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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가득 Mar 14. 2023

해외에서 교통사고가 나면?

드르르륵.. 쾅!


 평소와 같이 애호박 농장에 갔다가 토마토 농장으로 넘어가던 길이었는데.. 우리가 타던 차는 항상 불안했다. 딱 봐도 꽤 오래됐고 항상 자잘한 문제들이 있었지만, 어찌어찌 굴러는 가서 그런지 수리를 하지 않았다.


가끔 엔진 문제로 차가 덜덜덜 떨리거나, 타이어 전체가 이미 마모가 돼 도로에서 살짝 미끄러지는 경우가 있었다. 하지만 그 차를 타는 운전자나 동승자들 모두 차에 무지한 사람들이라 안일하게 넘어갔다. 


그렇게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은 세컨 비자 취득 6일 전 터지고 말았다.


 사고 당일 지나가고 있던 도로는 비포장도로였다. 바람이 불어 모래가 휘날렸고, 울퉁불퉁한 도로를 달리며 불안정한 운전이 계속됐지만, 난 피곤한 탓에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토마토 농장에 거의 도착할 때쯤이었는데, 갑자기 운전자가 소리를 질렀다.


 “야야야야 속도가 안 줄어!!!!”


 격양된 목소리로 공포에 질린 듯한 목소리에 깜짝 놀라 잠에서 깼다. 고개를 든 순간, 앞차와의 간격은 단 3미터, 부딪히기 직전이었다. '설마 부딪히겠어'와 '이 속도 진짜 부딪힌다고?'가 동시에 들자마자 


쾅!


 온몸이 앞으로 튕겨져 나갔다가 안전벨트 덕에 다시 몸이 돌아왔지만, 머리가 앞, 뒤 시트에 강하게 부딪혔다.


 벨트가 가슴을 확 압박하면서 숨쉬기가 어려웠고, 머리는 빙글빙글 도는 느낌이 들며 희미하게 정신을 잃었다. 정신을 부여잡고 벨트를 풀고 차에서 기어 나오니 현장은 아수라장.


부상자들이 차에서 기어 나와 토하고 울며 주저앉기 시작했다. 지나가던 동료들이 내려서 매니저에게 연락했고, 그가 와서 대처해 주기를 기다렸다.



 30분쯤 지나니 매니저가 도착해 우리에게 온..? 게 아닌 차 상태를 봤다. 우리 모두 벙쪄 '저 사람 뭐 하는 거지?' 싶었지만 의지할 사람이 매니저뿐이니 그가 우리에게 오기를 마냥 기다렸다.


 하지만 그는 차 상태를 보더니 노발대발하며 사고를 낸 운전자에게 향했다. 윽박지르며 화를 냈고 차 값은 어쩔 것이며 그 후 대화는 어이가 없어서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또다시 30분이 흘러 그제야 우리에게 왔지만, "괜찮냐?" 걱정이나 위로기 아닌 그저 형식적인 말투. 매니저 차에 모두 타 우린 병원이나 경찰서를 향한 것이 아닌, 집으로 갔다.


 다들 방에서 골골대다 저녁 먹으러 거실에 모이니, 냉랭한 공기 속 침묵을 깨는 그의 한마디.


"내일 일 할래, 말래?"


 안 그래도 농장에 일손 부족한데 우리까지 빠지면 어떻게 되는지 우리가 인지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물어본 질문이었다.


 두 차 다 매니저의 차였기에 그의 심정 또한 불편하고 쓰리겠지만, 오늘 그 박살 난 현장을 보고도 이러한 그의 대처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지금껏 3개월간 한 집에서 생활하며 일거수일투족을 공유했고, 일이 힘든 만큼 서로에게 의지하며, 매니저보단 믿음직하고 좋은 형이라고 생각했던 사람이다.


 그렇게 의지하고 좋아했던 사람의 '진짜 모습'이라는 생각에 더 이상 대화를 하고 싶지 않았다.


 '당신 가족이 이렇게 교통사고가 나도 그 따위로 할 수 있겠냐'가 목 끝까지 올라왔지만, 그러는 순간부턴 혼자가 되는 것뿐만 아니라 아무 데도 갈 수 없는, 고립되는 상황이 상상되자 다시 꾹 삼켰다.


 사실은 그 상황이 무서웠다.


결국 사고 다음 날 전원 출근했다.


 교통사고 소식을 듣거나 현장을 본 동료들은 다들 몰려와 괜찮냐며 걱정해 주는 반면, 슈퍼바이저들은 입이라도 맞춘 듯 어떠한 말도 언급하지 않았고 무시하기 위해 애쓰듯 분주히 움직였다.


 그중 평소에도 밉상이었던 한 슈퍼바이저는


 “그 정도면 여긴 다 일해~ 생색내지 말고 얼른 모여”


 웃으면서 말하지만, 그날따라 노란 머리에 지저분한 옷이 그렇게 더 꼴 보기 싫을 수 없었다. 하여간 밉상..


일이 시작됐고 한 시간쯤 지나가니 부상자들의 일 속도가 급격히 떨어졌다. 목, 허리, 무릎 등 온몸을 짚으며 고통을 호소했고, 누군가는 식은땀도 흘렸다. 하지만 또다시 밉상 슈퍼바이저는 소리를 지르며


 “그딴 식으로 할 거면 나가!”


 뻔히 비자 때문에 일해야 하는 거 알면서 뱉는 윽박. 누가 시켜서 저렇게 말하는 건지, 아님 인간이 아닌 건지 싶었다.


 '더했다간 진짜 몸이 상할 수도 있겠구나' 싶었고, 교통사고 후유증이 무섭다는 말에 포기하기로 마음먹었다.



 퇴근 후 담당 슈퍼바이저에게 찾아가 ‘비자 취득까지 5일밖에 안 남았는데 더 이상 일을 할 수가 없다 어떻게 좀 도와줄 수 없냐’. 하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당연히 ‘노’.   

          

‘그건 너만 특혜를 달라는 거기 때문에 안된다 ‘하여 깔끔히 마음을 접었다. 이젠 정이 다 떨어져서 이곳을 하루빨리 탈출하고 싶었지만, 불행히도 그럴 수는 없었다.


 즐겁게 잡았던 일정이 내 발목을 잡았다. 농장 끝나고 고생했다는 의미로 스스로에게 상을 주고자 발리행 티켓을 끊어놨었다.


 하지만 사고 2일 전 예약이었고, 여유 있게 2주 후에 가겠다 했던 게 날 이곳에 묶었다. 집 또한 이미 그때까지 집값을 내놔서 여길 나가면 결국 내 돈만 나간다. 갈 곳 없는 백수가 되었다.



               

 그렇게 사고 난 지 3일째가 됐다.


 비자도 포기했고 몸도 상했고 돈도 돈대로 써, 우린 그에 대한 보상을 위해 변호사를 고용했다. 그는 우선 몸 상태를 알아야 하니 병원을 가라고 했다.


 생각해 보니 아직 병원도 안 갔었네. 그렇게 번다 버그에서 가장 큰 병원을 갔지만, 악재가 더한 악재를 부른 것인지.. 완전히 날 밑바닥으로 끌어내린 병원.

               

오후 1시에 응급실로 향했다. 진료를 예약하고 하염없이 기다리기 시작했다.


 3시간, 4시간이 지나니 아무리 외국이어도 이건 아니다 싶어 변호사에게 물었지만, 호주는 그런 경우가 허다하니 조금만 더 기다리자는 말 뿐이었다.


 이상하다 싶어 직원에게 물어보면 하염없이 기다리라는 말뿐이었고, 변호사 또한 호주 응급실은 시간이 오래 걸리는 편이어서 조금만 더 기다려 보자고 했다.


하지만 6시간이 지난 오후 7시, 그제야 무언가 잘못되었음을 느꼈다. 나보다 한참 늦게 온 사람들은 이미 진료를 받고 돌아갔는데, 우린 그때까지 단 한 명도 진료를 받지 못했다.               


“우리 이미 6시간이나 기다렸어, 우리보다 늦게 온 사람들도 다 진료 보고 가는데 우리는 언제 해?”               

간호사는 관심 없다는 듯


 “너희만 아픈 거 아니야, 기다려”

           

변호사한테 말하니 대신 말해보겠다며 바꿔달라 했지만, 통화를 거부하며 우리를 완전히 무시해 버렸다.


하지만 우리에겐 이곳 말곤 다른 선택지가 없었고 무조건 여기에서 진료를 받아야 했다. 결국 이미 기다린 시간이 아까워 저녁도 먹지 못한 채, 새벽 2시까지 기다리니 그제야 진료를 받을 수 있었다.


 진료도 '어디 어디 아팠고 사고는 이렇게 났다' 설명하니 알겠다며 진단서 끊어주더니 가란다. 이걸 위해 13시간을 아픈 허리를 부여잡고 기다렸다니.


 서러워서 눈물이 터질 것 같았지만, 우는 모습을 저들에게 보이면 지금껏 열변 토하며 버텨온 내가 지는 기분이라 끝까지 참았다.

              

 시골에 살다 보니 가끔 인종차별이 있었다.


 꼬맹이들이 자전거로 지나가거나 젊은 사람들이 차로 지나가면서 ‘fucking asian’를 외치며 중지를 들이미는 경우는 있었다.


 바나나 먹고 있으면 ‘yellow mokey’라며 말하는 걸 듣곤 그 후론 지금까지 해외 나가면 밖에서 바나나는 안 먹는다.


 하지만 이 정도는 해외 나와 감수할 수 있는 정도였지만, 이렇게 병원에서처럼 티 나지 않게 무시해 가며 인종차별을 하는 경우는 처음이었다.     

          

처음엔 ‘아니겠지, 뭐 이유가 다 있겠지’ 어떻게든 좋게 생각해 봤다.       

        

하지만 그 응급실에 아시아인은 우리 밖에 없었고 다른 사람들 다 해주고 우리 외에 아무도 없을 때가 돼서야 인종차별이었다는 것을 알았다.


꼭 이곳에서 진료를 받아야 하는 ‘을’의 입장, 이방인에 대한 차별에 서러움은 불타던 열정을 훅 꺼버렸다.     


그 후 우린 모든 상황에 예민해졌다. 서로 의지해도 모자랄 판국에, 별로 다치지도 않았는데 왜 일을 크게 만들었냐며 완전히 사이가 틀어지고 말았다.


 결국 난 집 사람들 모두와 싸워 혼자가 되었고, 차도 없는데 집도 시내까지 1시간 거리라 마트도 가지 못한 채 방에 박혀 1주일을 다시 버텼다.

               

 나에게 그들은 ‘농장 라이프’ 전부였는데 등을 지고 나니, 이곳에 나에게 남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좋았던 기억들은 묻혔고 질릴 대로 질려버려 그곳도, 그 사람들도 다시는 보지 않았다. 집을 떠나는 택시에 타 밖을 보니 아무도 배웅을 나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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