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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경희 Sep 21. 2022

녹용과 산호 반지(얼큰 소고기 우거짓국)

지난날의 씁쓸함


무뚝뚝하기 그지없는 외사촌 오빠한테 전화가 왔다. 근무하던 간호사가 갑자기 그만두었는데 사람을 구할 때까지 자리 좀 지켜달라는 것이었다. 마침 방학을 맞이하기도 했지만 용돈이 궁하던 터에 당장 다음날부터 나가겠다고 했다. 대학교 3학년 겨울방학 때였다.



오빠네 한의원은 침 잘 놓기로 소문이 나 있었다. 환자들이 한약을 지으러 와야 돈을 많이 벌 텐데 오빠네 한의원엔 침 맞으러 오는 환자들이 줄을 이었기 때문에 오빠는 하루 종일 바쁘기만 했지 실속이 없었다. 한의사였던 할아버지의 업을 이어받아 한의사가 된 오빠는 점점 침놓는 실력이 수준급이 되었다.



한의원에 나간 지 닷새째 되던 날, 곱슬머리에 코가 큼지막한 남자가 슬리퍼를 찍찍 끌고 한의원으로 들어왔다. 그 남자는 오빠와 한참 동안 낄낄거리더니 나지막하게 말했다. 환자들에게 침만 놓아주지 말고 한약을 지어 팔아야 돈이 된다고. 나중에 알고 보니 그 남자도 한의사였다.



후배의 말을 듣고 심경에 변화가 생긴 것인지, 어디에 요긴하게 쓰려고 그랬던 건지, 오빠는 손으로 한 뼘쯤 되는 어린 녹용을 구해다가 작두에 얇게 썰어 말렸다. 녹용의 겉모양은 연한 갈색으로 말캉해 보였다. 그것을 작두 사이에 넣고 서걱서걱 자르니 선홍빛 피가 벌겋게 작두날에 묻었다. 약효가 어찌 되었건 내 눈엔 그저 징그럽게만 보여서 눈살을 찌푸렸다. 그늘에서 며칠 말리니 잔털이 도넛 모양으로 띠를 이루고 있는 녹용 조각은 꾸덕꾸덕한 초콜릿색으로 변해갔다. 다 마른 녹용은 비닐봉지에 고이 넣어 한약장 높은 곳에 넣어두었다. 다른 일은 다 시키면서 녹용은 오빠가 직접 애지중지 만졌다.



며칠 뒤 출근을 했더니 화가 잔뜩 난 얼굴로 오빠가 한약장 앞에 서 있었다. 무슨 일이 있느냐 물어보려는데

“이 녀석아. 녹용 어디다 뒀어. 이런 것에 손을 대면 어떡해!”

오빠는 다짜고짜 소리를 쳤다. 이유 없이 오해를 받게 된 것이 억울했다. 녹용에는 손도 대지 않았다는 말을 입속으로 웅얼거리며 눈물 바람을 했다. 더 추궁하려던 오빠는 한숨을 쉬더니 원장실로 들어가 버렸다.



그런 일이 있은 뒤로 그 해 겨울이 빠르게 지나갔다. 개학이 가까워 오자 내가 물었다. 간호사는 왜 안 구하는 거냐고. 오빠는 2월까지만 한의원을 운영한다고 했다. 대학에 교수 자리로 초빙되어 간다는 것이었다.

2월 마지막 주가 되자 한의원에 있던 다른 물건은 다 처분하고 한약장만 남았다. 마지막으로 일꾼 아저씨 둘이서 한약장을 들어냈다. 한약장이 한의원 밖으로 나가고 텅 빈 벽 쪽으로 작은 구멍이 보였다. 그 속에 작은 물건이 비스듬히 놓여있었다.



고개를 갸우뚱거리던 오빠가 구멍에서 물건을 꺼내 들었다. 물건에는 먼지가 수북이 쌓여 있었다. 두 손으로 먼지를 조심스럽게 닦아내던 오빠가 “이게 왜 여기 있지?”라고 작은 소리로 혼잣말을 하더니 나를 힐끔 바라봤다.

“뭔데 그래요?”

오빠 옆으로 다가갔다.

“어……. 이게…….”

말끝을 흐리며 마치 내가 보아선 안 될 물건이나 되는 것처럼 감추는 시늉을 했다. 대체 무엇이 길래 저러나 싶어서 오빠가 들고 있는 비닐봉지 쪽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세상에 비닐봉지 속에는 두 달 전에 감쪽같이 없어졌던 녹용이 들어있었다.

“어머나 이게 왜 여기 있는 거죠?”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오빠를 쏘아보았다.

“서생원이란 놈이 어맨 사람을 도둑으로 몰았네.”



오빠는 염치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어색한 웃음을 웃었다. 미안하다는 말을 어색한 웃음으로 대신 표현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동안 증거도 없이 다짜고짜 도둑으로 몰아세우던 오빠가 얄미웠다. 무엇보다 오해해서 미안하다고 분명하게 사과하지 않는 오빠의 태도에 서운함이 밀물처럼 밀려왔다. 난생처음 도둑으로 오해받던 순간보다 더 서러워서 눈물이 핑 돌았다. 그러나 서러움도 잠시, 그동안 받았던 의심의 눈초리를 벗어던졌다는 것만으로도 다행이었다. 십 년 묵은 체증이 내려가듯 속이 후련해져서 날아갈 듯이 기뻤다.








20년이 지난 어느 날, 딸이 같은 반 친구라며 예쁘장하게 생긴 여자아이를 집으로 데리고 왔다. 꼬마 아이는 입술이 앵두처럼 작았다. 곱게 땋은 양 갈래 머리는 몹시 단정해 보였다. 원피스를 입은 모습은 하늘의 천사처럼 착하고 순해 보였다.



딸내미는 제 방에서 인형놀이를 하다가 지루해졌는지 친구에게 엄마의 보석함을 구경시켜줘도 되느냐고 물었다. 나는 무심코 그러라고 하면서 화장대 위에 놓아둔 보석함을 가리켰다. 딸내미와 꼬마 아이는 산호 반지를 꺼내 번갈아가며 손가락에 끼우고 놀았다. 꼬마 아이는 산호 반지가 제 손가락에 끼워질 때마다 유심히 바라보기도 하고 탐이 나는 듯 부러운 눈빛까지 보였다.



남편에게 생일날 선물 받은 산호 반지는 노란 18K로 된 도톰한 링 위에 빨간 산호가 봉긋이 솟아 있었다. 구슬처럼 동그란 산호 주변으론 금색 꽃잎이 얇게 퍼져있었다. 마치 빨간 장미 봉오리가 금색 꽃받침 위에서 막 피어오르는 것 같았다.



딸 친구가 집으로 돌아간 뒤, 여기저기 아무리 눈을 씻고 찾아봐도 산호 반지가 보이지 않았다. 그 아이가 주머니에 슬쩍 넣어 간 것만 같았다. 한참을 놀다가 차려준 간식까지 먹고 집으로 돌아가면서 내 눈을 맞추지 않고 쭈뼛거리며 인사하고 달아나던 그 아이의 모습이 떠올랐다.



나는 산호 반지를 찾고 싶었다. 꼬마 아이에게 전화를 걸어 물어보고 싶었다. 하지만 전화를 걸지 못했다. 이사 가던 날 한약장 뒤에서 나왔던 녹용을 떠올리며 없어진 내 산호 반지도 언젠가 이사 가는 날 찾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마흔둘의 봄을 맞이하기 위해 겨울의 끝자락에서 그렇게 산호 반지는 내 품을 떠나고 말았다. 가끔씩 그때 찾지 못한 빨간 산호 반지가 생각난다. 그러면 자동적으로 사촌 오빠와 나 사이에 있었던 녹용 사건이 꼬리를 물고 떠오른다.



지금은 70세가 넘어버린 사촌 오빠에게 전화라도 걸어서 그때 찾은 녹용은 어디에 썼느냐고 물어보고 싶다. 그리고 그때 나한테 미안한 마음은 없었느냐고 묻고 싶다. 지나버린 세월 속에 묻어두었던 억울했던 마음, 그 마음이 흔적 없이 사라진 줄 알았는데 오늘은 물에 빠진 생쥐처럼 고개를 쏙 내민다. 이런 날엔 칼칼하고 국물 진한 얼큰 소고기 우거짓국을 끓여 먹으며 개운치 않은 마음을 달래 봐야겠다.








소고기 우거짓국을 끓이기 위해 솥에다 물을 약간 넣고 얼갈이배추를 넣고 물컹하게 삶았다. 삶은 배추를 잘라 고춧가루와 액젓, 다진 파와 청양고추를 넣고 조물조물 무쳤다. 소고기는 국 간장과 참기름, 마늘을 넣고 양념했다. 냄비에 육수를 적당히 붓고 소고기와 우거지, 된장 1 큰술을 넣고 용솟음칠 때까지 팔팔 끓였다. 채 썬 양파와 다진 대파, 마늘을 넣고 한소끔 더 끓인 후 불을 껐다.



매운 소고기 우거짓국은 매콤한 청양고추의 맛이 혀끝에 닿으면 알싸하다. 한 입 두 입 먹을수록 매워서 코끝에 땀이 송골송골 맺힌다. 하지만 매콤한 국물이 목구멍을 타고 넘어가면 후련할 정도로 속이 개운하다. 톡 쏘는 매운맛은 기분을 상쾌하게 해준다.  푹 익은 우거지는 매운 국물에 지친 혀를 부드럽게 감싸주며 마음까지 달래준다.



* 주먹구구 요리법 <얼큰 소고기 우거짓국>



재료: 소고기 앞다리 살 200g, 우거지 3줌, 대파 2대, 양파 1개, 고춧가루 3 큰술, 참기름 1 큰술, 청양고추 3개, 국 간장 3 큰술, 액젓 2 큰술, 다진 마늘 2 큰술, 후추 약간.

1. 소고기에 국 간장 3 큰술, 참기름, 마늘, 후추를 넣고 조물조물 무쳐둔다.

2. 팔팔 끓는 물에 얼갈이배추를 5~8분 정도 삶아준 다음 찬물에 씻어서 먹기 좋은 크기로 숭덩숭덩 잘라서 물기를 짠다.

3. 삶은 배추에 양념을 한다. (고춧가루 3 큰술, 액젓 2 큰술, 파 다진 것, 청양고추 다진 것을 넣고 조물조물 무쳐준다)

4. 냄비에 육수를 부은 다음 밑간 해둔 소고기와 우거지를 넣고 끓이다 된장 1술을 넣고 간을 맞춘다.

5. 국이 끓어오르면 채 썬 양파, 대파, 마늘 다진 것을 넣고 한소끔 더 끓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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