탑승 불가(不可), 불가리아 대중교통 탑승기

불가리아어 само метро ? тридесет минути ?

by Fernweh

말을 모으는 여행기, 말.모.여. 20)


불가리아어 само метро [싸모 메뜨로] expr. 지하철 전용

тридесет минути [뜨리데셋 미누띠] num. 30분


들어가는 말,

러시아 여행 전 키릴 문자를 떼려 조금 맛본 러시아어. 명사의 성이 하나 더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복잡했다. (프랑스어는 남·여성 2가지, 러시아어는 여기에 중성이 더해져 3가지) 그보다 더 복잡해 보인 건 러시아어의 ‘격 체계’. 이걸 배우려면 얼마나 걸릴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격’은 주격, 목적격, 소유격 등에 나타내는 문법이다. 우리말의 조사와 조금은 비슷한 개념. 우리말은 단어 뒤에 조사만 붙이면 되지만, 러시아어는 수식하는 모든 단어의 어미가 격 변화하기에 복잡하게만 느껴졌다. 같은 슬라브어 계통인 불가리아어도 다르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여기서 반전. 불가리아어에는 이런 격 체계가 없다. 그래서 러시아어에 비해 훨씬 효율적이고 쉽다고, 불가리아 친구가 한 번 배워볼 만하다며 당차게 말했다. 격이 없어 효율적인 불가리아어와 다르게 효율적이지 않은 한 가지를 소피아 여행 중 발견했다. 그렇게 시작된 불가리아 소피아 대중교통 탑승 수난기.


불가리아는 ‘격’이 없어 효율적인데,

불가리아 소피아 대중교통은 격하게 효율을 거부한다.

‘싸모 메트로’ 3일권? ‘트리데쎗 미누티’ 1회권?

뜻을 깨우쳐야 탑승 불가(不可), ‘불가’리아 소피아 대중교통을 탈 수 있다.


* 생생한 느낌을 살리기 위해 제목에서만 최대한 실제와 가깝게 발음을 표기했고, 본문에서는 외래어 표기법에 맞춰 작성했습니다.


불가리아, 릴라 수도원


불가리아의 수도 소피아. 수도라기엔 그리 넓지 않다. 관광객은 시내 중심 세르디카(Сердика)역을 기준으로 전후좌우 지하철 한 정거장씩만 이동하면 웬만한 곳은 다 볼 수 있다. 인터넷 후기에 대중교통에 대한 언급이 별로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트램’이 어쩌다 한 번 후기에 등장하는 경우는 소피아 근교의 릴라 수도원으로 가는 버스를 타러 서부 터미널을 갈 때뿐. 이 정도는 대중교통 이용하기 초급 코스다. 초급이라고 ‘불가’리아 수도에서 방심했다간 탑승‘불가’ 경고를 몇 번이고 마주한다. 상급 코스였음을 깨닫는 건 금방이었다. 남들처럼 세르디카역 주변에 숙소를 잡지 않은 게 화근이었다.


미국에 있던 불가리아인 친구가 내가 소피아를 떠나는 다음날 딱 하루 차이로 돌아온다고 해 일정을 급히 바꿨다. 친구 집은 비토샤(Витоша)산 바로 아래. 세르디카역에서는 약 20km 정도 떨어져 있다. 하루를 보더라도 서로 이동이 편하게끔 세르디카와 비토샤, 두 지점 중간 즈음의 숙소로 예약을 변경했다. 원래대로 세르디카역 근처 숙소에 묵었다면 겪지 않았을 수난이 시작되었다.


지하철만 탈 수 있는 3일권?

릴라 수도원 하루, 친구 만나는 날 하루를 빼면 딱 3일이니 3일권을 사기로 했다. 3일권은 지하철역에서만 판다고 해서 숙소 앞에서 트램을 타고 세르디카역으로 나갔다. 창구에 도착해 3일권을 사려는데 직원이 현지 말로 뭐라 말을 한다. 알아듣지 못해 ‘잉글리스키(영어)’라고 했더니 영어로 더듬더듬 설명해 주던 직원. 내가 이해한 건 ‘3일권은 전자식 카드라 지하철만 탈 수 있다’였다. 번역기로 ‘Only metro’를 적어 ‘само метро(싸모 메뜨로)?’를 보여주며 되물어 봐도 직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숙소까진 무조건 트램을 타야 했기에 3일권은 포기했다. 점심을 먹다가 지하철 홈페이지 설명을 다시 봤더니 3일권으로 모든 대중교통을 탈 수 있단다. 말이 안 통하니 내가 이해를 잘못한 건가, 했지만 트램을 계속 타다 보니 홈페이지 정보에까지 합리적 의심을 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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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피아 지하철 모습


아날로그 펀칭시스템

유럽 여러 나라에선 대중교통 탑승 시 본인이 직접 개찰해야 한다. 소피아는 펀칭을 하는 방식. 종이로 된 1회권을 개찰기에 넣고 손잡이를 내리면 구멍이 뽕 뚫린다. 이걸 안 하면 무임승차로 간주되어 벌금이 부과된다. 프랑스에 살 때 1년에 5번 봤을까 말까 한 검표원을 거의 매일 만났을 정도이니 실수로라도 펀칭을 까먹어선 안 된다. 아무튼 아날로그 시스템을 보니 전자식 카드인 3일권으로 트램을 어떻게 타는지 의문이 생겼다. 그래서 ‘모든 교통수단 가능’이란 홈페이지 글보다 ‘지하철만 탈 수 있다’는 직원 말에 믿음이 갔는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신식 트램엔 카드 인식 장치가 있다. 폐차 직전이라 해도 될 허름한 버스에는 또 펀칭 기계뿐. 창구 직원의 설명은 아마 ‘구식 트램이나 버스는 카드로 탈 수 없어요. 관광 오신 거면 지하철만으로도 다닐 순 있지요. 지하철만 탈거라면 3일권을 사세요.’였을지도 모르겠다.

소피아_1회권.jpg 1회권은 이렇게 펀칭을 해야 한다. 오른쪽 사진, 검은 가방 맨 여자가 검표원.(검표원 정말 자주 탄다)


지하철 표는 지하철에서만

시내 구경 후 숙소로 가는 트램을 타러 갔다. 세르디카역 지하를 지나다 주머니를 가득 채운 잔돈이 거추장스러워 표 두 장을 미리 사 두었다. 트램을 타고, 펀칭도 했다. 다음 역에서 탄 검표원에게 자신 있게 펀칭까지 끝낸 표를 보였다. 그 자신감은 직원의 말이 길어지면서 조금씩 불안감으로 바뀌었다. 다행히 옆에 있던 청년이 통역을 도왔다. 지하철 1회권으로는 트램을 탈 수 없단다. 그럴 수도 있다는 의심조차 전혀 하지 않았으니, 이것도 문화 차이라면 문화 차이일까. 다행히 시내 밖까지 트램을 타고 나가는 동양인이 신기했는지 작은 해프닝으로 웃어넘겼다. “도대체 어디서 지하철 표로 트램을 타요?” 검표원의 마지막 말은-물론 청년이 통역해 준-웃어넘기지 못할 뻔했다. 근데 서울 지하철도 ‘1회용 표’로는 버스는 타지 못하니 웃어넘길 수밖에. 지하철만 해당된다는 само метро. 3일권은 ‘지하철만’ 탈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고 지하철 표로는 ‘지하철만’ 탈 수 있다는 뜻이었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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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내를 다니다 보면 숱하게 지나치는 소피아 트램. 해당 트램은 구식이고 신식 트램도 꽤 많다


30분 안에 타야 하는 1회권

환승할인 제도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1회권을 구매한 순간부터 째깍째깍, 30분의 카운트다운은 시작된다. 전날 사 둔 두 장의 표. 쓰면 안 됐지만 쓰게 된 한 장. 나머지 한 장이 아직 있었다. 지하철만 탈 수 있으니 한 정거장을 갈지언정 지하철을 타기로 했다. 시내를 돌아다니다 다리가 아파질 즈음 지하철을 타러 내려왔다. 개찰구를 통과하려는데 삐-, 경고음을 내며 탑승을 막는 거 아닌가. 표를 바꾸러 창구로 향했다. 표 하단의 바코드를 찍어 본 창구 직원은 시간 예시를 적어 보여 주며 말한다. “트리데셋 미누티(тридесет минути).” 그러니까, 30분 내로 지하철을 타지 않으면 그 표는 휴지조각이 된다. 1회권은 1.6레바(≒천 원)라 별로 아깝지 않다만 괜히 심술이 낫다. 어제는 트램이, 오늘은 지하철이 자꾸 발목을 잡으니까. 나중에 친구에게 하소연했더니 소피아로 온 지방 사람도 이걸 몰라 불편을 겪는단다. 그럼 나한테 먼저 귀띔해 줘도 좋았잖니, 친구야.


3일간 대중교통을 이용하며 겪은 산전수전은 이랬다. 여행할 때 불평을 잘 하는 성격은 아니라 짜증만 난 건 아니었다. 오히려 어려운 수학 문제를 천천히 풀어내는(실제론 못 푼다) 쾌감을 느꼈다고나 할까. 그래서인지 소피아는 나만 아는 비밀이 있는 친구 같은 도시로 남았다.


소피아 알렉산드르 넵스키 대성당



덧붙이는 말,

- 1일권은 1회권과 다르게 표에 날짜가 찍혀 있어 펀칭하면 안 된다.(날짜를 보여 주고 탑승)

- 간혹 도로 한복판으로 걸어 들어가서 트램을 타는 곳이 있었다. 트램이 서면 뒤 차량은 알아서 멈추지만 그래도 꽤 위험해 보였다.

- 지하철엔 영어 표기가 있다. 버스, 트램(신식 트램 포함)은 키릴 문자뿐.

- 삼면이 60/40/40cm를 넘는 짐이 있을 땐 수하물용 표를 하나 더 사야 한다.


소피아_도로한복판정거장.jpg 이런 식으로 도로 한 가운데로 들어가서 타야 하는 곳이 있다... (말잇못)
IMG_4902.jpg 트램 내부 노선도는 다 키릴 문자. 키릴 문자마저 몰랐다면, 대중교통 탑승이 정말 '불가'했을 불가리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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