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oul 89 #3 : Seattle
본격적으로 생존 모드에 돌입했다. 로스앤젤레스, 라스베가스&캐년 투어를 마쳤고 이제 시애틀을 포함한 포틀랜드, 샌프란시스코, 요세미티국립공원, 뉴욕 투어를 앞두고 있다. 보통 이렇게 타이트한 리스트를 사람들에게 공유하면 이곳저곳 자유로이 누비는 낭만적 여행을 떠올리며 부러워한다. 실제로 다녀보니 맞다. 새롭고, 특별하고, 낭만적이다. 그런데 그 낭만은 여행을 마치고 난 이후에 찾아왔다. 약 4주간 3~5일씩 각 도시를 넘나들며 고단할 것이라고 어느 정도 예상은 했었다. 모든 것에 지쳐서 아무것도 못할 것 같았던 나에게 어서 정신 차리라고, 혼 좀 나보라고 일부러 추진한 이유도 있었다. 지금은 이른 9월이지만 투어를 마치고 다가올 시카고에서 겨울까지 지내야 했기에 힘겹게 끌고 다닌 22kg의 캐리어와 백팩도 한몫했다. 4일 중 2일은 짐을 지고 이동해야 했으니. 건강하게, 무사하게 투어를 마치고 시카고에 도착해야 한다.(@Post)
한편, 3박 4일은 한 도시를 여행하기에 결코 긴 시간이 아니다. 실질적으로 여행에 몰입할 수 있는 시간은 이틀. 많은 해외여행이 그렇듯 다시 또 언제 기회가 주어질지 모르기 때문에 효율적으로 시간과 동선을 고려하며 힘들이지 않고 최대한 많이 둘러보면 이득이다. 미국의 여행 경비와 환율, 여러 기회비용을 고려하기 시작하면 '잘' 여행해야 한다는 강박은 끝이 없어진다(내가 퇴사까지 하고 이곳에 왔는데!).
하지만 여행의 목적이 치유와 회복이라면? 더군다나 나는 장기 여정이었기 때문에 모든 여정에 에너지를 쏟아낼 수 없었다. 한 달 치 일정의 6개 도시 손품 파는 일이 어디 쉬운 일인가. 그래도, 지나고 나서 어떠한 아쉬움이나 시간을 허투루 썼다는 후회를 남기고 싶진 않았다. '그냥 쉬고 싶었는 걸'이라는 핑계는 용납할 수 없었다. 고민 끝에 결국 강구해 낸 방법은 계획을 짜는 데에 시간을 허비하지 않는 것이었다.
출국 전 정해둔 최소한의 틀은 1일 1~2 랜드마크 또는 도서관이었다. 이 외 매 순간 무엇을 먹을지, 추가적으로 어디를 갈지, 어떤 경로로 갈지 검색하느라 힘을 빼지 않기 위해 간단한 전략을 세웠다.
1. 맛집 대신 마켓을 정한다. 도시에는 저마다 유명한 시장과 푸드존이 있다. 시애틀의 파이크 플레이스 마켓(Pike Place Market), 포틀랜드의 푸드 카트 팟(Food Cart Pods), 로스앤젤레스의 파머스 마켓(Farmers Market) 등이 그러하다. 파이크 플레이스 마켓은 많은 여행객들이 찾는 랜드마크이기도 하다. 다행스럽게도 이번 여정에서 맛집엔 큰 관심이 없었기에 배가 고플 때 마땅한 곳이 안 보이면 마켓을 가기로 정했다. 마켓은 볼거리와 먹거리가 즐비하며 도시만의 감성까지 느낄 수 있어, 단기간 동안엔 재차 방문하기에 만족스러웠다. 물론 적정한 동선의 행운이 따라주긴 해야 한다. 결과적으로 시애틀에선 매일 아침 방앗간 찾는 참새처럼 마켓을 찍고 돌아다녔는데 이곳의 새들도 나와 같은 심정(배가 고프면 여기로)이었던 것 같다.(@Post)
[Gallery] Pike Place Market
2. 발길 닿는 대로, 사람들이 있는 곳으로 계속 걷는다. 랜드마크가 있다면 그 지점을 중심으로 계속 뻗어나가 보는 것이다. 단, 동선은 숙소에서 너무 멀어지지 않는 방향으로 정했다. 행운의 신이 따라주었던 것일까. 하루는 오전, 오후 각 관광지 1곳만 정하고 돌아다녔는데 치훌리 가든 미술관(Chihuly Garden and Glass) 근처엔 스페이스 니들(Space Needle), 팝 컬처 뮤지엄(Museum of Pop Culture) 등 다른 관광지들이 모여있었고 프레몬트 트롤(Fremont Troll) 다리 밑으로 내려오자 구글, 어도비 등 글로벌 기업 건물이 보였다. 또한 주변 호숫가를 따라 걷다 보니 가스 웍스 공원(Gas Works Park)까지 구경할 수 있었다. 다행스럽게도 몇 시간씩 오래 걸을 수 있는 근력은 갖춰져 있었다. 그렇게 먹을 곳도, 볼 곳도 흩뿌려진 모이를 콕콕 쪼아대듯 맛보고선 저녁 무렵이면 방전이 되어 숙소에 들어갔다. 시애틀의 밤은 없었다. 하지만 배가 불러 노곤해진 그 만족감이란.(@Post)
[Gallery] Chihuly Garden and Glass, Museum of Pop Culture
3. (2025 작성) Gemini와 대화하면 된다. Google Map과 연동되기 때문에 원하는 루트를 물어보면 좌표도 찍어준다. 여행하며 ChatGPT를 사용하지 않았던 것도 아닌데, 왜 이걸 생각 못했을까 T.T
[Gallery] Seattle
[Brunch] Seattle Central Library
부록.
이곳인가? 육교 위에서 미심쩍은 마음으로 계단을 내려가다 고개를 돌리니 트롤이 보였다. 글쌔, 거대하고 흉물스러운 조각상의 명성에 비해 큰 감흥은 느껴지지 않았다. 허무했다. 작품의 역사와 배경을 몰랐던 당시 소문에 거품이 낀 건 아닐까, 돌덩이를 그저 기괴한 모습으로 크게 깎아 놓으면 유명해질 수 있는 건가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런데 중요한 건 역사나 배경이 아니다. 무엇이 더 있을까(있겠지) 주변을 서성이다 기대를 접고 트롤이 바라보는 방향의 다리 밑으로 내려가니 차들이 하나둘씩 올라왔다. 차들을 비켜주며 트롤을 올려다본 순간 와 - 탄성이 나왔다. 내가 놓친 것이 이거였구나. 육교에서 기어 나와 올라가는 차들을 금방이라도 잡아먹을듯한 모습. 야간에 차 안에서 서서히 가까워지는 트롤을 정면으로 바라보는 느낌은 어떠할지 상상만 해도 흥이 났다.
하지만 다리 아래에서 구경하는 관광객은 아무도 없었다. 드문 드문 지나가는 차들만 있을 뿐. 조금만 멀리서 바라보았더라면.(@Post)
본 포스트는 2024년에 작성된 글입니다(일부 제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