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 건 교사답지 않다'고 말하는 사람들에게
나는 꿈이 많은 아이였다. 초등학교 6년을 거치며 나의 꿈은 셀 수도 없이 바뀌었다. 가수, 수의사, 작가, 성우, 배우.... 그리고 그 중에는 교사도 있었다. 당시 교사가 되고 싶었던 이유는 단순했다. 일기장 아래에 코멘트를 써준다든가 시험지를 채점한다든가 하는, 선생님이 하는 일이 재밌어보여서였다. 다만 다른 꿈이 그러하듯, 교사의 꿈도 한 순간의 변덕으로 사라졌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나는 가난한 집에서 태어난 장녀였다. 고등학교 3학년, 본격적으로 진로를 정해야 할 때가 되었다. 나의 오랜 꿈은 성우였지만, 부모는 성우라는 직업이 불안정하다며 은근히 다른 직업을 권했다. 아래엔 아직 어린 동생들이 있었다. 사회와 가정의 거대한 가스라이팅 속에서 나는 도대체 어떤 학과를 가야할지, 어떤 직업을 선택해야할지 갈팡질팡했다.
그런 내가 희망 학과에 '교육학과'를 쓰게 된 것은 참 건방진 생각 때문이었다. 고 3, 담임교사와 진로 상담을 할 때였다. 수시 원서를 쓸 때였지만 여전히 진로에 대해 전혀 갈피를 못 잡는 친구들이 있었는데, 교사들은 상위권 학생을 명문대에 보내는 것에만 관심 있어 보였다. 그리고 어린 나는 선생님이 '교사답지 못하다'고 느꼈다. 그 때 생각했다.
'저런 사람도 교사를 하는데, 나라고 못 하겠어? 난 이름만 교사가 아니라, 학생 한 명 한 명을 세심하게 보듬어주는 교사가 될거야.'
무엇보다 교사는 안정적이고, (당시만 해도) 사회적으로도 존경 받는 꽤 괜찮은 직업이었다. 사범대와 교대의 학비는 국립대 인문학과의 절반 수준이었다. 나는 진로 희망란에 다시 '교사'를 썼다.
갓 임용고시에 합격한 2019년 초, 서울의 한 초등학교에서 기간제 교사로 근무하게 되었다. 피아제니 비고츠키니 하는 교육학자의 이름도 머리에서 빠지지 않은, 그야말로 풋내기였다. 풋내기 교사였던 나는 '참교사'였다. 아이들에게 한 번도 화를 내지 않았고, 교사가 학생에게 큰 소리를 내는 것은 그야말로 '교사답지 않은 언행'이 아닌가 생각했다. 복도에서 내가 가르치는 학년의 담임선생님을 마주치면 '왜 담임선생님들은 항상 아이들을 무표정으로 대할까? 조금 더 친절하게 대해주지.'라고 생각했다. 아이들이 힘들까봐 심부름도 시키지 않았고, 힘든 일도 전혀 내색하지 않았다. 항상 긍정적인 말과 행동을 하는 것이 교사의 덕목이라고 여기며 교실의 꽃처럼 웃음을 잃지 않았다.
나의 '참교사 마인드'는 9월에 신규 발령을 받은 후 무참히 깨졌다. 나는 학군이 좋지 않은 학교의 5학년 담임을 맡게 되었다. 담임을 처음 맡는 것도 모자라 내가 맡게 된 학년은 학교에서도 유명한 학년이었다. 물론 그 때는 아무 생각도 없었다.
'전담이나 담임이나 애들 대하는 것 똑같지. 그냥 좋은 말 해주고 상냥하게 대해주자.'
여전히 머릿 속에 꽃밭을 장착한 채로 학생들을 대했다. 아이들에게 꼬박꼬박 존댓말을 쓰고, 혼낼 때도 절대 큰 소리는 내지 않고, 잘못한 행동을 했을 때 좋은 말로 알려주고, 분기마다 선물도 듬뿍듬뿍 주었다.
누가 봐도 참교사의 모습 아닌가? 그런데 결과는 참담했다. 처음 몇 주간 내 눈치를 보던 학생들은 내가 1학기 담임선생님과 다르게 문제가 되는 말과 행동을 해도 크게 혼내지 않자 마음대로 선을 넘기 시작했다. 교실 붕괴가 시작됐다. 수업 시간엔 몇 명의 학생들이 주도하여 나보다 목소리를 높였고, 수업 시간과 쉬는 시간을 지키지 않는 학생들이 부지기수였다. 교실을 바로 잡기 위해 조심스럽게 새로운 규칙을 제시해보기도 했다. 하지만 아이들은 '이전 담임 선생님은 안 그랬는데' '하기 싫어요' '안 하면 안 돼요?' 같은 말로 강하게 반발했다.
와중에 우리 반에는 경계선 지능 학생 A가 있었다. A의 1-4학년 담임교사가 보호자에게 검사를 권유했으나 보호자는 '우리 애한테 문제가 있다는거냐'며 오히려 화를 냈다. A는 5학년임에도 1-2학년 수준의 행동을 해서 친구들의 미움을 샀다. 다른 아이들이 유독 A를 피하고 괴롭히는 게 느껴져 안쓰러웠던 나는 A에게 더 상냥하게 대하려고 애썼다. 아이들은 '선생님이 A만 예뻐하고 우리만 혼낸다'며 더욱 날뛰기 시작했다. A의 보호자 역시 나에게 고맙다는 말은커녕 수업 시간이고 주말이고 상관 없이 나에게 불만을 쏟아냈다. 심지어 어떤 일은 학생들끼리 잘 화해하고 끝냈는데도 A가 집에 와서 억울하다고 울었다며 '우리 애는 잘못한게 없는데 왜 사과를 시키는거냐'며 화를 냈다.
9월부터 다음 해 1월까지, 고작 5개월 남짓의 시간을 겪으며 나의 몸과 마음은 폐허가 되었다. 그 많은 스트레스와 고통을 어떻게 풀어야할지 몰라 또 미련하게 속으로 삼켰다. '교사다움'에 대한 허상은 그 때 사라졌다. 도대체 무엇이 '교사다운 교사'라는 것인가?
SNS에서 교사 계정을 굴리다보면 시답잖은 일상 이야기에도 하나 하나 시비를 거는 사람들이 있다. 교사가 아동학대 고소의 부당함과 업무의 과중함에 대해 하소연하면 그들은 이렇게 반응한다.
'누가 교사 하라고 칼들고 협박한 것도 아닌데 왜 불평 불만하면서 계속 함? 그냥 때려치우세요'
'이런 말을 하는 인간이 교사라니 이런 교사한테 가르침 받는 애들이 불쌍하다'
교사의 말과 행동에 끊임 없이 제약을 거는 사람들을 보고 있으면 '저 인간들은 나를 사람이 아닌 NPC로 보는구나'라는 생각이 들어 착잡하다. 단편적인 말과 행동에 꼬투리를 잡으며 자신이 생각하는 교사다운 교사의 기준에 따라 험담하고 물어 뜯는 사람들. 그들은 일상 속에서 스쳐 지나가는 어린이에게 작은 친절을 베푼 것을 미담으로 떠벌리고 다닌다. 정작 하루동안 30개의 요구르트 뚜껑을 딴 교사의 SNS 말투를 검열하면서 말이다. 교사는 그냥 교사다. 아무 것도 아닌 당신이 '교사다움'을 이야기할 자격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