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호박 스프]
내가 피자를 처음 먹은 게 열한 살 때였으니까 그보다 한참 전부터 즐기던 오뚜기 스프가 내 인생 최초의 양식이라면 양식일 것이다.
초등학교에 입학하자 내 일상이 전과는 확연히 달라져 있었다. 유치원 다닐 때는 창 밖이 붉어질 즈음에까지 신나게 놀다가 버스 타고 집으로 가는 게 다였는데, 학교를 다니게 된 후부터 그 먼데를 혼자 다니게 됐으며, (버스로 두 전거장 정도 되는데 어지간하면 걸어 다녔다) 가만히 앉아 지루한 수업을 견뎌야 했고, 유치원 다니는 동생, 픽업까지 맡게 된 것이다. 나는 어른스러워진 듯하면서 한편으로는, 자발적으로 슨 일을 벌이지 않으면 재밌는 일은 좀처럼 일어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어렴풋, 알게 되기도 했다.
학교 마치고 적당히 빈둥 거리다 오후 네 시 즈음 동생을 데리러 갔다가 돌아오는 길, 종종 작은 구멍가게를 들렀다. 늘 불량식품이라 불리는 간식을 사 먹다 어느 날 별안간 오뚜기 스프 한 봉지를 집어 들었다. 이유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엄마가 만드는 모습을 보면서 저 정도면 나도 할 수 있겠다, 싶은 생각이 들었던 것 아닐까, 싶다.
엄마는 우리에게 배 고프면 밥솥에 밥이랑 반찬을 꺼내 먹으라 했지만 어린애들 둘이서 매번 밥 차려 먹는다는 게 생각처럼 쉬운 일은 아녔다. 이것저것 꺼내 놓고서 다 먹은 후 치우는 것도 번거로운 데다가, 그만한 수고를 들일 정도로 반찬이라는 게 아이들 입맛에 맞을 리 없었다. 아무튼 평소에 엄마가 절대 가스불 키지 말라고 신신당부하기는 했지만, 어쩐지 내 힘으로 근사한 특식을 만들어 볼 생각에 한껏 들떠있었다.
가스레인지 냄비를 올려놓은 후 그 안에 스프 가루와 물을 부었다. 힘주어 가스레인지 레버를 돌리자 따다다, 소리와 함께 푸른 불빛이 원을 그리며 번졌다. 한참 내가 좋아하는 만화영화가 하던 시간 때였으므로, 나는 고개를 돌려 티브이에 시선을 고정한 채 스프를 저었다. (가스레인지가 높아 무언가 밟고 올라갔던 게 기억이 난다) 오뚜기 스프에 계량에 대한 안내가 분명히 있었을 테지만, 당시 어린 내가 그것을 사려 깊게 들여다볼 리 없었다. 그저 좀 되직하면 물 더 붓고, 묽으면 세월아 네월아 저었다. 적당히 먹을만한 게 걸쭉해지면 완성이었다.
나는 까치발을 든 채 찬장을 열어 적당한 그릇을 찾았다. 평범한 밥공기에다 담기보다는 그럴싸해 보이는 접시에 담고 싶었을 것이다. 찬장의 맨 위칸, 잘 안 쓰는 (그 말인즉슨 엄마가 아끼는) 접시가 눈에 들었다. 손을 뻗어 접시를 집기는 했는데 꺼내다 그만 땅에다 떨구고 말았다. 와장창, 소리와 함께 접시는 산산조각 났다. 그것도 두 장이나.
나보다 동생이 더 놀라 엉엉, 울었다. 나는 학교에 다니는 언니인 데다 사고를 친 당사자였기 때문에 넋 놓고 울고만 있을 수 없었다. 일단 깨진 접시를 치웠다. 아니나 다를까, 날카로운 조각을 집다가 손가락이 베 피가 났다. 피를 보니까 눈물이 나려 했지만 참았다. 아무튼 울고 있을 여유가 없었다. 접시를 깬 것도 문제였지만 가스불 켜지 말라는 당부를 어긴 거까지 탄로 날 게 뻔했기 때문이었다.
시계를 보니 곧 엄마가 돌아올 시간. 우선, 스프를 먹었다. 엄마한테 혼날 게 걱정 돼 목구멍으로 잘 넘어가지 않았다. 다 먹고 난 후 나는 동생에게 손 들고 벌서고 있자고 했다. 그러면 엄마가 마음이 약해져 크게 혼내진 않을 거 같았다. 사실상 동생은 아무 잘못이 없는데 내 말을 순순히 따라 주었다. 우리는 벽에 바짝 붙어 두 팔을 번쩍 들었다. 티브이에서는 좋아하는 만화영화 두 편이 다 끝나고, 6시 내 고향이 방영되고 있었다.
이제 태어난 지 10년도 채 안 된, 딱히 고향을 떠나 본 적도 없는 우리에게는 아무 감흥도 주지 않는, 그 프로그램에 멀뚱히 시선을 고정한 채, 그렇게 한참을 셀프로 벌을 받았다. 감시하는 사람도 한 명 없는데 몰래 한쪽 팔을 내려 쉬기도 하면서.
어두워진 후 엄마가 왔다. 손을 번쩍 들고서 제대로 벌서는 모습을 보여줬어야 했는데 도무지 팔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나는 겨우 항복 자세를 유지한 채 자초지종을 설명하면서 호들갑 떨었다. 그런데 어째서인지 엄마는 별 반응이 없었다. 그저 말없이 걸레로 바닥을 몇 번이나 훔칠 뿐이었다. 어쩌면 그날, 엄마는 무척 피곤했나 보다. 아니면 안 좋은 일이 있었던 걸까. 그 사정을 알 수 없으나 어쨌든 나는 그제야 안심이 되었다. 접시를 깬 것도, 가스불 켜 스프를 만들어 먹은 것도, 무사히 넘어갔으니까. 그런데 어쩐지 마음은 개운해지지 않았다.
사실 나는 어린 시절에 대한 기억이 많지 않다. 그런데도 이 별 거 아닌 일화가 이토록 선명하게 기억나는 이유는 다 오뚜기 스프 때문일 거다. 갓 태어난 병아리처럼 밝은 노란빛을 띤, 부들부들, 고소한 스프의 맛. 나의 첫 요리, 그리고 나의 첫 양식.
그날 이후 나는 자주 스프를 만들어먹었다. 크림스프, 양송이스프, 쇠고기스프, 번갈아가며.
이제 나는 스프 가루가 없어도 몇 가지 재료만 있으면, 스프 한 그릇 정도는 금방 만든다. 그중 좀 뻔하긴 하지만 단호박 스프를 제일 좋아한다. 만들기도 간단. 양파와 단호박 조각을 볶다가, 우유 붓고 푹 익힌 다음, 믹서기에 갈면 끝이다. 만들다 보면 이보다 더 간단하면서 근사한 음식이 또 있을까, 싶을 정도다. 그렇다 보니 인스턴트 스프와 멀어졌는지 모르고.
그러나 한 번씩 생각이 난다. 어릴 때 만들어 먹었던 그 스프가. 도대체 무슨 생각이었나 모르겠는데 밥을 말아먹기도 했다. 거기다 밀가루가 잘 풀리지 않아 덩어리가 그대로 씹히는 것 또한 다반사. 그럼에도 인스턴트 스프라는 나에게 참 특별하지 않을 수 없다. 어린 시절, 적적한 저녁 시간을 부드럽게 만져 준, 늘 엄마가 고팠던 우리들에게 그야말로 따뜻한 포옹 같은 음식이었으니까.
단호박 스프 간단 레시피
① 단호박을 통째로 전자레인지에다 5분 돌린다.
② 단호박 씨와 껍질을 제거한 후 살만 바른다.
③ 채 썬 양파를 버터에 충분히 볶다가 ②를 더 해 좀 더 볶는다.
④ 재료가 자박자박 잠길 정도로 우유를 부어 끓인다.
⑤ 한 김 식힌 후 믹서기에 간다.
(너무 되면 우유나 물 조금씩 더하며 더 끓이고, 묽으면 좀 더 조린다)
tip
초당 옥수수, 감자 스프도 같은 방식으로 간단하게 만들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