)에 대해서 경험이 생생하다. 낯선 외국에 가서 거리를 걸어가거나 특히 외딴 식당에 들어가서 혼자 밥을 먹을 때는 언제나 외국 사람들의 시선을 느꼈다. 동양 사람이나 한국 사람을 처음 보는 외국 사람들이 나를 특이한 시선으로 쳐다보는 것이 이해는 되었지만, 불편한 마음 자체를 없앨 수는 없었다. 그런데 요즘 우리나라에도 외국인 수가 많아졌다(22년 말 기준  230만 명). 간혹 길거리에서 낯선 외국인을 마주칠 때 나도 모르게 다르게 생긴 그 사람을 보고 있는 나를 발견한다. 과거 외국에서 나를 쳐다보았던 외국인들이 느꼈을 감정이 바로 지금 내가 우리나라에서 외국인을 쳐다보면서 느끼는 감정과 무슨 차이가 있을까? 과거에 나는 외국에서 낯선 동양인을 쳐다보는 외국인의 시선이 불편했고, 그러한 시선이 싫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런데 지금 내가 우리나라에서 지나가는 외국인이 느낄 법한 불편한 시선을 던지고 있다. 내가 느꼈던 불편했던 시선을 이제는 내가 다른 외국인에게 던지고 있다는 사실이 다름 아닌 이중 기준이라고 본다.

내가 하면 로맨스고 남이 하면 불륜이라는 '내로남불'이라는 말이 사람이 가진 이중기준을 잘 표현한다. 요즘 자주 거론되는 층간 소음 문제도 마찬가지다. 위층에서 떠드는 소리는 싫지만, 내가 쿵쿵거리면서 걷는 소리를 아래층 사람들이 느끼는지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다. 나는 아무 때나 큰 소리로 말하지만, 다른 사람이 조금만 크게 이야기하면 싫다. 좁은 길을 걸어갈 때도, 나는 남을 밀치고 걸어가도 되지만, 남이 나의 어깨를 밀치며 걸어가는 것은 싫다. 남이 나를 히 쳐다보는 것은 기분 나쁘지만, 나는 언제든지 다른 사람을 빤히 쳐다본다. 나는 제삼자에 대해서 험담을 쉽게 하면서도, 제삼자가 나에 대해서 험담을 했다는 소리를 들으면 부르르 떤다. 같은 옷을 입고도 나는 멋지고 남은 멋지지 않다고 느낀다.

이런 사례들은 비록 무의식적인 심리 현상일지라도, 인간이라는 존재가 얼마나 많은 경우에 이중적인 잣대를 들이대고 있는지를 알려준다. 인간의 가치관이나 판단 기준은 문화권이나 나라마다 다르다. 같은 나라 속에서도 지방마다 다르고, 결국에는 사람마다 다르다. 그래도 사회가 유지되고 있는 것은, 계약과 타협을 통해서 최소한 구체적인 범죄를 막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람 각자가 마음속으로 생각하는 차별이나 무시는 누구도 알 수 없기 때문에 막을 수가 없다. 서로 다르다는 것을 다른 한 편이 틀리다고 보는 시각이 문제다. 유대인의 골상이 아리아인종과 다르다고 해서 유대인을 학살한 사건이 그 예다. 유대인이나 아리안인이나 모든 인간종의 유전자는 99.9~99.7% 똑같다.

이중 기준 말고도 사람의 생각은 매우 비논리적이다. 예를 들어, "내가 너에게 잘해 주었기 때문에 너도 나한테 잘해 주어야 한다"라는 상호주의는 논리적 근거가 없다. 이런 논리는 마치 "내가 너를 사랑하기 때문에 너도 나를 사랑해야 한다"라는 착각을 일으킬 수 있다. 실제로 많은 경우에 사람들은 이런 모순적인 생각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다. 이처럼 이중 기준이나 논리적 비약은 타당성을 결여하고 있음에도, 인간의 무의식을 지배하고 있다. 이런 사실을 자각하는 것이 좀 더 공정하고 객관적인 인생을 살아갈 수 있게 해 주리라 생각한다.

이전 01화 마음의 혁명.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