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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존새 Jul 23. 2020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 오늘을 살아간다.

1. 엄마, 그러니까 난 더 괜찮은 딸이 되고싶어.


  

    엄마, 그러니까 난 더 괜찮은 딸이 되고싶어.  

22살 나는 더이상 나의 어두운 이야기를 누군가에게 꺼내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하지만 그 순간을 잘 겪어온 내게 그날의 문장은 더이상 어둡지 않다. 오래된 기억을 다시 꺼내어 보니 먼지가 가득 쌓여있다. 먼지를 툴툴 털어본다. 제일 첫번째 글로 서문을 떼야겠다. 바로 엄마와 아빠의 첫 만남 이야기.

20살의 어린나이로 예쁘고 당돌했지만 세상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시골 소녀는 28살의 남자를 만난다. 6남매중 둘째로 태어나 언제나 존재감을 확인 받고싶었던 우리 엄마는 다정하게 이름을 불러주던 그 남자와 사랑에 빠졌다.

엄마의 이름을 부르며 머리를 쓰다듬었을것이다. 아무것도 모르는 둘째딸은 모든 사람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그 남자와 연애를 이어갔다. 어디까지 내가 엄마의 이야기를 해도 되는지 모르겠지만 일단 솔직해져 보겠다.

사실 아직까지도 우리엄마는 아빠가 빌려간 돈 때문에 사랑하지도 않았지만 그와 결혼했다 말하지만 나는 안다. 나의 언니 또는 오빠가 될 아기는 하늘나라로 가버렸다는 것 을. 그게 아니라면 그 육신에 깃들어야 했을 나의 영혼이 엄마의 스트레스 라는 괴물때문에 망가져서 어쩔 수 없이 이 몸에 내 영혼이 들어와있는 것 같기도 하다.

아기는 엄마가 싫어하는 사람을 닮는 다는 말이 있다. 그래서 그런가 난 아빠를 많이 닮았을까. 차가운 눈빛, 고집있어 보이는 얼굴 형, 넓은 이마. 첫번째 육신이 주어졌을때 버텨볼걸 지금보다 나은 껍데기일 수 있었는데. 아깝다.

나의 하드웨어는 이럴지 몰라도 소프트웨어는 엄마를 꼭 닮았다. 감성에 젖어 내리는 비를 보며 글을 쓰고 사소한 선율에도 감동을 느낀다. 나의 좋은사람은 못돼도 나쁜사람은 되지 말자는 모토도 “남의 눈에 눈물 흘릴일 만들면 나는 피눈물 흘리게 되는거야" 라는 울어매 어록에서 나온 것이다. 엄마는 내게 “엄마처럼 손해보지말고 너 하고싶은대로 하고 살아" 란 말을 종종하시는데 나는 결국 엄마 딸이라 잠깐의 친절에 또 손해보는 길을 자처한다.


이런 엄마와 달리 아빠는 세상에서 본인이 제일 소중했다. 본인의 위치 사람들에게 자신이 어떻게 보이는지가 제일 중요한 사람이었다. 20대부터 친구들 사이에서 우두머리 역할을 해왔고 그런 성향은 가정으로까지 이어졌다. 엄마는 아빠와 결혼생활을 하는동안 친구들을 만날 수 도 없었고 치마 한번 입을 수 없었다. 가게로 가계를 유지하는 것은 엄마의 업무였고, 영업시간 중간중간 아빠의 끼니를 챙기는 것 또한 당연했다. 나는 사실 아빠가 설거지 하는 방법을 모르는 사람인줄 알았다. 하루 세시간동안 입은 운동복을 빠는 법을 모르는 사람이라 엄마가 대신 해줘야 한다고 생각했었다. 


아빠는 나를 제 2의 식모로 키울 생각이었던것같다. 그렇지 않고서야 아빠의 방을 정리하지 않았다고 고주망태가 되어서 아침이 될때까지 주정을 부릴리가 없다. 어느날은 새벽 네시가 되어서야 들어와 자고 있는 엄마의 머리를 발로 툭툭치며 술상을 차리라고 했다. 너무 화가나서 아빠에게 대들려는 나를 엄마는 내 팔뚝을 꽉 잡아 제지했다. 억울하고 또 억울했다.

시간을 더 돌려 아마 9살때였나 오늘의 숙제가 뭐냐는 아빠에게 수학익힘책의 쌓기나무가 숙제라고 대답했다.

아빠는 “그렇게 쉬운 부분을 선생님이 숙제를 내줬을 리가 없다”라는 말과 함께 친구한테 전화를 해서 확인해보라고 했다. 친구의 대답은 그 다음 단원인 ‘곱셈’이라고 했다. 얼마나 당황스럽고 무서웠는지 아직도 그때의 나를 생각하면 괜찮다고 너의 잘못이 아니란 말을 하며 꽉 안아주고 싶다. 어찌됐든 난 거짓말쟁이가 되었고 아빠의 사랑의 매였던 두번 접힌 하얀 세탁소 옷걸이는 내 종아리의 피로 빨갛게 물들었다.

10시간넘게 가정을 지키기 위해 일하고 온 우리 엄마는 그 밤에 얼마나 많은 눈물을 흘렸을까.

다음날 학교에 갔더니 사실 숙제는 ‘쌓기나무’ 파트가 맞았고 나는 엄마에게 콜렉트콜로 전화를 했다.

“엄마 사실은 쌓기나무가 숙제였다고 꼭 아빠한테 전해줘"

아빠가 이 사실을 알면 미안하다고 해주겠지 라는 마음으로 쉬는시간 종이 치자마자 엄마한테 전화를 했다.

하지만 “아빠가 속으론 엄청 미안해 하고 계셔, 엄마한테 미안하다고 전해달라고 하셨어" 라고 엄마에게 대신 전해 들은 사과가 전부였다. 엄마한테 나의 억울함을 전달했으니 사과도 엄마가 아빠대신 해주는게 맞았던걸까.



아빠는 종종 엄마한테 무식해서 아무것도 모른다는 식으로 이야기하며 너희 부모는 너를 왜 그렇게 키운거냐고 아무렇지 않게 뱉어냈다. 억울했다. 엄마가 아빠에게 아무말도 하지 못하는게 억울했다. 이런 가정을 죽어라 지키려하는 엄마가 밉기도 했다. 우리 집은 17층 이었는데 가끔은 떨어져 죽어버리고 싶다는 생각을 하며 창밖을 바라봤었던 것 같다.

난 언제나 아빠한테 혼날까봐 전전긍긍하고 나의 작은 실수도 아빠의 눈에 어긋날까봐 너무 무서웠다. 그렇게 난 매일밤 불안했고 그 어느것 하나 내 마음대로 할 수 없었다. 잠을 자지 않고 있었다는 이유로 목을 졸려야 했으니까.

나는 성인이 되고싶었다. 초등학교 4학년 오후 3시 난 시계를 보며 이제 스무살 되기까지 9년만 참으면 된다고 시계를 보며 생각했었다.

우리엄마가 중요하다는 그놈의 ‘애비없는자식' 이라는 타이틀이 얼마나 중요한지는 모르겠지만 나의 경우엔 ‘애비있는자식’ 이었을때까 훨씬 힘들었고 자유롭지 못했다. 오랫동안 빌었던 소망은 현실이 된다는 말은 사실인듯하다. 나의 바램이 통한걸까 스무살이 되던 해에 우리는 네가족에서 세가족이 되었다.

우리의 마지막날 쓰러져 있던 엄마를 일으켜세워 짐을 쌌다. 그렇게 우리는 도망쳤다. 도어락 소리가 들릴까 건전지를 빼고 문을 열었고 엄마의 사무실로 향했다. 하지만 엄마는 그래도 아빠는 찾아올거라며 다시 집으로 발길을 돌렸다. 하지만 그 날 저녁의 아빠가 부순 식탁처럼 우리 가족도 부서지게 되었고 결국  다음날 오후 수원으로 가는 기차를 탈 수 밖에 없었다.

수원을 가는동안 아빠에게서 수십통의 전화가 왔다. 고민을 하다 받은 수많은 전화중 작은 기대를 걸고 마지못해 받았던 한통은 “너를 찢어 죽여버리겠다"라는 말로 간단히 끝나고 말았다.

왜인지는 모르게 하나도 무섭지 않았다. 이 사람은 절대 나를 찢어 죽이지 못하겠구나 라는 생각이 가득찼다. 아빠를 떠나는 지금 여태 내가 받았던 스트레스, 억울함 그 모든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감정이 해소되면서 일종의 카타르시스를 느낄 수 있었다.



그의 분노는 곧 나의 해방감이었다.

아빠는 사업을 정리하며 생긴 돈을 빚도 갚지 않은채 현금화 하여 떠났고, 살고있던 집 마저 손쓸 틈 없이 2일만에 급매를 했다. 한순간 우리를 안심하게 해줬던 모든 금전적인 장치가 사라지게 됐다. 어쩔 수 없이 작은 집으로 이사를 가야했지만 더 행복했다. 더 이상 아빠가 올까봐 두려워했던 엘리베이터 소리에 잠을 설치지 않아도 됐고 먹고싶은 음식을 내 맘대로 먹어도 괜찮았다. 주말엔 늦잠을 잘 수 도 있었고 그 중 베스트는 단연 티비시청. 티비를 끼고 살았던 아빠이기에 티비는 내게 금단의 물건이었다. 그렇기에 아빠와 살던 공간에선 아무것도 안하는 것이 티비를 보는 것 보다 안전한 처세술이었다.


그 수많은 밤을 싸워온 우리 엄마, 그녀는 더이상 울지 않았다. 자유를 맘껏 만끽할 수 있었다. 친구들의 삶이 만들어낸 공간에서 시간이 어떻게 가든 상관하지 않고 마음껏 행복할 수 있게 되었다.

고등학교때 영어 과외 선생님은 매일 내 이야기를 들어주셨다. 나는 그분에게 사실 영어보다는 더 넓은 세상을 배웠다. 여러가지를 배웠지만, 내면의 어린아이라는 존재를 알게된 것이 가장 큰 배움이었다고 말하고싶다. 선생님께서는 꽤 수다쟁이인 나의 이야기를 잘 들어 주시고 조언도 아끼지 않으셨다. 마음의 안식처랄까, 어떤 이야기든 선생님껜 꽤나 진솔하게 다 털어놨던 것 같다. 여느날과 마찬가지로 내가 얼마나 상처 받았는지 구구절절 설명하며 유치원에 다니던 어린날의 내가 썼던 시에 대해 선생님께 말씀드렸다.


7살 유치원에서 시쓰기 프로그램이 있었고 시를 썼어요. 어린 저는 시는 길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있었는지“엄마, 아빠 제발 싸우지말자” 라는 말로 종이의 여백을 채웠지요. 유치원 졸업식때 그 시가 실린 졸업 책자를 보고 너무 부끄러워서 당장 덮었습니다. 대체 나는 무슨생각으로 이런글을 썼을까 라는 생각도 들었고 엄마아빠가 부끄러울까 선생님께 정정요청도 했어요. 하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죠. 그렇게 부끄러운 시를 묻어두고 초등학생이 되었을때 다시 꺼내봤어요. 여전히 ‘무슨 생각이었을까?’ 라는 의문이 들었습니다.


나의 이야기를 묵묵히 들어주던 선생님이 말씀하셨다. 너의 내면의 어린 아이를 달래주어야 한다고, 아직도 그 아이는 아픈 그 상태로 남아있고 앞으로 무너지지 않고 살아가기 위해서 7살의 조은새를 있는 힘껏 달래주고 실컷 어루만져주라고.

그때부터 나는 정확하게 나의 과거의 나에게 눈을 맞췄다. 힘든것도 인정하고 슬픈것도 인정하며 나를 보듬어 주었다. 그리고 일어나기로 했다. 그 자리에서 슬픔에 무너져 있기엔 난 너무 젊기에. 결국 따지고보면 더 잘 살고, 행복하고 싶었던게 나의 본심이었다. 나의 슬픔을 인정하고 앞으로의 나를 그려보니 다가올 날들이 더 멋질 것 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나는 내가 되었다.

부끄러울 수 있는 나의 가정환경을 전혀 부끄럽다고 생각하지 않게 됐다. 사람마다 다른 방식으로 살아가듯 나의 유년시절이 남들과 약간의 차이가 있을 뿐 이라 생각한다. 덕분에 나의 사랑하는 사람들이 불행이라고 생각하는 것들에 대해 너의 잘못이 아니라고 감싸 줄 수있는 아량도 생겼다.


난 노력하여 결국 내 선택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모두에게 보여주고싶다. 내가 선택한 인생이 다를 순 있지만 틀리지 않았고, 나의 도덕은 입맛대로 선택되어지지 않았단 것을 세상에 꼭 보여주고 말 것이다. 덧붙여, 결손가정 아이의 결손은 당연하지 않다는 것도 증명할 것 이다.

옛 말중 "사연없는 가정이 어디 있느냐"라는 말이 있다. 내가 하고싶은 말은, 지금 앉아있는 카페 모든 사람들이 정상적인 가정에서 상처하나 없이 자랐다면 대한민국이 아니라 대토피아가 되었을 것이란거다. 모두가 본인들 만의 상처를 가지고 있고 그렇다면 누가 더 상처를 받았는가에 대해 손가락질 할 자격이 없다는 것이다. 어떤이는 “그정도 힘든건 힘든것도 아니다" 라는 말로 한 사람과 삶을 아무것도 아닌 것 처럼 치부해 버리며 본인의 이야기를 장황하게 늘어놓기도 한다. 고통을 수치화 할 수 있다면 일부 사실이 될 수 도 있으리라. 하지만 우리는 알아야할 것이 있다. 모든 사람들의 외모가 다른 것 처럼 고통을 받아들일 수 있는 그릇도 다 다르단 것.문제에 대한 경중은 타인의 기준이 아니라 본인이 결정해야할 부분이란 것.

즉 나에대한 판단은 내 스스로만이 할 수 있으며 세상 누구의 말도 신경쓰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다. 나의 고통은 스스로만이 알 수 있다. 나를 미친듯이 사랑하는 누군가 대신 아파주고 싶다고해도 대신할 수 있는게 아니다. 그러니 가벼운 입술로 떠드는 몇마디 말에, 나의 삶을 책임져주지 않을 사람들의 말에 가슴아파 하지 않았으면 한다. 그저 나대로 내가 살아온대로 당당했으면 한다. 나도 여러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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