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먹고 글을 쓰기 시작했는데 어느새 점심시간이 되었다. 엉성한 글 몇 줄 쓰는데 세 시간이 훌쩍 지났다니. 시간이 달리는 속도처럼 글도 빠르게 달려나가면 얼마나 좋을까.
배꼽시계가 정확한 남편이 배고프다고 할 시간이 되었는데 아무 말 없다. 무슨 일인지 궁금한 마음이 들었지만, 모른 체하고 자판을 조금 더 토닥거렸다.
벌컥! 서재에서 문 열리는 소리를 들린다. 밥 달라고 남편이 나오는 모양이다. 쓰던 글을 저장하고 밥을 차려야지 하는 마음으로 마우스에 손을 얹었다. 패드 위에서 마우스로 작은 원을 그려가며 저장 버튼 위에 커서를 올렸다. 집게손가락에 힘을 주고 살짝 누르니 딸깍 소리가 났다.
몇 초나 되었을까? 서재의 문 열리는 소리와 마우스에서 나는 딸깍 소리 사이의 간격이. 그 짧은 시간에 곁으로 다가온 남편이 곁에 바싹 서서 웃고 있다. 마누라가 글 쓸 때 가장 예쁘다면서. 아마도 글 쓸 때는 잔소리 하지 않으니 그러는가 보다.
“각시야, 점심 사 줄까?”
“웬 선심이야?”
고맙지 않냐는 눈초리로 남편이 배시시 웃는다. 글쓸 때 밥 차리는 일 귀찮아서 고맙기는 하지만 그게 뭐 그리 크게 고마워할 일인가 생각하며 못이기는 척하며 그이를 따라나섰다.
비가 부슬부슬 내려서 우산을 들고 나갔다. 골목길에 접어들자 저만치 활짝 핀 매화꽃이 보였다. 홍매화 꽃이었다. 나뭇가지에 대롱대롱 물방울까지 피었다. ‘꽃샘추위 잘 견뎌내야 할 텐데.’ 염려하는 마음으로 곰탕집에 들어섰다.
늦은 시간인데도 곰탕집에 나이 든 어르신들이 가게 안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역시 뜨끈한 국물 요리는 나이 든 사람들이 좋아하는 메뉴였다. 가게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서니 안내하는 젊은 아줌마가 우릴 향해 손을 까부른다.
“어르신들, 이쪽으로 오세요.”
그이도 나도 염색을 안해 흰머리가 수북하다 보니 순식간에 어르신의 대열에 끼어 버렸다. 그래도 그렇지 이렇게 피부가 탱탱한데 어르신이라니. ‘그 아줌마 아무래도 안경을 써야겠는걸!' 남편이 나만 들을 정도로 나지막하게 말했다.
뽀얀 곰탕 국물에 따끈한 밥을 말아 훌훌 먹었다. 쫄깃하게 삶아진 수육이 오늘따라 유난히 부드러웠다. 새콤한 깍두기를 한 입 크게 베어 무는데 딸내미한테 전화가 들어온다. 왜 이리 점심이 늦었냐고 묻더니 퇴근하고 잠깐 집에 들르겠단다. 배가 두둑해져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마트에 들렀다.
마트에는 봄 채소가 가득했다. 두리번거리다가 봄동이랑 냉이를 집어 들었다. 봄을 재촉하는 입맛으로 봄동 김치, 냉잇국 따라갈 음식이 없다. '봄동 김치 버무리고 냉잇국 끓여서 딸이랑 같이 먹어야지' 생각하니 집으로 돌아가는 걸음이 빨라졌다. 배불러서 빨리 못 걷겠는데 왜 이리 걸음이 빨라지냐며 남편이 툴툴거렸다.
집에 오자마자 납작하게 퍼진 봄동 잎을 낱낱이 뜯어 소금에 살짝 절여두고 고추 양념을 만들었다. 마늘, 생강, 사과, 양파, 새우젓, 멸치 액젓, 매실청, 고춧가루를 적당히 넣고 다지기에 드르륵 갈았다. 시골집 부엌 앞에 서 있던 어머님의 확독이 생각났다. 내 부엌에는 없는 어머님의 확독이.
소금에 살짝 절어진 봄동을 벌건 양념장에 버무렸다. 봄동도 역시 빨간 립스틱을 바르니 화사해졌다. 간을 보느라 한 입 먹어보니 싱겁다. 액젓 한 수저 넣고 조물거리니 간이 맞는다. 싱거우면 소금을 넣으면 되고 짜면 물을 넣으면 되는 방식이 내가 하는 요리법이다. 간 맞추는 것, 어렵지 않다. 세상 편한 것이 음식 간 맞추기다. 사람 사는 일도 음식 간 맞추듯 쉬우면 좋으련만.
봄동 김치의 짝이 되어줄 묵은지 냉잇국을 끓이기 위해 냉이를 솔로 깨끗이 씻었다. 우리 집 부엌에도 봄이 피어나고 있었다. 딸 덕분이다. 냉이를 씻어서 송송 썰었다. 냄비에 냉이를 넣고 시큼한 묵은지 반쪽을 가위로 싹둑싹둑 잘라 넣었다. 코인 육수 서너 알도 툼벙 넣고 된장도 한 수저 넣고 끓였다. 냉잇국이 뿌연 연기를 내며 설설 끓으니 엄마의 부뚜막이 생각났다. 내 부엌엔 없는 엄마의 부뚜막이.
초봄의 입맛을 살려주는 봄동에는 베타카로틴 및 여러 비타민과 미네랄들이 풍부하게 들어있단다. 봄 내음 가득한 냉이에는 단백질과 각종 비타민, 무기질이 많이 들어있다고 한다. 그러니 남편도 딸내미도 나도 오늘 저녁 밥상에서 보약 한 첩씩 먹을 것 같다.
"띠띠띠띠띠딕~"
다섯 시 반이 조금 넘자 현관문 여는 소리가 나더니 문이 열린다.
“엄마!”
젖 달라고 우는 아기처럼 날 부르는 딸 목소리가 다급하다. 반가워서 그러는 것이겠지. 젖은 손을 앞치마에 닦으며 현관으로 달려 나갔다. 코를 벌름거리며 거실로 들어서던 딸이 묻는다.
"이게 무슨 냄새야?"
"무슨 냄새긴 묵은지 냉잇국 냄새지.“
”와~“
봄이면 시큼한 묵은지 썰어 넣고 향긋한 냉이와 함께 끓여 주시던 엄마의 냉잇국 냄새가, 오늘은 우리집 거실을 가득 메웠다. 훗날 딸내미도 봄에 냉잇국 끓여 먹으며 내가 끓여준 냉잇국을 떠 올리겠지.
딸이랑 셋이서 연두색 완두콩 넣은 밥이랑 봄동 김치, 냉잇국을 먹으니 퍼드득 날갯짓 하며 봄이 날아든다. 바깥은 아직 춥지만, 작가의 부엌에 포근한 봄이 찾아왔다. 나른한 기운이 완연해질 때 보다 올 듯 말 듯 할 때의 봄은 애틋해서 사랑스럽다. 아니, 꽃샘추위 이겨내는 봄 예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