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를 만날때마다 숨기는게 많아져.
우리 부모님은 다른 친구들 부모님과 많이 다르다.
미혼의 친구들 얘기를 들어보면 30대 중반부터는 부모님이 안절부절 못하시며 누구 만나는 사람 없냐, 엄마가 선자리를 알아봐야 하느냐, 시집 언제가고 애는 언제 낳을래, 엄마아빠도 손주 보고싶다며 걱정이 태산같다고들 한다.
우리 부모님은 이미 내가 30대 초반일때부터
네가 돈 잘 벌고 능력이 있는데 결혼해서 뭐하냐 고생만 하지, 혼자 쓸 돈 혼자 벌어서 너 하고싶은거 다하고 살아라, 주의셨다.
많은 연애를 하면서도 특별히 결혼 생각이 없었고, 아직까지 이렇다 할 고생한번 하지 않을 수 있었던 건 대개 부모님 덕분이었다.
그래도 내 나이 40이 되고 나니, 이제 아버지도 주변에 어느집 딸의 결혼소식이 들리면
"너는 만나는 사람 없는거냐?" "에휴 너랑 너희 언니도 결혼하면 그것도 참 좋을텐데"
라고 말씀하실때가 간혹 있긴 했다.
그래서 이 연애를 시작할때 부모님 생각을 어쩌면 덜했는지 모른다.
엄마는 무조건 "너를 제일 행복하게 해줄 남자를 만나."라고 말할거라 생각했다.
아빠는 이제 내 나이가 이렇게 많이 든걸 자각하셨으니 내가 어떤 결혼을 한다해도 못이기는척 져주실거야.
그렇게 생각했었다.
너무 쉽게 생각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엄마에게는 지금 연애중이라는 사실을 밝혓지만 상대가 누구인지 어떤 상태인지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다. 언젠가 각잡고 말을 해야지, 라고 생각하면서
내가 행복할 수 있는 선택을 하는 걸 엄마는 무조건 지지해줄거라고 맘놓고 있었다.
어버이날을 맞아 오늘 부모님댁을 방문하고 왔다.
나는 언니랑 둘이 15년 넘게 같이 살고 있는데 종종 언니와 크고작은 다툼으로 몇주건 몇달이건 대화를 하지 않을때가 있다.
최근이 바로 그 시기인지라, 언니 없이 나혼자 단독 방문한 걸 보고 엄마는 또 크게 한숨을 쉬며
너희 둘이 싸우는 게 제일 속상하고 걱정거리라며
나에게 남자친구랑 얼른 결혼해서 언니와 따로 사는건 어떠냐고 물어보셨다.
"남자친구랑 연애한지도 꽤 됐는데 결혼하잔 말도 안해?
집에 소개도 아직 안시켜줬고?
왜 엄마한테 자세하게 얘길 안해줘. 뭐하는 사람인지도 얘기 안해주고.
어찌됐든 무조건 능력있는 사람이어야 돼."
대답할말이 마땅치 않았다.
"내 남자친구는 초3짜리 딸애가 있는 돌싱남이야"
라고 말할수는 영원히 없겠구나, 라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다.
세상에서 내가 제일 잘난걸로 알고 있는 엄마와 아빠와의 대화가 거듭될수록
내 마음은 너무나 무거워만 갔다.
아 내가 너무 간단하게만 생각했구나.
"네가 행복한거라면 다 하고 살아라, 한번뿐인 인생인데" 라고 엄마아빠가 말해줄 것을
마치 동화 속 한장면을 그리듯 그려왔는데
그게 아니었다.
엄마와 아빠를 자주 뵙지 못하기에, 평상시에 잘 느끼지 못했을 뿐,
부모님이 가진 나에 대한 기대와 자부심은, 내 남자친구의 현 상태를 알게되는 순간
"말도 안되는 소리, 당장 끝내라. 네가 뭐가 아쉬워서. 그냥 차라리 평생 혼자 사는게 나아."
와 같은 말이 나올수밖에 없는 정도의 것이었다.
이 편이 더 현실적인 시나리오인것 같다.
"서희는 엄마아빠 속한번 안썩이고 혼자 컸지, 혼자 컸어"
라고 말하던 아빠에게
나이 마흔이 넘어서 그간 썩이지 않은 속을, 40배를 곱하여
한꺼번에 몰아친듯 드릴수 있는 그런 상황이 될 터였다.
오빠와 연애 한 뒤 오늘 처음으로 집에 오는길에,
"헤어지는게 맞을것 같아"
라는 생각을 해보았다.
여태까지 정말 천진난만하게 바로 앞만 바라보며 온것 같아.
내가 엄마아빠를 평생 힘들게 할 수는 없을텐데.
오빠와 결혼하게 된다면,
남의 아이를 키우는 나를 보는 부모님 속을
속속들이 긁어대면서 남은 생을 나만 행복하겠다고 그렇게 뛰어들 수 있을까.
그리고 그건, 과연 내가 행복하게 되는 길이 맞을까.
우리 부모님 속을 뒤집어 엎어가며 남의 아이와 같이 사는게.
가능하긴 한 일일까.
내년 1년간, 나는 미국으로 유학을 떠난다.
그 시기에 어떤 변화가 있을지 잘 모르겠다.
지금으로서는 오빠가 재희랑 같이 내가 있는 미국으로 여행을 올 계획은 하고 있다.
그래서 그 전에 재희를 만나봐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 중인데
모르겠다. 오늘은 다 너무 자신이 없다.
좋아하고 사랑한다는 마음으로 정말 다 감당할 수 있을건지 자신이 없어진 날이다.
나에 대한 엄마아빠의 무한한 기대와 신뢰를 무겁게, 버겁게 느껴버린 날이다.
오빠 없이 살아갈 수 있을지 밤새 생각해야 하는 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