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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로 Nov 21. 2024

편견을 넘어 다가가기 <더 스퀘어>

The square

-70회 칸느 황금종려상 수상 (2017)


-루벤 외스틀룬드 감독, 클라에스 방 주연 

    

스웨덴 스톡홀름 엑스 로열미술관에서 열릴 ‘더 스퀘어’ 전시     

‘얼마나 잔인한 일이 벌어져야 여러분의 인류애가 움직일까요?’ 어린 여자아이 밑에서 폭탄이 터지고 아이는 산산조각 나 흩어진다. 전시 홍보 영상이다.     

 

크리스티앙 수석큐레이터는 기자회견을 열어 사임을 밝힌다. 전시 홍보영상이 잔인하다며 비난이 빗발친다. 출근길에 크리스티앙은 휴대폰과 지갑을 소매치기당한다. 찾기 위해 휴대폰의 위치를 추적해 건물의 우편함에 편지를 넣는다. 돌려주지 않으면 가만 있지 않겠으니 세븐일레븐에 소포로 보내 달라는 내용이다.     

 

며칠 후 소포가 도착해 도난당한 물건을 찾는다. 하지만 문제가 발생한다. 편지를 50장 무작위로 돌렸더니 그중 한 소년이 부모로부터 자신이 도둑으로 오해를 받아 집 밖으로 못 나간다는 거다. 그러니 자기와 부모에게 사과를 하라고 떼를 쓴다. 크리스티앙은 자신의 집까지 찾아온 어린 소년을 처음에는 돌려 보내지만 곰곰이 생각해보고 사과의 영상을 보낸다.  

    

제일 충격적인 장면은 미술관 영상 전시 속에 있던 한 사나이가 파티에 나타나는 장면이다. 유인원처럼 괴성을 지르며 탑티어들의 만찬에 참석한다. 처음에는 행위예술인 줄 알았는데 점점 난폭해진다. 급기야 테이블에 올라가고 한 여자의 머리채를 잡아 바닥에 내동이치더니 끌고 간다. 위에서 여자를 겁박한다.  

    

다대일이지만 누구 하나 선뜻 나서지 못한다. 숨죽여 있는 긴장된 순간에 힘없어 보이는 노인이 남자를 뒤에서 때린다. 그러자 너도 나도 달려들어 남자를 때려 눕힌다. 위험한 상황에서 아무도 약자를 도와주지 않는 현대인을 비판하는 것일까?      


풀리지 않는 의문은 ‘유인원과 흡사한 남자의 퍼포먼스는 기획된 것일까?’이다. 그러기에는 지나치게 폭력적이고 공포스럽다. 파티에 초대된 모든 사람이 견딜 수 없는 두려움을 안고 자신만은 건드리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무력하게 앉아있다. 위기에 처한 사람에게 우리가 도움의 손길을 내미는지, 어느 정도가 되어야 도와주는지를 테스트하는 것일까?  



    

쇼핑몰에서 딸 둘을 분실한 크리스티앙은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도와달라고 요청하지만 아무도 도와주지 않는다. 구걸하는 거지에게 아이들과 마지막으로 앉아있던 벤치에 있어 달라고 간청한다. 금방 올 거니 아이들이 나타나면 여기에서 아빠를 기다리도록 얘기할 것을 부탁한다.    

 

유럽에 이렇게 거지가 많았나? 런던에 머물렀을 때 호텔 건너 마트 앞에 거지가 앉아있었다. 선진국에도 거지가 많다. 도쿄에 갔을 때 아침에 공원 산책을 하러 요요기 공원에 갔는데 그곳에도 거지가 많았다.

도움, 신뢰, 배려, 약속, 의무, 약자, 편견     


계급사회가 아니지만 보이지 않는 계급은 존재한다. 사는 곳, 타는 차, 먹는 것, 일하는 곳, 돈을 쓰는 방식에도 차이가 난다. 말끔히 세련되게 차려입고 현대적인 공간에서 일하는 사람들과 거리에서 잠을 청하는 사람들. 개인적인 게으름과 무능함으로 그들을 비난만 할 것인가?    

 

출근길에 소매치기를 당하는 건 이들의 삶에 무심할 수 없다는 반증이다. 그들을 돌보지 않고 혼자 잘 산다는 건 이 사회에서 불가능하다. 광장, 미술관, 쇼핑몰, 지하철은 누구에게나 열려있다. 보이지 않는 벽을 치고 살아도 섞이기 마련이다.      


유명한 예술가와 고상하게 인터뷰하는 자리. 관객석에 틱장애가 있는 사람이 온갖 듣기 힘든 욕을 퍼부어댄다. 생식기를 들먹이며 민망한 욕설을 추임새처럼 외친다. 모두 웅성거리며 불편해하니 인터뷰 진행이 어렵다. 이때 한 남자가 말한다. ‘정신적으로 아픈 것 같으니 우리가 이해하고 배려합시다. 그대로 진행하세요.’     



잘 산다고 해서 약자의 위치에 있는 사람들과 상관하지 않고 살 수는 없다. 마시는 공기, 매일 마주하는 거리, 심지어 카페, 식당 어디든 약자들도 출입할 수 있다. 우리가 보는 자들 외에 출입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또 얼마나 많은 것일까?   

  

그 피해자가 나라면 문제는 다르다. 누군가 도와준다면 충분히 위기를 모면해 목숨을 구할 수도 있는데 아무도 도와주지 않아 폭력이나 비슷한 상황에 노출된다면 얼마나 억울하고 두렵고 괴로울까? 군중은 아무 의미가 없다. 수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직접적으로 도와주는 한 사람이 있어야 한다.      


페이소스를 회복해 어려움에 처한 타인을 도와준다면 우리는 지금보다 덜 외로울 것이다. ‘다른 사람의 일을 내 일이라고 생각하려면 얼마나 자극적인 상황이 벌어져야 하느냐?’는 영상의 외침은 우리를 자극한다. 이제 깨어나라고. ‘저 아이는 타인이 아니고 우리 자신의 모습일 수도 있다고. 제발 서로를 케어하고 도움을 주자’고 외치는 것 같다.     


마음속에 고이 접어둔 약자에 대한 배려, 인류애 등의 마음을 꺼내어보게 하는 영화. ‘더 스퀘어’. 배경음악이 멋있고 서늘하다. 보는 내내 귀도 즐거웠다. 화면은 화려하고 메시지는 정확했으며 스토리 외에 볼 것이 풍성했던 영화다. ‘슬픔의 삼각형’을 만든 루벤 외스틀룬드가 감독한 영화다. 누구라도 도움을 받을 수 있는 현실 속 스퀘어가 있으면 좋겠다.      


*세상에는 수많은 얼굴과 얼굴이 있다. 전자가 나의 얼굴을 지칭한다면 후자는 나를 제외한 세상 모든 얼굴일 것이다. 앞의 얼굴도 중요하지만 뒤의 얼굴로 향하는 시선을 확장해 나가는 작업이 지금 내가 시도해 볼 수 있는 가장 이상적인 회복의 방향이다. 잘 산다는 건 뭘까. 섣불리 대답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얼굴을 들여다보려는 노력을 멈추지 않는 한 내 삶이 좀 더 의미 있어질 거라고 믿는다.    

 

*출처: ‘단어의 집’, 안희연, 한겨레 출판,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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