뭄바이가 시간을 훔쳐요
All we imagine as light
제 77회 칸영화제 심사위원대사 (2024)
감독: 파얄 카파디아
주연: 카니 쿠스루티
간호사인 프라바는 언제나 차분하다. 고향을 떠나 뭄바이에서 직장 동료와 함께 산다. 독일에 간 남편은 점점 소식이 뜸해지고 난데없이 밥솥을 보내온다. 결혼하고 남편이 있으니 다른 사람을 쉽사리 만날 수도 없다.
다리는 없고 몸통만 있는 남편이 자꾸 나타난다는 할머니. 병원에서 나가고 싶다고 어린아이처럼 떼를 쓴다.
간호사인 다른 주인공 아누는 애인을 그리워하며 심심해한다. 남자친구와 함께 사는 삼촌이 결혼식에 간다고 한다. 아누의 남자친구는 좋아한다. 둘이 있을 생각으로 아누를 부른다. 그런데 갑자기 오지 말란다. 알고보니 폭우로 열차가 운행 중단되어 삼촌이 결혼식에 갈 수 없게 된 것이다. 실망이 큰 아누, 쓸쓸함과 좌절감이 밀려온다.
집세를 내지 못해 쫓겨나게 생긴 프라비타는 프라바에게 푸념을 늘어놓는다.
파르바티: 아마 내가 사라져도 아무도 모를 거야.
프라바: 우린 알아요.
축제장면이 이어진다.
뭄바이는 꿈의 도시가 아니라 착각의 도시야. 뭄바이규칙은 궁정에 살든 도랑에 살든 화내지 않는거야. 그래야 미치지 않고 살 수 있거든.
이런 표현만으로도 뭄바이의 삶이 어떨지 대략 짐작이 간다. 그러나 이것이 꼭 뭄바이만의 얘기는 아닐 것이다. 현대를 살아가는 모든 인간들의 모습이 아닐까?
프라바를 좋아하는 병원의 한 의사는 계약이 끝나 고향에 내려가려고 한다며 고백을 한다. 혹시 남아있어야할까요? 내가 남는다면 그 이유는...
프라바는 말한다. “저, 결혼했어요”
남자는 매달린다. “하지만...”
파르바티는 고향으로 내려가고 아누와 프라바는 함께 내려간다. 휴가를 즐긴다. 갑자기 바닷가에서 그물에 걸려 사람이 올라온다. 죽은 줄 알았던 사람을 프라바가 간호사의 기질을 발휘해 살려놓는다. 남자는 말한다. 며칠씩 공장에 있다가 사나흘 후에 밖으로 나오면 빛 때문에 눈이 멀거같아요. 어둠 속에서는 빛이 상상이 안돼요.
파르비타와 프라바, 아누, 시아즈는 함께 하고 해변가 어느 식당의 불빛과 함께 서로를 바라본다.
이들이 보는 빛은 무엇일까? 일상에서 꿈꿀 수 없는 빛, 이들은 모두 어둠에 갖혀 있다. 돌아오지 않는 남편을 기다리는 프라바, 부모의 반대로 남자친구를 마음대로 만나지 못하는 아누, 살던 집에서 쫓겨난 고향으로 내려오게 된 파르비타. 바다에서 구조된 한 남자의 말처럼 어둠 속에서는 빛이 잘 상상되지 않는다.
숨통을 조여오는 어둠. 좀처럼 나타날 기미가 보이지 않는 빛. 우리는 희미한 불빛을 겨우 붙잡고 살아가는 것이 아닐까? 빛이 언젠가는 찾아올 거라는 옅은 희망을 품고 버틴다. 우리가 빛이라 상상하는 모든 것은 과연 빛일까? 빛의 모양을 한 그림자는 아닌지?
영화속 시아즈와 아누가 찾아간 동굴 속에서는 희미한 빛 속에 조각들이 얼굴을 드러낸다. 누가 만들었는지 모를 돌 조각들. 사람의 얼굴을 하고 있다. 마치 갇혀있는 사람들 같다. 영화가 나타내려고 한 것들은 무엇일까? 암울한 현실을 그대로 조망한 건지? 아니면 빛이 찾아올 수 있으니 희망을 가지라는 건지? 결말은 없다.
프라바는 갑자기 바닷가에서 한 남자를 알게 되고 아누는 시아즈의 사랑을 확인받게 된다. 두렵지만 너와 함께 있으면 신기하게도 무섭지가 않다는 말을 듣는다. 돌아올 고향이 있는 프라비타.
우리는 언제나 어둠과 빛의 혼재 속에 살고 있다. 밤은 칠흑같이 어둡지만 반드시 빛이 올거라는 약속이 있다. 반복적인 희망 속에 우리는 걱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 현실은 항상 찾아오는 아침처럼 분명한 건 아니다. 언제 올지, 어떻게 찾아올지, 얼마나 밝을지, 우리가 원하는 빛인지 아무것도 알 수 없다. 우리는 기다린다. 살아있는 한. 언젠가 찾아올 우리가 빛이라 상상하는 모든 것을. 그렇지 않으면 단 하루도 살 수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