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일단, 딱 천만 원을 모으세요.”
유튜브 화면 속 목소리가 그렇게 속삭였을 때, 심장은 알 수 없는 긴장감으로 두근거렸다. 천만 원이라니. 어디선가 ‘쨍’ 하고 조명이 켜지며 통장에 천만 원이 차곡차곡 쌓이는 상상이 펼쳐졌다. 통장 잔고 속 자잘한 숫자들이 허공에 흩날리며 ‘천만 원’이라는 성벽 앞에서 숨죽이고 내려앉는 모습이 떠올랐다. 순간 무릎을 ‘탁’ 치며 큰 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래, 나도 이제 내 힘으로 천만 원을 모아보리라.”
사실 나는 그때까지 단 한 번도 ‘얼마를 모아야지’라는 생각을 해본 적 없었다. 돈이 필요하면 남편에게 달라해서, 쓰면 그만이었다. 어느 날 자매들과 만나 얘기를 하다가 나만 통장에 뭉치돈이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언니도 동생도 한 푼 두 푼 아낀 돈으로 주머니가 두둑해져 있는데 말이다. 순간, 마음 한구석에 단단한 결심이 내려앉았다.
‘천만 원을 꼭 내 손에 쥐어야지.’
나이 들어갈수록 욕심이 생긴다더니 그래서 그런 지도 몰랐다. 아이들 둘 다 결혼시키고 난 후라 이제는 큰돈 들어갈 데 없고, 특별히 써야 할 목적 없었지만, 천만 원을 내 손에 쥐어 보고 싶었다.
주식 공부를 시작하면서 거대한 미로 속으로 들어온 기분이었다. 시가, 종가, 고가, 저가. 상한가, 하한가, 평단가. 물타기, 손절, 익절. PER, PBR, ETF… 말은 한국어인데, 쓰임은 도무지 외계어였다. 눈앞에서 번쩍이는 빨강과 파랑의 차트는 경고등 같았고, 머릿속은 마치 불량 TV처럼 잡음만 가득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알 수 없는 세계가 점점 나를 끌어당겼다. 초보자용 동영상을 틀고, 책을 뒤적이며, 마치 낯선 나라의 언어를 배우듯 단어들을 익혔다. 서당 개도 3년이면 풍월을 읊는다 했는데, 1년도 채 되지 않아 “PER은 주가수익비율이지”라고 중얼거리며 혼자 흐뭇해할 지경이 되었다. 그즈음, 유튜브 알고리즘이 내 앞에 던져준 영상의 제목은 바로 이랬다.
“백만 원으로 천만 원 만들기.”
그리고 또 하나.
“일단, 딱 천만 원을 모으세요.”
영상 속 목소리는 단호했다.
“백만 원으로 시작해 샀다 팔았다만 잘하면, 반드시 1년에 천만 원이 됩니다. 그리고 천만 원을 만들면, 오천만 원은 순식간입니다.”
‘순식간’이라는 말에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눈 깜짝할 새에 천만 원을 벌 수 있다는 말인가? 잠시 후 덧붙여진 설명, “순식간은 빠른 시일 내”라는 말이 나를 현실로 끌어내렸지만, 이미 내 머릿속에는 천만 원이 눈부시게 쌓여 있었다. 그날 저녁, 나는 선언했다.
“반드시 천만 원 모아볼 거야.”
남편은 어이없다는 듯 웃음을 터뜨렸다.
“당신이?”
반찬을 가지러 온 딸은 소파에 벌러덩 누워 배를 잡고 웃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K 아줌마가 드디어 돈독이 올랐나 봐.”
순간, 내 안의 무언가가 불꽃처럼 치솟았다.
‘두고 봐. 내가 꼭 천만 원 손에 쥐고 말 거야.’
반전은 뜻밖에 가까운 곳에 있었다. 백만 원 투자해서 한 푼 두 푼 작은 이익이 났다 사그라지기 시작하던 며칠 뒤, 나는 주식 용어 사전을 펼쳐놓고 씨름하다가 문득 남편을 향해 투덜거렸다.
“여보, 나 진짜 천만 원 필요해.”
“갑자기?”
“투자 공부 좀 해보게. 연습이라도 하려면 씨앗이 있어야 하잖아. 백만 원 가지고는 해 볼 수가 없어. 오늘 얼마 번 줄 알아? 꼴랑 2만 2천 원이야. 천만 원을 투자했다면 22만 원을 벌 수 있었는데, 이렇게 해서 언제 천만 원을 모으냐고.”
열심히 해보겠다는 투덜거림이 측은했는지, 가상했는지 그는 한숨을 쉬더니 휴대폰을 꺼냈다. 그리고 놀랍게도, 몇 분 뒤 내 통장에 숫자가 바뀌어 있었다. 잔고 10,000,000원.
숨이 멎는 줄 알았다. 그토록 멀게만 느껴지던 천만 원이, 이렇게 쉽게, 단숨에 내 손 안으로 들어오다니. 그 순간의 긴장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심장은 쿵쿵거렸고, 손끝은 덜덜 떨렸다. 기쁨이었을까, 두려움이었을까. 어쩌면 둘 다였다. 그렇게 바라던 천만 원은 사실 주식으로 모은 것이 아니라, 남편을 졸라서 얻는 순간에 완성되어 버렸다. 딸은 내 휴대폰을 힐끔 보고는 기겁하며 외쳤다.
“엄마, 진짜 들어왔어? 와... 세상에, 천만 원이 그냥 생기다니!”
남편은 시큰둥하게 말했다.
“이제부터는 당신 책임이야. 잃어도 나한테 뭐라 하지 마.”
천만 원.
꿈꾸면 이루어진다고 했던가. 하지만 나에게 그것은 단순한 돈이 아니라, 긴장과 반전의 드라마였다. 스스로 땀 흘려 모은 것도 아니고, 기적 같은 수익으로 얻은 것도 아니다. 그저 남편의 손끝에서 ‘이체’ 버튼이 눌러지는 순간, 모든 것이 바뀌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돈이 가벼운 건 아니다. 오히려 더 무겁다. 왜냐하면, 이제부터는 이 돈을 지키고, 불리고, 내 힘으로 살아 움직이게 만들어야 하기 때문이다. 통장을 바라보며 속삭였다.
“그래, 네가 내 첫 전투 자금이구나. 이제부터 진짜 게임 시작이야.”
통장에 천만 원이 들어오는 시간은 짧았지만, 그 뒤에 펼쳐질 길은 어쩌면 훨씬 더 길고 험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두렵지 않았다. 왜냐하면, 이미 긴장과 반전을 맛보았고, 그 뒤에 오는 설렘을 안아줄 준비가 되어 있었으니까. 언젠가 이 천만 원이, 이십, 오십, 아니 백만 원 단위로 불어날 날을 상상한다. 그리고 그 순간, 딸과 남편에게 이렇게 말할 것이다.
‘봐라, K 아줌마가 결국 성을 점령했노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