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미와 꽃기린
나는 장미.
베란다 볕이 잘 드는 곳, 크지 않은
그러나 나에게는 제법 넉넉한
화분에서 살아.
내가 여기로 오기 전
잠시 머물렀던 화원에서는 꽃을 많이 피웠어.
하지만 지금은 아니야.
기껏 꽃봉오리를 올려놓으면
득달같이 달려드는 진딧물 때문에 살 수가 없어.
내가 가진 가시도 아무 소용없었어.
그 등살에 몇 없는 이파리만 간신히 붙잡고 있어.
초라한 내가 슬퍼.
나는 꽃기린. 어디서든 잘 살아.
처음에는 나 혼자였지만 금세 또 다른 나를 키워냈어.
그래서 베란다 여기저기 내가 있어.
그런데 그게 썩 좋은 것은 아닌가 봐. 흔해졌으니까.
어느 추운 겨울 나는 싹둑 잘렸어.
그리고는 마른 가지 덤불이 쌓인 곳에 휙 던져졌지.
아... 나도 곧 말라죽겠지?
며칠이 지났어. 아직은 버티고 있지만 힘들 거야.
그런데 이게 웬 일?
누군가 나를 집어 들더니 어느 화분 흙 위에 올려놓는 게 아니겠어?
그걸로 끝이었지. 하지만 충분해.
그다음은 내가 할 수 있거든.
그 겨울 나도 기억해.
가뜩이나 추운데 꿈조차 꿀 수 없으니 더 춥더라고.
이렇게 겨울을 견디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봄이라고 꽃을 피우면 또 그들의 먹이가 될 텐데.
사는 게 지루하고 재미없고 끔찍했어.
그때 가시가 빽빽한 어떤 녀석이
내 화분 안으로 툭 떨어진 거야.
뿌리는 없고 몸뚱이 한 가닥만 툭.
쟤는 곧 죽겠구나 했지 뭐.
그래서 그냥 두었어.
혼자 있는 것보다는 나은 것도 같았고.
그런데 그 친구... 여간 애를 쓰는 게 아니더라고.
내 몸에 기대어 간신히 서 있던 녀석이
어느 날부터는 스스로 서는 게 아니겠어?
아, 글쎄... 뿌리를 내린 거야.
신통방통한 녀석이지 뭐야.
네가 나를 받아 주었잖아.
버림받았구나, 이렇게 죽는구나 싶었거든.
뿌리끼리 얽히면 너도 꽤나 성가실 텐데...
두 손 들고 환영까지는 아니더라도
그냥 그냥 눈 감아 주는 것 같더라고.
고맙지 뭐야.
생각해 보니 네 덕분이었던 것 같아.
혼자였을 때는 앙상했거든.
살았나? 죽었나? 싶을 정도로 절망적이었어.
그런데 너랑 함께 지내면서 튼튼해졌나 봐.
네가 죽지 않고 버티는 모습을 보면서
나도 용기가 났으려나?
날이 조금 풀렸을 때
힘껏 꽃봉오리를 올렸어.
그리고 팝! 꽃을 틔웠지.
가슴이 조마조마했어.
진딧물들이 쳐들어 올 거 같았거든.
그런데 아닌 거야.
말짱했어. 내 꽃이 말이야.
아주 말짱했다고.
네가 나를 받아주었던 그 겨울...
많이 추웠나 봐.
나는 꽤 튼튼해서 추위 따위는 걱정하지 않거든.
그런데 너와 함께 한 나 말고 다른 화분의 나는
모두 죽었어.
이 베란다에서 내가 있는 곳은 이제 이곳이 유일해.
신기한 이 이야기는 실화다.
화원에서 맘먹고 장미 화분을 들였는데
그 해 말고는 꽃을 볼 수 없었다.
몇 송이 봉오리가 올라오면 그보다 조금 빠르게
진딧물이 올라왔다.
여러 가지 방법으로 진딧물을 잡아보려 했지만
집요하게 버텼고 결국에는 꽃도 끝났다.
집안에는 진딧물의 천적이 없어서 어쩔 수 없는 걸까?
내다 버릴까 싶다가도 꽃은 볼 수 없어도
살아는있는 식물이라 그러지 못했다.
그에 비해 꽃기린은 그만해도 될 텐데 싶을 만큼
자주 꽃을 피우고 무럭무럭 자랐다.
남편은 빈 화분 여기저기에 줄기를 잘라 꽂았다.
그럼 또 잘 자랐다.
그러다 귀찮아졌나 보다.
어느 날 보니 아예 잘라 버렸더라.
빨랫감을 뒤적이다 말고 그것을 주워
무심코 초라한 장미 화분에 던졌다.
뿌리내리라고 좋게 세워준 것도 아니다.
그냥...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잊고 있었는데 살았더라.
고놈 참 독하다 했다.
봄이 가까이 왔을 무렵 장미 꽃봉오리가 올라왔다.
또 진딧물을 봐야 하는구나 싶었는데
매일매일 살펴도 진딧물이 보이지 않았다.
이상하다. 고개를 갸우뚱갸우뚱...
여름 지나니 더 튼튼해진 장미는 더 많은 꽃을 피웠다.
3년쯤 되었나 보다. 꽃기린과 장미의 동거가 말이다.
둘 다 무성하게 잘 자랐다.
옛날 초라했던 시절은 아예 없었던 것처럼.
그 덕에 계절 상관없이 꽃을 볼 수 있게 되었다.
얼마 전에도 세 송이의 꽃을 피웠고
또 다른 꽃봉오리 두 개가 맺혔다.
식물이라 수동적일 거라는 생각은
어쩌면 착각일지도 모른다.
진딧물의 공격에 몸서리치는 또 다른 화분이 있어
거기에도 꽃기린을 꽂아두었다.
9개월 정도를 꽃기린이 사투를 벌였다.
끝내 죽었다.
얘들도 저마다 성향이 있나 보다.
함께 나누면 좋았을 것을...
꺼려하던 백량금은
올해는 작년과 다르게 아예 꽃이 없다.
기적은 함께 일 때 비로소 일어나는 것 같다.
고양이들과 내 것을 나누면서부터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세계에 발을 딛게 되었다.
인풋과 아웃풋이 분명했던 그동안의 삶의 방식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을 벌이고 있다.
아직 뭔가 열매를 맺은 것은 아니지만
또 여전히 좌절을 경험하고 있지만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것 자체가 기적이다.
고개를 넘는 순간마다 그들이 보인다.
어떤 이들의 눈에는
세상 쓸데없는 짓일지도 모르는 일을 하면서부터
세상 무용한 것들을 사랑하게 되었고
그 가치를 알게 된 것이다.
대장이 아픈 모양이다.
먹는 것도 시원찮고 축 처져 있는 모습이
그저 나이 때문이라 넘기려니 자꾸 마음에 걸린다.
그래서 일주일 전 약을 지었다.
다행히 좋아하는 파우치에 섞어 주면 잘 먹었다.
고작 하루 한 번 가루약 한 봉씩 먹이는데
그게 뭐라고 효과가 있다.
예전처럼 좋아라 앙앙 대는 녀석을 보니
집으로 돌아오는 나의 걸음이 한결 가볍고 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