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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풍 May 15. 2024

나의 생각을 회복하기

70년대 어린 시절에 인상 깊게 보았던 <나자리노>란 아르헨티나 영화가 있었다. 그 영화의 주제곡(When a child is born)도 멋있었지만, 한 아이가 태어나서 사랑을 하면 늑대인간으로 변하고, 반대로 사랑을 하지 않으면 저주가 풀린다는 악마의 제안을 거절하고, 사랑을 택한다는 내용은 인간 정신의 고귀함을 일깨워주었다. 이후 성장하면서 인간이 구축한 문명 세계가 어떻게 개개인의 생각과 선택을 구속하는지에 대해 관심이 많았다. 수많은 철학자들이 인간이 겪고 있는 문화 사회적인 구속 상태를 공통적으로 지적하고, 깨어나라는 메시지를 전하고 있음도 알게 되었다.

2,500년 전에 소크라테스는 "너 자신을 알라, 점검하지 않는 인생은 살 가치가 없다"라고 하면서, 그 당시에 인간 존재의 방향성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였다. 1922년 발표된 헤르만 헤세의 <삿타르타>에 나오는 "어느 누구에게도 해탈은 가르침을 통하여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나는 나로부터 도망치고 있었다, 나는 나 자신에게서 배울 것이다"라는 싯다르타의 말은  나 자신 생각의 뿌리를 찾아야 함을 충분하게 느끼게 해 주었다. 19세기 중엽에 오늘날 미국 철학을 개척한 랄프 왈도 에머슨도 초절주의와 자립정신을 강조하였다. 초절주의란 인간의 영혼 속에 신성이 있기에, 스스로 내면세계를 발현시켜야 하며, 인간은 자존하고 독립적일 때야만 가장 최선일 수 있다는 사상이다.

학창 시절에 접한 성경에 따르면, 인간은 하나님의 이미지에 따라 창조되었고, 인간에게는 세상에서 번성하라는 축복이 부여되었다. 니체는 인간이 자신에게 부여된 창조성을 발휘하지 못하고, 오히려 타락한 가치에 노예처럼 살아가는 것을 목격하고, 초인(Uebermensch)이라는 창조적이고 독립적인 인간상을 제시하였다. 초인은 지금까지의 삶의 방식을 극복하고, 능동적으로 자신의 삶을 극복하는 사람을 말하는 것 같다. 1932년에 올더스 헉슬리는 <멋진 신세계>에서 과학이 고도로 발전해서 사회의 구석구석을 지배하고, 독창성을 상실한 인간의 생각과 자유까지 통제하는 미래의 어두운 문명세계를 그렸다. 마치 지금 우리의 모습을 예언한 것 같다. 1955년 마르쿠제는 <1차원적 인간>에서, 다양한 사고 기능이 마비된 체제 순응적인 인간의 개념을 제시하였다. 그보다 앞서 1949년에 출간된 조지 오웰의 <1984년>에는 첨단 산업기술을 기반으로 하는 전체주의 사회에서 빅브라더들이 모든 동질적인 인간들을 감시하고, 통제한다는 내용을 다룬다. 현대 자본주의, 과학기술 지배 사회가 상품 생산, 소비문화, 생산체제, 네트워크, 언론, 광고 등 모든 면에서 새로운 형태의 사회적인 억압 체제를 탄생시켰고, 인간이 오랜 세월 발전시켜 온 비판정신을 무력화시키고 있음을 지적한다.

무한한 창조적 가능성을 가진 원래 인간이 자기 자신으로부터 소외되고, 마치 기계의 부품처럼 전락하고 있다. 1950년에 데이비드 리스먼은 현대인을 고독한 군중이란 용어로 묘사하였다. 칼 융은 인간이 자신의 본성을 드러내지 못하고, 사회적 도덕과 질서, 제도에 순응하기 위하여 1000개 이상의 페르소나(가면을 쓴 인격)라는 가면을 쓰고 살아간다고 보았다. 지두 크리스나무르티는 1969년 <아는 것으로부터의 자유>에서 사회적 제도나 가치에 순응하는 사람을 '존경받는 시민(respectable citizen), 또는 중고인(second-hand human)'이라는 개념으로 풍자한다. 스피노자는 1656년 인격신을 부정한다는 혐의로 암스테르담의 유대 공동체로부터 파문당했다.

1960년대 이후 주로 개발 도상국에서 사용되었던 3S 정책은 아직도 아있다. 스포츠, 스크린(영화, 드라마), 성을 지칭하며, 이 세 가지 요소를 통해 독재국가들이 국민들의 관심을 정치 경제적 어려운 문제로부터 다른 방향으로 유도하는데 목적을 두는 대중문화 정책이었다. 3S 정책은 이제 자본주의가 극도로 발전하면서, 국가가 나설 필요가 없이 스스로 진화하고 있고, SNS라는 네 번째 S가 추가되어, 사람들의 자율성과 창의성을 마비시키는데 기여하고 있다. 엄마와 아빠의 정자와 난자가 결합하여, 60여 개조의 세포로 분열하고 성장하여 형성된 인간이라는 창의적이고 우주적인 존재가 사회와 세상이라는 괴물에 의해 정신적인 구속 상태 놓여 있다. 매일매일 새롭게 다시 세상을 개선시키고 바꿔 나갈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진 사람들이 사회라는 거대한 시스템 속에 갇혀서 아직 살지도 않은 미래를 미리 머릿속에서 살아보고 후회하고 있다.

과거 인류의 조상들이 촌락 공동체 차원에서 몇몇이 모여 살다가, 수백만 명 또는 수천만 명이 거주하는 도시 사회를 형성하면서 개개인간들이 하나의 부속품으로 전락한 꼴이다. 이제 사람들은 자신의 독창적인 생각을 갖기 어렵다. 나의 모든 선택과 진로, 그리고 생각의 방향을 세상과 타인, 언론과 광고가 정해준다. 무엇을 먹을지, 무엇을 입을지, 어느 학교에 갈지, 어디에 살지, 누구랑 결혼할지, 어디로 여행을 갈지, 어떤 종류의 사람을 만날지 모든 것을 세상이 알려 준다. 나의 뇌는 더 이상 스스로 생각할 필요가 없다. 이제 인간이라는 정의를 새롭게 정립해야만 할 상황이다. 모든 지식도 인터넷을 통해서 쉽게 얻을 수 있지만, 진정한 나의 지식은 아니다. 이제 사람들은 더 이상 자신의 생각을 믿지 않는다. 즉 사람들이 스스로 자신의 독창성을 모른다. 항상 남이 어떻게 생각하는지 즉시 확인해 봐야 한다. 나는 없다. 남의 생각에 따라 내가 기쁘고 슬퍼한다. 스스로 일어서고 자립하는 인간이 없다. 항상 지지율이나 조회수가 중요하다. 문제는 다른 사람은 나를 대신해서 아파 줄 수도 없고, 나를 대신해서 죽어 줄 수도 없다.

내 인생은 내가 사는 것인데, 너무 남을 의식한다. 하드웨어는 나인데, 소프트웨어가 남의 것이 장착되어 있다. 그러다 보니 나의 독창적인 생각이나 자신감마저 사라져 버렸다. 세상이 정해 놓은 기준을 벗어나면 안 되는 사람이 되어 버렸다. 그리고 아직 살지도 않은 미래를 미리 계산해 보고, 이미 다 산 것처럼 탄식한다. 깨어나야 한다. 이 세상과 우주는 나의 세상이고 나의 우주이다. 지금 어떤 이유로 내가 이 세상을 떠나면, 이 세상이란 없는 것이다. 내가 나의 생각을 신뢰하고 믿어야 한다. 나의 생각을 발전시켜 나가야 한다. 남이란 나의 생각을 알 수 없다. "나는 안돼, 나는 가치 없는 존재야, 희망이 없어" 등의 생각은 내가 나를 신뢰하지 못하기 때문에 생긴다. 늘 남에 의존하면, 결국은 세상이 그런 생각을 주입하고 있음을 깨달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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