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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풍 Sep 14. 2024

현실과 낮의 꿈.

사람의 몸을 컴퓨터와 비교하는 사람이 많다. 몸이 하드웨어라면, 생각과 감정은 소프트웨어 프로그램으로 볼 수 있다. 생각과 감정을 조절해서 마음의 평화를 얻고자 하는 노력은 소프트웨어를 바꾼다는 개념을 사람에게 적용하는 방식이다. 사람이 컴퓨터와 다른 점이 하나 있다. 컴퓨터 소프트웨어는 외부에서 주입되지만, 사람의 생각과 감정이라는 소프트웨어는 내부에서 스스로 교체된다는 점이다. 그런데 인간 존재의 의미를 완전하게 비물질적으로 바라보는 관점도 있다. 몸이라는 하드웨어 자체가 허상이라는 것이다. 원래 진짜 인간이란 단지 관조하는 순수의식이란 시각이다. 이 시각에 따르면, 인간의 몸이나 몸의 운영체계인 정신은 단지 3차원 영화 속에서 어떤 경험을 하는 허상일 뿐이다. 가짜 나라는 표현도 사용한다. 순수의식은 영원한 흐름이며, 오감을 통해 경험을 하는 존재는 실제로는 없다는 것이다.

세상이 일장춘몽 꿈이라거나, 장자의 호접지몽도 이런 시각을 반영한다. 아인쉬타인의 에너지는 물질과 광속의 자승 곱이라는 공식도 물질이 에너지와 호환된다는 입장에서 완전한 물질세계는 없다는 인식이다. 2500년 전 불교의 공즉시색 색즉시공 주장도 물질과 에너지의 호환상태를 암시한다. 전자나 광자 차원에서 입자와 파동이 동시에 공존한다는 양자물리학도 기본적으로 100% 물질세계만의 존재를 거부한다. 그런데 사람은 내 몸, 이 세상이라고 하면서 마치 물질이 고정된 것처럼 꽉 붙잡고 있다. 만약 우리의 경험이 낮에 꾸는 꿈이라면, 모든 철학과 심리학, 심지어 의학도 허상을 대상으로 여러 의견을 내고 있는 셈이다. 나아가서 감정에 휘둘릴 필요가 없다. "이것은 꿈이야"라고 자신에게  알려주면 된다. 생명체 존재의 본질이 순수의식 또는 신적 마음의 조각이라는 우주관을 따르면, 몸과 정신은 실체가 아니며, 더 나아가서 실체가 없는 몸이 탄생하고, 죽는 것도 허상일 뿐이다. 진화론뿐만 아니라 카르마라는 업보론이나 윤회, 환생론, 사후 심판론도 모두 인간의 몸이 실체라는 전제에 기반을 두고 있다.

만약 순수의식 우주론이 맞다면, 그리고 모든 몸이 허상이라면, 몸과 정신을 구체적인 현상으로 여기고, 이를 고치거나 개선하려는 노력도 앞뒤가 맞지 않다. 현실이라는 것도 극히 가상적이다. 눈과 귀를 통해 느끼는 지금이라는 순간을 원자력시계로 측정하면, 0.00000001초도 안될 것이다. 나머지 모든 시간은 과거이며, 기억 속에 비디오필름처럼 저장된다. 걸어갈 때, 조금 전 발자국 현장은 과거이고, 눈에서 사라져 기억 속으로 이동한다. 철학자들이 현재와 지금을 살라고 권하지만, 사실 지금의 단위를 인위적으로 1초라고만 가정해도, 지금에 지나간 과거까지 포함하는 오류가 있다. 우리의 잠재의식은 찰나적인 지금을 포착해도 우리의 의식은 한참 후에 이미 과거인 상황을 지금이라고 여긴다. 마음속에서 과거 장면을 보면서, 지금 외부 세상에서 실제 장면을 보고 있다고 착각하며 살아간다. 엄밀하게 말하면, 인간이 의식적으로 인지할 수 있는 지금은 없다.

모든 순간이 이미 과거이며, 기억 속에 가상현실로 저장되어 있다. 지금 무언가를 본다고 느껴도, 이미 그 장면은 시각정보가 뇌에서 처리된 후의 과거의 장면을 보고 있는 셈이다. 내가 지금 누군가의 손을 만지며 느끼는 따스함은 이미 과거의 순간을 뇌 속에서 마음의 눈이 느끼는 것이다. 따라서 사람은 잠재의식적으로 찰나적인 현실을 인지할지 몰라도, 의식적으로는 언제나 조금 전 과거를 뇌 속의 기억장치 속에서 보고 있다. 직접 눈과 동시에 현실을 보고 있지 않다. 따라서 사람이 지금이라고 느끼는 모든 외부 순간들은 이미 머릿속 기억장치에 입력된 가상현실의 장면이다. 그래서 우리가 사는 현실이 꿈이나 가상현실이라고 말하는 것 같다. 눈과 귀가 무언가를 보고 듣는 것은 맞을지라도, 우리의 마음은 언제나 이미 입수된 시각과 청각정보가 재처리되어 의미가 부여된 후의 장면을 뇌 속에서 보고 있다는 의미이다. 우리가 지금 현실세계를 동시에 보고 느낀다는 것은 착각일 수 있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눈이 본 어떤 것을 뇌가 일차로 해석한 다음에 만든 드라마와 같은 영상을 시차를 두고 마음 속에서 계속해서 보고 있다. 우리는 구조적으로 빛, 에너지, 파동으로 이루어진 실제 현실을 실시간으로 볼 수는 없다.

그렇다면 눈과 귀는 실제로 무엇을 보고 듣는 것일까? 여러 뇌과학자들에 의하면, 우주에는 온통 울림과 떨림의 진동, 빛의 파장, 주파수, 에너지의 세계가 있다고 한다. 그러한 원래 우주적인 빛의 파노라마가 인간의 의식 속에서 마치 영화와도 같은 장면으로 해석되고, 우리의 마음이 그런 입체영화를 보고 있다는 것이다. 지금 우리가 보는 길과 산, 자동차나 사람이 실제로는 없고, 단지 우리의 마음속에 그렇게 해석된다는 의미이다. 이러한 허상 우주론이 맞느냐 틀리느냐가 중요하지 않다. 다만, 우리가 살아가면서 느끼는 정신적인 고통이나 육체적인 질병, 나아가서 죽음을 너무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는 시각도 있음을 알면 충분하다. 스리 라마나 마하리시도 그중 한 명이다. 밤에 꿈에서도 고통스러운 장면이 지만, "아 이것이 꿈이다"라는 자각이 들면, 안도의 숨을 쉰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낮에도 꿈을 꾸고 있을 가능성을 조금이라고 인정하면, 현실이라는 상황이 일으키는 아픔이나 고통을 경감할 수 있을 것이다. 잠들기 전에 꿈 속에서 그리운 사람을 만나는 꿈을 꾸고 싶다고 바라면, 실제로 그런 꿈을 꾸기도 한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순수의식이 낮의 꿈의 스토리를 바꾸고 싶다고 바라면, 중립적인 빛과 파동의 세계를 원료로 사용해서 우리의 마음 속에서 우리가 원하는 스토리의 드라마를 보여줄 수 있다. 새로운 인생을 살 수 있다는 의미이다. "믿음이 너를 낫게했다"라는 말씀이나, "생각대로 이루어진다"라는 말이 이런 자기 삶의  변화 원리를 말하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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