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력의 기억, 멈춘 눈물
어두운 작은 방.
다연은 잠을 청하려 누웠다가
옆으로, 다시 바로, 또다시 옆으로 뒤척였다.
눈을 감아도 마음은 가라앉지 않았다.
밖에서는 술기운 오른 사람들의 시끄러운 웃음소리,
그리고 장례 첫날부터 끊이지 않는 염불 소리가 귀에 박혔다.
늦은 새벽인데도 조문객의 발길은 멈추지 않았다.
다연은 도저히 잠이 오지 않는 듯
몸을 일으켜 방 한쪽에 무릎을 끌어안고 앉았다.
고개를 무릎 위에 파묻은 채,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 “죽으면 조문 오는 사람도 없을 줄 알았는데… 왜 이렇게 많은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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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랬다.
아버지는 동네에서 손가락질받던 술주정뱅이였다.
길에서 마주치면 모른 척 돌아서거나,
골목으로 비켜서는 이들이 수두룩했다.
그런데 장례식장은 사람들로 가득했다.
이상하지만,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들은 아버지를 애도하러 온 게 아니었다.
인맥이 많은 동생에 대한 예의였다
조문실에서 장례식장 입구까지
근조 화환들이 줄지어 늘어서 있었다.
다연은 그 이름들을 흘끗 바라보았다.
회사, 부서, 단체명들.
그 모든 이름 뒤에 숨어 있는 건 진심이 아니라 ‘체면’이었다.
웅크린 다연의 입에서 씁쓸한 말이 흘러나왔다.
> “젠장, 나만 바보 같아.
안 와도 아무도 모르는데… 왜 왔을까, 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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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슴 깊은 데서부터 무언가 베어져 나가는 듯,
속은 미슥거리고 목덜미는 서늘했다.
이 가족 중 아버지의 술주정과 폭력, 폭언을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는 사람은
다연, 오직 그녀뿐이었다.
> “다… 기억상실증이야? 어떻게 잊을 수가 있지?”
눈물이 흐르기 시작했는지도 몰랐다.
얼굴이 젖고 나서야,
아… 내가 울고 있었구나, 깨달았다.
문득,
어둡고 스산한 외딴섬에 혼자 버려진 듯한 기분이 덮쳐왔다.
아무도 없는 바닷가.
격한 물살에 떠밀리며 파도에 흔들리는 작은 존재.
그 한가운데서 다연은 힘없이 흔들렸다.
싸한 한기가 온몸을 훑고 지나가자,
그녀는 누군가 들을까 두 팔로 자신을 감싸며 작은 소리로 흐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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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아버지의 죽음을 슬퍼하는 눈물이 아니었다.
이건…
잊히지 않은 기억들이 몰려와 터져 버린 눈물이었다.
어린 시절,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했던 공포와 불안, 원망이
파도처럼 몰려와 가슴을 할퀴었다.
> “오지 말았어야 해… 너무 아파…”
속으로 외쳤지만,
그 외침은 메아리조차 없이 그녀 안에서만 울려 퍼졌다.
머리가 어지러워지고,
귀 안에서는 윙―윙― 하는 소리가 퍼져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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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였다.
그 소리.
그때와 똑같은,
오토바이 엔진 소리.
그리고 이어지는 개 짖는 소리.
소리가 가까워질수록,
다연 안의 어린아이가 깨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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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불을 머리끝까지 덮고 옆으로 누워 있던 어린 다연.
귓가에 울리는 심장박동.
쿵쾅, 쿵쾅.
저 멀리서 들려오는 술 취한 발소리.
급히 뛰어나가는 엄마의 발소리.
그리고 문이 열리는 소리.
억지웃음을 띤 엄마의 목소리.
> “다연 아버지, 왔어요? 오늘은 기분 좋게 한잔 했어요?”
어린 다연은 이불속에서 간절히 기도했다.
‘제발, 제발 말실수하지 마라.
오늘은 조용히 지나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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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그 기도는 번번이 부서졌다.
엄마의 말 한마디가 술주정의 핑계가 되었고,
아버지는 온 가족을 불러 모아 두들겨 팼다.
문과 벽, 가구와 전자제품까지 박살 내며
허름한 월세집을 폐허로 만들었다.
무너진 집처럼,
온 가족의 마음도 그때마다 조금씩 부서져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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웅크린 채 눈물로 젖어 있던 다연은 속으로 묻는다.
‘그런 인간의 죽음을 왜 슬퍼해?
그리고… 어떻게 잊을 수 있지, 그날들을?’
아버지의 폭행보다 더 아픈 건,
그 기억을 함께 겪었던 가족들이
지금은 다 잊은 듯 울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마치 같은 지옥을 건너왔지만,
다른 세계에 도착한 사람들처럼.
누군가는 망각 속에서 울고,
누군가는 기억 속에서 운다.
그리고 다연은 깨닫는다.
눈물이란 단순히 슬픔의 징표가 아니다.
기억을 붙잡는 사람과 기억을 버리는 사람을 가르는, 보이지 않는 경계선일지도 모른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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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용서’란,
그 경계선을 넘어설 수 있는가에 대한
끝나지 않는 숙제인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