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쪽 소설] 백한 번째 사람들-17

우리는 타인을 얼마나 알고 있는지

by 파란 벽돌

이제 해도 기울려 하고 있었다. 아들 녀석이 내 짐을 나눠 들고 앞서 차로 향했다. 말끔한 새 차가 긴 그림자를 드리우며 서있었다. 녀석은 차 키를 눌러 뒷 트렁크를 열었다. 트렁크의 비닐도 아직 뜯기지 않은 채였다. 새로 담은 봄옷들과 몇 권의 책으로 가득한 가방들을 이리저리 돌려가며 녀석은 그것들과 트렁크의 모서리를 서로 맞추고 있었다. 이윽고 트렁크 문을 닫으려 했으나 이번엔 불룩 튀어나온 가방의 배부분이 방해가 되었다.

"무슨 짐이 이렇게 많데요. 가방 앞에 든 것들을 조금 나눠 실어야겠네요."

녀석이 가방 앞에 달린 지퍼를 열더니 안에 담긴 물건들을 꺼내기 시작했다. 잠시 뒤적이던 녀석이 무언가를 손에 담아 뒤돌아 선다.

"아버지, 이게 그 지갑 아니에요?"

녀석의 손에는 작은 고동색 가죽 지갑이 들려 있었다. 나는 급히 지갑을 받아 들고 열어 보았다. 하나, 둘, 셋, 넷… 잘 접힌 만 원짜리 열 장, 노란 열쇠, 파란색 신용 카드, 그리고 동전 몇 개까지 그대로 있었다. 새벽에 그렇게 찾던 지갑이었다.


“아버지가 찾으시던 지갑이죠? 내가 그럴 줄 알았다니까. 그래도 일찍 찾았네요.”

그제야 불현듯 어젯밤 기억이 되살아난다.

“아, 그랬구나. 내가 그 기억을 잊었었나 보다. 어제 네 어머니 좋아하는 과일이나 사다 줄까 하고, 잃어버리지 않으려 미리 여기다 넣어 놓았었던 것 같구나. 그걸 그만 깜빡했었네.... 하여간 다행이다. 이왕 찾은 거 네 어머니 과일 좀 사다 주자. 그리고 돌아가거든 오피스텔 관리실에 붙인 메모부터 떼어야겠구나.”

“일단 차에 타세요. 가만있자, 그게 어디 갔더라?”


운전석에 앉은 아들 녀석이 차 구석에 놓여 있는 노트와 사인펜을 집어 든다. 그리고 종이 위에 큼지막한 글자들을 써 내려가기 시작한다.

‘아버지, 제가 다음 주에 사다 드리고 아버지가 사주신 거라고 할게요.’

내가 끄덕인다.

“그럴래? 그러자꾸나, 그럼.”

노트 한 장을 넘기더니 다음 말을 쓰고 있다. 이번엔 말이 긴가 보다. 한참을 적는다.


콩팥이 망가진 무렵부터 내 청력은 급격하게 나빠지기 시작했다. 콩팥 기능과는 관련이 없는 증상이라고는 했으니 우연일 수도 있겠다. 아이들이 보청기를 맞춰 주었지만, 소리를 키울수록 함께 높아지는 잡음 때문에 머리가 울려 그만 포기하고 말았다. 그때부터 나는 남의 말도 주위의 소리도 잘 듣지 못하게 되었다. 하지만 오히려 그때부터 나는 나만의 고요함을 즐길 수 있었다. 내가 원할 때 언제든 마음의 문을 닫고 나만의 세계로 빠져들 수 있게 된 것이었다. 아이들과 손자들의 목소리를 잘 알아듣지 못하는 것이 아쉬웠지만 그들의 입술과 표정과 몸짓을 읽으면 무슨 말을 하는지 대충 알아챌 수 있었기 때문에 크게 불편하게 생각되지는 않았다. 그래서 나는 그 흔한 휴대 전화기도 없이 직접 사람을 만나야만 대화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길고 복잡한 대화는 이렇게 필담으로만 가능했다. 아들 녀석이 다 적은 듯 노트를 보여준다.


‘몇 주 전 거기 관리실장님이 전화했어요. 귀가 어두운 아버지가 자꾸 집에서 무슨 소리가 난다고 하고, 누가 다녀갔다고 하시는데 괜찮으신 건가 하고요. 지금 찾으신 지갑처럼, 아버지가 하신 일을 깜빡깜빡 잊으시는 걸 거라고 말했어요.’

하고 싶은 말이 많은 듯 글씨는 빠르고 못나졌다.

(계속)


* 이 소설의 키워드 중 하나는 소리입니다. 귀먹은 주인공은 상대방의 얼굴과 입술을 읽거나 아주 큰 소리로 말해주지 않는 이상 말을 잘 알아듣지 못하거든요. 물론 주변의 소리도 잘 듣지 못하고요. 이미 눈치채신 분도 있겠지만 중간중간 등장인물들이 나누는 대화는 "..."로, 필담은 '...'로 표시하였습니다. 구분해서 보시면 재미있을 거예요.^^

이전 16화[한쪽 소설] 백한 번째 사람들-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