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때 우리 집은 매우 가난했다.
아버지는 전셋집 정도는 얻을 수 있다고 말하고 어머니와 결혼했지만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겨우 월세 낼 정도의 돈 밖에는 없었다.
지금의 관점으로 보면 혼인을 빙자한 사기였지만
그 시절 그런 일은 허다했다.
돈이 없으니 몸이 고되었다.
어머니는 서울에서 양장 기술을 배운 덕에 양복점을 차렸다.
양복점을 차릴 때 친척들 도움을 많이 받은 두 분은 쉬지 않고 일하셨다.
하지만 월세를 살던 집주인들은 해가 바뀔 때마다
더 많은 월세를 요구했고 부모님은 이사를 밥 먹듯 다닐 수밖에 없었다.
아버지가 술 드시고 하는 말씀 중에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게 그때 그 시절이었다.
내가 태어 난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집주인이 오더니~
“어이 감씨! 다음 달부터 월세 좀 올려야겠어~”
“지금 아이가 태어 난지가 얼마 안 돼서 그러는 데 며칠만 말미를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그거야 당신 사정이지!! 못 올려 주겠으면 나가요!”
삼류 드라마에서 나오는 이야기처럼 그 시절 집주인의 갑질은 하늘을 찔렀다.
‘나는 나중에 집주인이 되면 절대 세입자한테 이렇게 대하지 않으리라~’
그때 아버지가 다짐을 하셨다고 한다..
다짐은 다짐이고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가는 날 눈까지 펑펑 왔다~
유난히 추운 겨울.
100일도 안 된 핏덩이를 안고 다른 곳으로 이사하는 부모님의 모습이
주변 동네 사람들의 마음을 안타깝게 했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지만 아버지가 집주인을 때려죽이고 싶었다고...
양복점만으로는 도저히 안되겠는지 아버지는 중견 제조업체에 취직을 하셨다.
어머니도 양복만으로는 수지 타산이 맞지 않자 기업체에 들어가는 단체복을 맡아서 하셨다.
아버지는 재단 기술을 배워서 낮에는 회사에서 일하시고
밤에는 양복점에서 밤늦도록 어머니를 도와 일하셨다.
처음 들어가 보는 직장에 적응도 힘들었을 텐데
새벽까지 일을 하니 몹시 고되실게 뻔하였다.
아버지 코에서 코피가 밥 먹듯 쏟아졌다.
유일한 위안은 반주와 곁들인 막걸리 한 잔이었다.
무일푼으로 맨땅에 헤딩을 하는 처지에 어쩌랴 몸이 매우 고달플 수밖에~
새벽 1시, 2시 일하시던 부모님은 서로에게 말씀하셨다.
“여보 내일 출근인데 먼저 자요~”
“같이 자야지. 그럼 3시까지만 같이 하고 마무리 지읍시다~”
아버지는 다시 돌아가도 도저히 할 수 없을 만큼의 초인적인 힘이었다고 말씀하셨다.
대단한 두 분의 열정에 하늘도 감동을 했는지
우리의 형편은 조금씩 아주 조금씩 나아지기 시작했다.
친척들한테 빌린 돈도 이자까지 쳐서 다 갚았다.
어머니는 없이 살아도 주변 이웃에 대한 배려와 정은 남달랐다.
집 근처에 있는 고아원 관계자와도 친분이 두터우셨다.
하지만 그러한 배려와 정이 꼭 좋은 것만은 아니었다.
어느 날 까무잡잡한 얼굴을 한 나보다 한두 살 형으로 보이는 아이가 우리 집에 앉아 있었다.
“자발아! 인사해 보승이 형이야~”
“안녕하세... 안녕 형아~”
어머니는 친하게 지내라고 하시며 같이 가서 과자를 사 먹으라고 동전도 쥐어주셨다.
보승이 형은 어머니 아버지가 없는 고아였다.
고아원에 맡겨진 지가 얼마 안 돼서 적응을 못하는 걸 보고
어머니께서 안쓰러웠는지 집으로 데리고 와 나하고 어울리게 한 것이었다.
보승이 형은 저녁 늦게까지 나와 함께 있다가 다시 고아원으로 돌아가서 잠을 잤다.
처음에는 마음을 열지 않고 말수도 적었던 형은 시간이 흐르자
한 식구처럼 잘 지내게 되었다.
동생만 있고 형이 없던 나도 왠지 듬직한 보승이 형이 맘에 들었다.
보승이 형과 나는 매일 붙어 다녔고 뭘 하던지 서로 즐거웠다.
그러던 어느 날 보승이 형은 보이지 않았다. 어디로 갔는지 아무도 몰랐다.
어머니에게 물었더니 어머니는 아무 말씀이 없으셨다.
상심한 얼굴로 자주 고아원 관계자분과 통화를 하실 뿐...
나중에 알고 보니 보승이 형이 우리 집 금고에 손을 댄 것이었다.
그렇게 부모님이 자식처럼 아끼고 보살펴 주었건만 결국 돌아온 것은 배신감이었다.
그 형은 우리의 사랑을 뒤로하고 단체복으로 번 돈을 모조리 들고 튀었던 것이다.
정말 정말 어이가 없었다.
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