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니메이션이나 판타지영화에서는 벽장문을 열면 완전히 다른 세상이 펼쳐진다. 때로는 정원에서 문을 열고 새로운 세계로 들어가는 장면도 나온다. 문을 열려면 암호나 열쇠가 있어야한다. 또는 목소리를 따라가기도 한다. 빛을 발하거나 엄청난 굉음을 내며 문이 열린다.
현실에서 완전히 다른 세계는 어떻게 경험해볼 수 있을까? 지구 반대편으로 여행을 가면 가능할까? 매일 여행을 다닐 수도 없고... 간접적으로 다양한 세계를 경험하는 방법으로 책만한 것이 없다. 박웅현은 ‘책은 도끼다’라는 표현으로 의식이 책을 통해 깨어진다고 말한다.
어떤 책은 놀이동산의 롤러코스터라도 탄 듯 의식을 오르락 내리락 흔들리게 하고 또 어떤 것은 깊은 선사시대 동굴이라도 탐사하는 듯 축축한 내면의 의식을 들여다보게 해준다. 나의 경우 이런 경험은 독서모임을 통해 더욱 확장되었다.
독서모임을 하게 되며 알게 된 시인 ‘백석’. 한 회원이 ‘백석평전’을 추천해서 함께 읽게 되었다. 평전에 실린 발췌한 시로는 만족이 되지 않아 시집을 구매했다. 알맞게 무쳐진 시골 나물을 비벼 먹듯, 맛있고 달큰한 수정과를 마시듯 글들이 세련되고 예민하며 건강하다.
그 시대에 이런 글을 쓰는 시인이 있었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시어가 청신하고 고아하며 때로는 웅숭깊다. 우리나라 토속의 동물, 식물, 먹거리등의 묘사와 일제 강점기를 살아내야했던 시인의 처연함이 아리게 전달되었다. 그와 관련된 이야기는 실화임에도 불구하고 영화처럼 비현실적이다. 뿌리가 깊고 가지가 온 사방으로 뻗어 온 마을을 덮고도 남을 거대한 나무라도 보는 듯 했다. 그 그늘에 쉬어가듯 많은 예술가들이 백석의 영향을 받아 작품을 토해냈다.
찰리 맥커시의 ‘소년과 두더지와 여우와 말’은 어른들이 읽어도 좋은 동화이다. 숨막히도록 아름다운 그림과 간명한 메시지는 책장을 넘길 때마다 놀라움을 선사한다. 삶과 관계에 대한 통찰이 숨겨져 있다. 작가는 이 책이 여덟 살이든 여든 살이든 누구라도 읽을 수 있다고 소개한다. “난 아주 작아”라는 두더지의 말에 소년은 답한다. “그렇지만 네가 이 세상에 있고 없고는 엄청난 차이야”
“이 다음에 크면 어떤 사람이 되고 싶어?”라는 질문에 “친절한 사람”이라고 답하는 소년의 마음을 보며 마음이 정화되고 삶을 돌아보게 된다. 난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지, 이루고자 욕심부리던 많은 것들이 진정으로 필요한 것인지, 여전히 나로만 가득한 마음에 잔잔히 파동이 인다.
“어떤 것도 친절함을 이길 수 없어. 친절함은 조용히 모든 것을 압도해”라고 말이 말한다. 나는 누구에게 이토록 압도할 만큼의 친절함을 베푼 적이 있었던가? 누구의 친절을 돈으로라도 사고만 싶어했던 못난 모습이 물에 비친 듯 선명해 부끄러워진다. 책을 덮은 후 마음은 잠시나마 아콰마린색으로 변해있다. 곧 퇴색될 마음이지만 책으로 연 세상은 나를 잠시 그곳에 묶어두었다.
‘나는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의 경비원입니다’는 뉴요커에서 일하던 ‘페트릭 브링리’가 형의 죽음으로 많은 것을 내려놓고 경비로 일하면서 느끼고 경험한 것을 기록한 것이다. 경비원이 하는 일이 많다는 것에 놀랐고 관람객의 다양한 면모에 다시 놀랐다.
‘위대한 그림은 거대한 바위처럼 보일 때가 있다. 말로 표현하기에는 너무 냉혹하고 직접적이며 가슴을 저미는 바위같은 현실 말이다’
미술관에 고용된 사람만 2,000명이 넘고, 무엇이든 만져보려는 관람객이 많으며 본인도 경비이기 전에 관람객이라 200시간 넘게 피카소의 드넓은 머릿속을 다닐 수 있게 되어 행복하다는 이야기들이 담겨있다. 방대한 자료 앞에 어디부터 구경해야 할지 행복한 고민에 망설였던 대영박물관의 기억이 새삼 떠올랐고 오르세 미술관에서 허가를 받고 그림을 모사하던 사람들의 모습이 선명히 소환되고 내셔널갤러리에 체험학습 온 런던 유치원생들의 올망졸망한 눈빛과 귀여운 몸놀림이 생각났다.
책이라는 열쇠를 통해 새로운 세상을 들여다본다. 인간의 내면, 다른 나라의 상황, 겪어보지 못한 환경에서 인간이 어떻게 살아가고 고난을 극복하는지 등을 경험해본다. 문이 열리고 한발 한발 내딛는다. 정글도 나타나고 고요한 숲도 만나며 호수와 바다도 보인다. 무한한 세계가 펼쳐져 잘 노닐다 책장을 덮으면 다른 사람이 되어있다. 비록 돌아서면 일상이 기다리고 있을지라도.
흰밤
백석
녯성城의돌담에 달이 올랐다
묵은초가집웅에 박이
또하나달같이 하이얗게빛난다
언젠가마을에서 수절과부하나가 목을매여죽은밤도
이러한밤이었다
출처: 정본백석시집(문학동네,20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