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oul 89 #8 : Chicago
시카고, 시카고. 퇴사 후 떠난 영혼 가꿈 여정의 8할은 시카고였다. 그날들의 대화, 경험, 복합적인 감정이 거대한 실뭉치처럼 얽혀있어 어디서부터 풀어내야 할지 몹시 어렵고 망설여졌다. 아마 모든 것을 글에 담진 못할 테지만 욕심을 덜어내고 조금씩 써보려 한다.
앞서 Soul 89 프로젝트에서 얻고 싶었던 것들을 짚어보면 : 확장, 의미, 유대, 사랑, 자존, 여유, 지혜다.
비단 프로젝트로서가 아닌, 인간이 누릴 삶 전반에 있어 추구할만한 목표이기도 하다.
드랙퀸(Drag Queen) 쇼와 빙고 게임
애플 피킹 축제
James M. Nederlander 극장에서의 연극 관람
공립 도서관과 독립 서점, 만화 가게 탐방
<책 구경하는 여행> 브런치 작품 발행
미술관(AIC) 관람
할로윈 파티와 코스프레
넷플릭스 & 요리
시티 투어 및 크루즈 투어
유명 건축 투어
타겟, 트레이더조, 코스트코, 중부마켓쇼핑
강아지 MAX와 비치(Beach) 나들이
아트 스튜디오 페인팅 수업
재즈바 감상
애들러 천문관 풀돔에서의 Pink Floyd 뮤비 감상
이모부와 마을 도서관에서 스터디
Thanks Giving Day 저녁 파티
공인 기관의 심리 상담
낙엽진 마을 공원 산책, 달리기, 야생 동물 구경
시카고 박사님과 Loyola 대학 교수와의 만남
이 외에도 사소한 이벤트가 많았는데, 적어놓고 보니 특별하고 값진 경험들을 얼마나 많이 했는지 새삼 깨닫게 된다.
강렬한 기억은 그 순간의 공기, 색깔, 온도, 촉감, 감정 등으로 남는 것 같다. 긴장의 연속이었던 나 홀로 여행을 마치고 이모가 계신 조용한 주택가의 아늑한 침실에서 곯아떨어지고선, 창문으로 비치는 햇살을 받으며 눈을 떴을 때의 그 평온함, 안정감이 선명하게 떠오른다. 이불이 무척 푹신했고 주방으로 가면 먹을 것이 있었다. 나의 이름이 적힌 욕실 컵을 바라보며 순간 울컥했다. 한국에선 쉽사리 느껴보지 못할 이 공간과 시간이 흐르고, 과거가 되어 다신 오지 않을 것을 직감했다. 조급함과 희소함, 그리고 평온함과 무한함이 공존하는 그 정원을 응시하며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현재에 충실하는 것뿐이었다.
나보다 몇 년 어린 사촌 Jane은 심리상담사다. 시카고에 있는 동안 Jane의 덕을 많이 보았다. Jane과의 대화와 함께한 시간은 나의 프로젝트를 완성시켜 주었다. ENFP인 Jane은 친구가 많고 거의 모든 모임을 주도했다. 마치 주인공 Jane과 그녀를 둘러싼 친구들을 보는 듯했다. 곁을 지켜보며 느낀 바, 그것이 가능했던 이유는 적절한 리더십과 이타심, 그리고 높은 자존감 때문이었다. 노는 법도 배워야 하는 것일까? 남들의 눈치 보지 않고 신나게 즐기는 사촌의 모습을 보며 신선한 충격을 받곤 했다.
Jane은 모든 모임에 나를 자랑스럽게 소개해 주었고 함께 어울리길 바랐으며, 간혹 원치 않을 경우 흔쾌히 존중해 주었다(브런치 글을 쓴답시고 바쁜 기간이 있었다). 덕분에 미국의 친목과 파티문화도 즐기며 짧은 기간 동안 그들의 삶에 나름 깊이 녹아들어 볼 수 있었다. [Gallery] Chicago
Jane과 성격은 달라도 성향은 비슷했기 때문에 대화의 결이 잘 맞았다. 심오한 대화를 나누다 인사이트를 얻을 때면 '굳이' 번역을 요청해서 기록에 남겼다. 일상적인 얘기를 하다가도 필요할 때면 사촌의 철학과 단단한 신념을 기반으로 한 심리상담사의 면모가 불쑥불쑥 튀어나왔다. 철학이라니, 한국에서 도망치듯 나와 이곳에서 무언가 답을 얻고 싶었던 것이다. 철학에 대한 나의 가치관은 지금도 변함이 없다. 철학은 취사선택이다.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옳다고 생각하는 곳으로 가라.
사촌의 가치관은 수많은 태도의 방식을 놓고 여전히 망설이는 나에게 하나의 길목을 열어주었다.
사촌에겐 정반대의 성격을 가진 남편이 있다. 조용하고 낯을 가리며 집에 있는 것을 좋아하지만, Jane의 모든 활동과 생각을 지지해 준다. 그와도 심심치 않게 대화를 나눴었는데 가장 기억에 남는 말이 있다.
My life is completed. 저의 삶은 완성되었어요.
이 짧은 한 마디로 짐작했던 답에 확신이 들었다. 다시 말하지만 <확장, 의미, 유대, 사랑, 자존, 여유, 지혜>의 대부분은 누군가와의 상호교류로 얻을 수 있다는 것이 결론이었다. 그 상대는 가족일 수도, 친구일 수도, 반려동물일 수도, 사랑하는 사람일 수도 있다. 나 또한 사촌으로부터 많은 부분을 얻었다.
10월의 시카고에선 매일같이 산책을 했다. 놀라울 정도로 청아한 하늘과 울창한 나무가 우거진 공원의 공기를 마시는 것이 좋았다. 초록의 9월, 알록달록 10월, 비와 눈이 내린 11월의 풍경을 모두 보았다. 이땐 정말 미국에 살고 싶었다.
사촌의 추천으로 한 전문 기관에서 심리상담을 받았었는데 첫 상담을 너무나 진정성 있게 이끌어주신 선생님께 지금도 감사한 마음을 가지고 있다. 그때 반추(Rumination)와 주변환기(Distraction), 제3의 시선을 배웠다. 단 2회 차였지만 한국에 돌아가서도 마음 챙김을 이어나갈 수 있도록 많은 신경을 써주셨다. 이때가 귀국을 앞두고 있는 11월이었는데 Thread에 올리던 미국 여정 포스팅으로 귀한 인연도 만날 수 있었다. 그분 덕에 HCI 분야 대학 교수를 만나 얘기를 나눌 수 있었으며, 한국의 지인을 소개받고 사업 피드백을 받을 수도 있었다. 지금도 서로 응원하고 도움을 줄 수 있는 뜻깊은 관계로 남아있다.
귀국일. 차를 타고 공항으로 가는 동안 이모부가 한 말씀을 해주셨다.
OO아. 좋은 것만 생각해.
이모, 이모부는 내 걱정을 많이 하셨다. 미국으로 온 이유를 상세히 말씀은 못 드렸지만, 난데없이 퇴사를 하고 홀로 미국으로 건너와 지내다 가는 조카를 보고 어림짐작은 하셨을 거다. 89일은 한 여름밤의 꿈처럼 순식간에 지나갔다. 무엇을 얻었는가? 아니, 무엇이었는가? 어떠한 사건의 의미는 시간이 지나면서 달라지곤 한다. 1년이 거의 다 되어가는 지금 돌이켜보면, 그날의 성과는 이 글을 쓰고 있는 현재의 나를 만들어준 것이다. 내가 원하는 것을 마주하려 노력했고, 용기 있었던 그날들이 나 자신에겐 떳떳하고 자랑스러운 과거가 되었다.
한국에 도착했을 땐 눈이 펑펑 내리는 새벽이었다. 하얗게 물든 세상이 퍽이나 낯설었는데, 어느덧 이방인이 되어버린 느낌이었다. 출근할 직장은 없었고, 내일 당장 할 일이라곤 동네에 쌓인 눈덩이를 치우는 일이었다. 이후 2025년, 나의 주변은 많이 바뀌었고 상상 못 했던 일들이 벌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