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노의 공포
-제62회 칸영화제 황금종려상 수상 (2009년)
-미카엘 하네케 감독, 주연 크리스티안 프리에델외 다수
공포,엄격,우울,천대,윤리,의심,규율
영화를 보며 떠오른 단어들이다.
이동진의 책 제목 ‘영화는 두 번 시작한다’ 처럼 끝나자마자 머릿속에서 영화가 다시 시작되었다. 영화를 눈으로 볼 때와 영화를 보고 나서 내 마음에 다시 돌려볼 때, 이렇게 두 번이다. 영화의 완성도에 대한 기준이 나름대로 만들어졌다. 여운이 많이 남는 영화가 좋은 영화인듯싶다. 볼 때는 재미있었지만 바로 잊어버리거나 생각할 거리가 없으면 다소 심심하게 느껴진다.
두고두고 곱씹어 보게 되고 궁금하고 생각하게 만드는 영화, 이해되지 않는 신(scene)들이 많아 머리 속에서 나름대로 이야기를 조합해 보아야 한다면 웰메이드 영화다. 그런 면에서 ‘하얀 리본’은 잘 만들어진 영화다. 보고 나서 계속 머리 속에서 상영되어진다. ‘도대체 왜 그러는 걸까? 누가 그랬을까? 내 추측이 맞는 걸까?’ 만약 추측이 맞다면 너무 오싹하고 끔찍하다.
1913년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기 바로 전 해, 독일의 작은 마을에서 남작의 아들이 제재소에 목매달려 있다. ‘누가 그랬을까?’ 마을의 의사는 말을 타고 가다 누군가 매달아 놓은 줄에 걸려 낙마한다. ‘누구의 짓일까?’ 어린 장애아는 실종되고 두 눈이 뽑힌 채 산에서 발견된다. ‘누가 저지른 일일까?’ 고구마 100개가 목에서 안 넘어가고 있는 상황이다.
영화는 마을의 교사였던 한 남자의 내래이션으로 진행된다. 온통 하얗거나 검거나 두 가지 색만 존재하는 하얗도록 눈부시고 오싹한 영화. 공포 영화는 아니지만 요소는 다 갖추고 있다. 심장이 조여오고 기분이 유쾌하지 않으며 다음에 무슨 일이 벌어질까 긴장된다. 자꾸만 손으로 화면을 가리게 되고 개운치 않은 기분에 화면을 멈출까 고민한다. 그러나 도저히 멈출 수 없고 결말이 궁금해 견딜 수가 없다.
끝까지 영화는 속 시원한 대답을 내놓지 않는다. ‘분명히 마지막에는 엄청난 파도가 밀려올거야’ 라고 기대했던 것과는 달리 불친절하게도 막을 내려버리고 만다. 관객에게 숙제를 떠안긴다. ‘네가 생각해봐, 힌트를 다 줬잖아, 퍼즐 잘 맞춰봐. 답을 알 수 있는 장치는 충분히 해 두었어. 이제 너의 차례야. 영화에 참여해’라고 말하는 듯하다.
다시 처음으로 간다. ‘무슨 장면이 나왔더라? 그 등장인물이 이런 말을 했었지? 아! 그 청년이 그래서 그런 말을 한 건가?’ 저절로 깨우쳐지고 깨달아지고 구슬이 줄에 꿰어지는 놀라운 현상을 경험하게 된다.
누군가 양배추 밭을 망친다. 얼굴도 안 보여주고 뒷모습만 보인다. 주민 절반이 고통을 당하고 있다. 범인은 수수께끼다. 목사 아버지는 마르틴과 클라라의 팔에 하얀 리본을 묶어준다. 하얀리본은 ‘순결과 순수, 도덕의식’을 상기하라고 묶어주는 것이다. 한 명의 아이가 잘못하면 모두 식사를 못하게 하고 굶긴다. 자위하는 아들의 손을 침대에 묶어놓는다. 그러면 나중에 시름시름 앓다가 죽게 된다고 협박한다.
남작 집의 헛간에 불이 난다. ‘누구의 소행일까?’ 예배에 남작은 불참하고 비척거리며 범인을 잡겠다고 사람들을 소집하기도 한다. 서로 의심하고 비난한다.
남작과 의사와 목사. 이 셋은 악의 상징으로 등장한다. 남작은 소작농들이 일한 만큼의 삯을 주지 않는다. 의사는 도움을 주는 여자를 모욕하고 심지어 딸에게 성적으로 몹쓸 짓을 한다. 목사는 지나친 신앙심과 도덕의식에 매몰되어 자라나는 아이들의 자유와 의식을 모두 묶어버린다. 아이들은 눈이 뽑힌 ‘칼리’의 집에 모여 있다. 의사의 딸에게도 자주 찾아가 잘 있냐고 물어본다.
아이들은 실수하고 방황하고 넘어지며 어른이 되고 배운다. 몰려다니며 재미있게 놀고 대화를 통해 성장한다. 육체적 성장기에 겪어야 할 자연스러운 생리현상도 있다. 어른들이 이러한 자연스러운 과정을 억제한다. 지나친 금기와 처벌로 공포심을 조장한다. 아이들은 분노를 누르고 악을 학습한다. 안에 차곡차곡 쌓아둔 분노는 그들만의 추악하고 원초적인 범죄로 그 모습을 드러낸다.
결과는 있는데 행위자가 누구인지 모르는 상황. 아이들은 아는데 어른들은 모르는 상황. 어른들에게 당한 만큼 돌려주는 아이들. 아니 어쩌면 몇 배의 대가를 치르게 하는 영악하고 순수한 악마들. 윤리나 도덕은 체벌, 금기, 억압으로 학습 되어질 수 없다는 것을 알게 하는 영화다. 차별과 불평들이 심화 되면 창졸간에 기습당하는 일이 벌어질 수 있다는 것을 눈으로 똑바로 보게 하는 영화 ‘하얀 리본’
영화는 결말만을 기다리며 숨죽여 보는 관객들을 쓰러지게 만든다. 20분을 남기고, 10분을 남겨도 끝까지 범인을 밝히지 않는다. 마지막으로 갈수록 긴장감은 고조되고 분유(紛揉)되어 있던 내용들이 비로소 하나로 모아진다.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몰라서, 범인이 누구인지 궁금해서 한숨에 몰아 볼 수밖에 없는 영화, ‘하얀리본’. 미카엘 하네케라는 감독이 알고 싶어 그의 영화를 더 보아야겠다.
감독의 역할은 막중하다. ‘무엇을 어떻게 찍느냐’가 이렇게 중요할 줄이야. 각본도 중요하지만 재료를 어떻게 요리해 완성시키느냐는 오롯이 감독의 몫이다. 흑백인데 무섭고 강렬하고 다채롭다. 그 어떤 색이 화이트와 블랙을 이겨낼 수 있을까?
인간은 자연의 일부이니 자연스럽게 대해야 한다는 것을 다시 배운다. 어른이라고, 더 배웠다고 함부로 남의 삶을, 특히 자녀의 삶을 좌지우지해서는 안 된다. 부모가 다 맞을 리 없다. 아이의 생각이 맞을 수도 있다. 어떻게 내 생각이 다 맞다고 확언할 수 있단 말인가? 세상을 더 온몸으로 살고 있는 아이들이 옳을 수도 있다. 자연스러운 몸짓으로 배워가게 내버려두자. 인위적인 조치는 어떤 명목으로도 그들을 옳은 방향으로 성숙시키지 못한다. 세상사 모든 것이 그러하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