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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류이한 May 10. 2024

네? 그건 바람 아닌가요?

    누군가가 연애 경험을 물어오면 나는 단번에 초등학생 때를 떠올린다. 초등학교 1학년 때 3살 위인 오빠를 첫사랑한 이래로 나의 초등 시절은 빠짐없이 누군가를 좋아하는 마음으로 채워져있다. 머리에 피도 안 마른 꼬맹이 시절의 연애를 연애라고 할 수 있느냐고 누군가는 코웃음을 친다. 하지만 그 때의 나는 나름 충실하게 누군가를 좋아하고 끊임 없이 연애를 했다.

    암울했던 중학교 시절을 지나 고등학생이 되고, 누군가에게 '연애를 했다'고 인정 받을 수 있을만한 첫 연애를 했다. 당시의 연애 상대는 나의 중학교 동창이었고 서로 친구 이상 연인 미만 정도의 감정을 갖고 있었다. 겨울 방학 때 장난스럽게 건넨 문자, "우리 진짜 사귈래?ㅋㅋ"가 계기가 되어서 애매한 관계의 종지부를 찍었다. 다만 거짓말 같이 시작한 연애는 1년을 채우지 못한 채 거짓말 같이 끝났다. 

    갑자기 왜 이런 시시한 이야기를 했느냐? 두 개의 이야기에는 공통점이 있다. 바로 '연애 기간 동안 여러 명의 사람을 좋아했다'는 것이다. 초등학생 때 남자친구가 있음에도 그의 친구에게 마음이 끌렸고, 고등학생 때는 연애를 하면서 동급생이었던 다른 아이를 동시에 짝사랑했다. 심지어 고등학생 때는 연애 상대와의 문자를 마치고 밤 늦게까지 짝사랑 상대와 길고 긴 문자 릴레이를 주고 받으며 가슴 설레기도 했다. 

    이쯤에서 나올만한 반응. '네? 그건 바람 아닌가요?' '완전 쓰레기 같네요'. 유감스럽게 당시 내가 가졌던 감정도 비슷한 것이었다. 죄책감, 혼란스러움, 자기 혐오. 나의 감정은 세간의 상식이라는 것에 완벽하게 반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당시의 감정이 어느 쪽이든 거짓이거나, 일시적인 감정이었냐고 묻는다면 그건 아니었다. 고등학생 때는 '네가 나랑 사귀는건지 쟤랑 사귀는 건지 모르겠다'는 뾰족하고도 정당한 연인의 지적을 받았을 정도였다. 오죽하면 일기에 '나는 너도 좋고, 쟤도 좋은데 대체 어떡하란 말이야!'라는 괴로움 섞인 글을 썼겠는가. 내 마음도 컴퓨터처럼 '전원 끄기' 버튼을 누를 수 있으면 좋으련만. 그럴 수 없었기에 괴로움은 커져가기만 했다.

    

    그렇게 꽤 오랜 기간 동안 나는 혼자만의 지난한 싸움을 했다. 몇 명의 사람을 똑같이 사랑하더라도, 한 사람과의 연애 중에 다른 사람에게 관심이 가더라도 속으로 삭여야만 했다. 한 사람에 대한 충실한 사랑을 배반하는 것은 용납 받을 수 없었다. 나는 그렇게 나의 본심을 가면 속에 숨겼다.

    그런 내가 정체성을 깨닫게 되는 과정은 매우 독특했다. 20대 중반 당시 나는 SNS에 빠져 있었는데, 지인의 SNS 팔로워 목록에서 초등학교 동창생의 이름을 발견했다. 흔한 이름이어서 처음에는 긴가민가했지만 프로필 사진을 보니 조금 빛바랜 그 아이 얼굴이 거기에 있었다. 반가운 마음에 동창에게 DM을 보냈고, 곧 그 가 나의 초등학교 동창이었던 것이 확실해졌다. 그리고 동창과의 만남은 속전속결로 진행되었다.

    12년만의 만남이었다. 약속 장소에서 우리는 서로를 단번에 알아볼 수 있었다. 한동안 초등학생 시절의 추억에 대해 시시껄렁한 이야기를 주고 받았다. 동창은 자신의 정체성을 숨기지 않고 드러내는 사람이었고, 자신이 '폴리아모리'로 정체화했다는 이야기를 해주었다. 무지했던 내가 조금 무례하게 폴리아모리에 대해 질문했고, 동창은 덤덤하게 폴리아모리에 대해 설명했다.

    그리고 그에게 폴리아모리에 대한 설명을 들었을 때, 온갖 이물질이 진득하게 달라 붙어있는 수챗구멍이 한 번에 뻥하고 뚫리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일생동안 내가 느꼈던 석연치 않음이 단어 하나로 말끔하게 정리되었다. 내가 내 몸에 대해 느꼈던 불편함과 어색함이, '젠더퀴어'로 정체화하며 편안함으로 바뀌었던 것처럼. 사랑하는 사람이 있는데도 누군가의 속삭임과 팔짱에 가슴이 뛰고, 한 번에 두 세명의 사람을 사랑하며 잠 못 이뤘던 수많은 날들이 구원받는 기분이었다. 내가 잘못된게 아니었다니. 내 마음이, 내 사랑이 불완전한 게 아니었다니. 그 후 수많은 날을 거쳐 나는 나의 마음을 곱씹었다. 그리고 주변의 소중한 사람을 만날 때마다 벅차고 떨리는 마음으로 내가 폴리아모리임을 고백했다.


    그 후로 다자 연애를 하거나, 이 사람 저 사람과 사랑을 했느냐고 하면 그건 아니다. 당시에도 나는 연인이 있었고 지금은 그 연인과 결혼을 한 상태다. 하지만 나의 상태가 변했다고 해서 내가 변한 것은 아니다. 나는 여전히 새로운 사랑의 가능성에 오픈 마인드다. 내가 나임을 끊임 없이 의심했던 지난 날은 깨끗하게 흘려보냈다. 누군가 지금 나에게 '당신의 사랑은 그냥 바람 아닌가요?'라고 묻는다면 지체 없이 '제 사랑은 언제나 진심입니다!'라고 대답해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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