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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화 아카자에게서 본 나의 얼굴 – 귀멸이 던진 거울

분노와 욕망 속에서 흔들리는 인간의 마음

by 소망안고 단심

세상은 바쁘게 돌아가고, 그 속에 있는 나도 바쁘다.

하루 종일 움직이고, 일하고, 관계 속에서 휘둘리다 보면

머릿속은 멈출 줄 모르고 쉼 없이 굴러간다.


그러다 보면 문득,

쉴 새 없이 돌아가는 머리를 식히고 싶다는 생각이 스치듯 올라온다.

모든 소음과 걱정을 내려놓고, 잠시 멈추고 싶다.


내 방식은 단순하다.

카페 구석 자리에 앉아 아메리카노 한 잔을 앞에 두고,

책장을 넘기거나 글자를 써 내려간다.

검은 커피 향이 내 마음의 복잡한 결을 정리해 주는 것 같다.


또 어떤 날은, 혼자 극장에 앉아 영화를 본다.

낯선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면

내 안의 복잡한 생각들이 잠시 자리를 비켜준다.

주인공의 감정에 몰입하다 보면

내 마음의 무게도 조금은 덜어진다.



결국 중요한 건,

“쉼을 허락하는 용기”라는 생각이 든다.


세상은 멈추지 않지만,

나는 잠시 멈춰 설 수 있다.

그래야 다시 걸어갈 힘을 얻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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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그날은 달랐다.

딸아이가 보자고 해서 억지로 따라간 영화, 귀멸의 칼날: 무한성편.

영화를 좋아한다 해도 조금은 까다롭게 고르는 나에게

귀멸의 칼날은 사실 관심 없는 작품이었다.


하지만

‘딸아이를 위해서라면 뭔들 못 하리’ 하는 마음으로 영화관으로 향했다.

그리고, 영화를 보다가 졸아버린 건 이번이 두 번째였다.




그러다 어느 순간, 스크린 속 대사가 내 가슴을 파고들었다.

“행복의 그릇에는 구멍이 나 있다. 그래서 행복이 차지 않는다.”

행복을 아무리 부어주어도 차지 않고,

그저 흘러내리는 그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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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간 나는 생각했다.

‘아, 이 영화 졸며 볼 영화가 아니구나.’

그 장면에서 나는 내 삶과 지금 시대를 비춰보게 되었다.


쉼 없이 채우고 또 채워도 늘 허기진, 이 시대의 우리 모습과 너무 닮아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문득 스스로에게 물었다.


‘하나님께서 내게 많은 복을 부어주셨는데, 나는 만족하며 감사하고 있었는가?’

그 질문이 내 마음을 흔들었다.




그때부터 영화 속 인물들의 사연에 집중했다.

혈귀들은 단순히 나빠서 혈귀가 된 것이 아니었다.

사회, 환경, 운명이 그들을 그 길로 몰아넣었다.


그중에서도 아카자, 본명 하쿠지의 사연은 내 마음을 무너뜨렸다.

빈민가에서 병든 아버지와 단둘이 살던 소년은

아버지의 약을 구하려 어린 나이에 도둑질을 했고, 붙잡혀 낙인이 찍혔다.

아버지는 “아들이 범죄자로 살 바엔 내가 죽겠다”며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남은 건 어린 하쿠지의 죄책감과 분노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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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무도장 주인 케이조 사부를 만나 삶의 전환점을 맞았다.

그곳에서 딸 코야히를 간호하며 사랑을 키웠고, 함께 미래를 꿈꿨다.

하지만 누군가 우물에 독을 타고, 케이조 사부와 코야히는 세상을 떠났다.

하쿠지는 분노에 휩싸여 다른 도장 사람들을 몰살했고,

그 현장을 본 무잔은 다가와 속삭였다.


“더 강해지고 싶지 않느냐?”

하쿠지는 결국 피를 받아들였고, 아카자로 재탄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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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장면에서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흘렀다.

괴물이 되었어도 사람을 지키려는 그의 마지막 진심,

옛 기억을 떠올리며 재생을 멈추고 스스로 자결하는 모습—그것이 너무 아팠다.


아카자를 보며 나는 내 안을 들여다봤다.

겸손을 말하면서도 더 높아지고 싶어 하고,

동료에게 화를 내고, 나를 짓밟는 사람을 보면

‘더 강해져서 복수하리라’는 마음이 올라온다.

그런 끝없는 욕심은 어디서 온 걸까.




무잔의 완벽주의와 통제욕, 인간 혐오 같은 모습도 내 안에 있었다.

실패를 용납하지 않고, 남을 믿지 않으며,

자신을 선택받은 존재라 여기는 태도—

그동안 내가 일하면서 보였던 모습과 다르지 않았다.




혈귀와 싸우는 귀살대도 사실은 피해자들이다.

사랑하는 가족을 잃고, 사회적 불의와 환경의 폭력에 맞서야 했던 사람들.

그러나 그들은 달랐다.

분노를 복수로 쓰지 않고, 무너진 세상을 바로잡고 사람을 지키기로 선택했다.

심리학자 빅터 프랭클은 말했다.

“고통은 피할 수 없지만, 그 고통에 어떻게 반응할지는 선택할 수 있다.”


혈귀와 귀살대의 차이는 바로 이 한 끗의 선택이었다.




사람이 혈귀가 되는 건 단순한 타락이 아니다.

삶의 모든 희망이 무너지고, 더는 버틸 힘이 없을 때 찾아오는 유혹의 순간이다.

그리고 현실의 유혹은 다양하다—범죄, 불법, 폭력, 비윤리적 선택.

그것들 뒤에는 언제나 사회 구조와 권력의 그림자가 있다.



부익부 빈익빈의 시대, 절망을 해결하지 않고 오히려 이용하는 시스템.

그것이 바로 오늘의 무잔이다.

사람들을 끝없는 경쟁으로 몰아넣고 서로 밟게 만드는 구조.

그 구조 속에서 새로운 혈귀가 매일 태어나고 있다.


나는 깨달았다.

내 안에도 ‘덜 아프기 위해 남을 더 아프게 만드는 마음’이 있었다는 것을.

부끄럽고 무서웠다.



그래서 다짐한다.

나는 더 강해지기 위해 남을 짓밟는 괴물이 되지 않겠다.

나는 누군가의 절망을 외면하지 않겠다.

그것이 오늘의 무잔과 싸우는 작은 방법이며,

우리가 인간으로 남는 유일한 길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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