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방 손님과 목욕 이야기 1

by 이미


아침에 출근하는 동료의 얼굴들을 보면 본격적으로 일과가 시작되기도 전에 이미 한껏 지쳐있다. 졸린 눈을 비비고 새벽같이 집을 나서 발길을 옮기는 출근길 위에서 이미 피곤함을 한가득 안고 직장에 다다르는 것이다. 사무실 문을 열고 ‘안녕하세요.’라고 말하는 모두의 목소리에 전혀 안녕함이 없다. 다들 자동 응답 기계처럼 안녕하냐고 묻고 안녕하다고 대답한다. 한 해의 끝을 향해 달려가는 연말의 어느 날은 아침부터 쏟아지는 업무에 모두 열을 받아 사무실을 메운 오전 공기가 후끈했다.



문득 정신을 차려보면 어느덧, 뜨거운 머리를 차갑게 식혀주는 점심시간이다. 컴퓨터 모니터에 얼굴을 박고 멍하니 키보드만 두드려대는 좀비 같던 노동자들의 얼굴에 화색이 돈다. 나와 동료들은 점심시간이면 휴식도 취할 겸, 사무실 한편에 자리한 사랑방에 옹기종기 모여 커피 한 잔을 기울이며 이야기꽃을 피운다.


근황 토크가 이어진다. 다들 요즘은 뭘 하고 지내는지 한두 마디씩 꺼내 놓는다. 배정남의 복근 같은 근육을 만들려 열심히 운동 중인 사람, 몸무게 숫자의 앞자리가 ‘7’이 되어 다이어트를 하는 사람, 대학원 공부를 시작한 사람, 드디어 애인이 생긴 사람 등, 고유한 개인들이 살아가는 세상에는 다양함이 가득하다. 나도 한마디 거든다.


“나는 요즘 목욕에 대한 글을 쓰고 있어.”


이제 우리 이야기의 화제는 ‘목욕’이다.


림: 나는 목욕을 진짜 좋아하는데 저혈압 때문에 대중탕은 못 가. 대신 집에서 반신욕을 자주 하는 편이다? 직장에 있는 동안은 업무적으로 실수 없이 완벽해야 한다는 마음이 커서인지 엄청 스트레스를 받는데, 스트레스 풀기엔 반신욕이 딱이야. 퇴근하고 집 청소에 정리 정돈을 간단히 끝내면 이십 분 정도 반신욕을 할 수 있어. 반신욕을 하면 기분이 진짜 좋아져.


쩡: 나는 퇴근하면 손가락 하나 까딱할 힘도 없어서 침대 위에 그냥 쓰러져 버리는데 림은 정말 대단하다. 퇴근하자마자 집 청소에 반신욕까지 완전 일사천리네.


림: 쩡은 아직 애가 없으니까 그렇지. 엄마가 돼봐. 하루의 삼 할은 노동자로 살고, 삼 할은 수면으로 보내고, 나머지는 애들 엄마로 살아야 해. 하루 중 온전한 내 시간은 퇴근해서 애들이 학원에서 돌아오기 전까지, 단 이십 분밖에 없어. 그 시간이라도 나를 위해서 써야지. 나머지 시간은 어디서 엄마를 찾을지 모르는 애들 때문에 오분 대기조 신세라 쉬려해도 제대로 쉴 수가 없다니까.


이미: 엄마가 된다는 것은 혼자만의 시간이 엄청나게 줄어든다는 뜻이구나.



림: 슬프지만 정말 맞는 말이야. 나는 결혼해서 애를 낳기 전에는 영화배우가 되고 싶었거든? 근데 보시다시피 지금은 그냥 대한민국 아줌마잖아. 젊을 적 못다 이룬 꿈이 서글퍼서 하루에 딱 이십 분은 반신욕을 하면서 영화도 보고 마음에 드는 대사가 있으면 혼자 읊으며 연기도 하고 그래. 나 정말 웃기지?


카: 우악! 과감한 노출 연기!


카의 과한 반응에 모두 한바탕 웃는다. 즐거운 분위기 속에서 나는 상상의 나래를 펼쳐 림의 이야기를 풀어내고 있다.



온온한 욕조 속에서 림은 할 일을 생각합니다. ‘애들이 학원에서 돌아오면 간식부터 먹이고, 애들이 씻는 동안 밥을 안치고 집 정리에 청소를 좀 해야겠어. 그러면 남편이 퇴근할 즘이니까 다 같이 저녁을 먹고, 감기 걸린 첫째 약을 먹여야겠지. 아 참, 애들 숙제도 봐줘야겠네.’ 이십 분, 단 이십 분만이라도 오직 그녀만 생각하며 살 수는 없는 걸까요. 수년 차 엄마 림은 이십 분 중 살림과 자식 걱정으로 벌써 반을 써버렸습니다. 남은 시간 동안만이라도 자신에게 집중하고자 림은 눈을 감습니다. 살짝 나른한 졸음이 밀려오면서 어스름한 시야 사이로 잊었던 어릴 적 꿈이 펼쳐집니다. 영화배우가 되고 싶었던 림은 지금 할리우드의 레드카펫 위에서 카메라 플래시 세례를 받고 있습니다. 평소 동경하던 우마 서먼과 탕웨이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요. 타란티노와 이안 감독도 보이네요. 림이 한미중 합작 영화에 출연했나 봅니다. 포즈와 표정을 이리저리 바꿔 가며 연예 타블로이드지의 일 면을 장식할 화보 사진을 찍어도 봅니다. 9분 59초 동안 그래 봅니다. 이윽고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립니다. 아이들이 학원에서 돌아왔군요. 욕조가 오늘따라 엄마 품처럼 포근하게 느껴져 더욱 일어나기가 싫습니다. 문밖에서 첫째 아들이 림을 부릅니다. “엄마! 어디 있어!” 림이 다시 대한민국의 엄마가 될 시간입니다.



갑자기 들려오는 카의 까랑까랑한 목소리가 림의 이야기를 소재로 상상의 글을 써 내려가던 나를 깨운다.


카: 나도! 나도 목욕탕 썰 있어요! 네 살 땐가? 냉탕에 있다가 온탕에 들어가면 온몸이 찌릿해지는 기분이 좋아서 계속 그러다 미끄러져서 뇌진탕을 일으켰어요. 한마디로 머리가 깨진 거죠. 의식이 없어졌었는데 일어나니까 병원이고 머리엔 붕대가 감겨 있는 거예요. 진짜 신기하게도 그때 이후로 공부를 잘하게 됐어요. 이런 썰도 글로 쓸 수 있어요?


이미: 하하. 뭐라고 써 줄까? 대한민국이 낳은 비운의 천재 목욕탕에서 새로 태어나다! 어때?


웃음 부자인 동료들 사이에서 턱을 괴고 한참을 골똘히 생각에 잠겼던 윤이 드디어 입을 열었다.


윤: 저는 목욕보다는 샤워가 더 좋아요. 탕에 들어가면 너무 뜨거워서 쉽게 느른해지는데, 샤워는 시간이 비교적 짧아서 훨씬 더 상쾌한 거 같아요. 그리고 샤워하면서 거울을 보면 한 번씩 잘생겨 보이기도 하고요. 깨끗하게 면도해서 피부 위의 더러움을 벗겨내면 얼굴은 물론이고 인생도 한결 깔끔해지는 기분이 들어요. 샤워가 인생의 때까지 씻어내는 기분이랄까.


이미: 정말? 인생의 때가 씻겨 내려가는 기분은 도대체 어떤 느낌이야?


윤: 음, 뭐랄까. 저는 평소에 다혈질적인 기질이 있는데요. 미지근한 물보다 살짝 차갑게 해서 샤워를 하면 제 다혈질적 면모가 물에 다 녹아서 하수구로 빠지는 느낌이에요. 그러면서 스스로 삶을 반성하기도 하죠. 아, 내가 혹시 오늘 마주한 사람들한테 너무 뾰족하게 굴지는 않았나, 내가 누군가의 하루를 까칠하게 만들지는 않았나. 내일은 좀 더 부드럽게 사람들을 대해야지, 티끌이 되지 말고, 티끌을 씻어내는 물처럼 살아봐야지 하고 생각해요.


림: 와, 윤의 샤워에는 진짜 인생이 녹아나네. 멋지다!


림의 이야기에 이어 이번에는 윤의 이야기다.



윤은 올해 참스승에 대한 부푼 꿈을 안고 시골 학교에 갓 부임한 새내기 특수교사다. 의욕과 열정이 넘치는 윤이지만 교직이 처음이라 서툰 것도 많다. 일반 아이들보다 손이 두 배, 세 배로 가는 통합교육반의 담임을 맡은 그의 일은 가끔 꽤 버거워 보이기도 한다. 교사로서 최대한 감정적 중립을 지키려고 노력하는 윤이지만 그도 사람인지라 어쩔 수 없이 목소리가 높아질 때도 있다. 그럴 때면 어김없이 그러지 말 걸 하는 후회가 들기도 하는 윤이다.


통합교육반의 학생 한 명이 오늘도 머리를 안 감고 교복을 빨지 않은 상태로 등교했다. 저절로 한숨이 쉬어지지만 참고 지도를 이어간다. ‘금쪽아, 목욕을 해야 몸에 냄새도 안 나고 몸이 건강해지는 거야.’ 윤의 신신당부에 내일은 꼭 목욕하고 오겠다고 호언장담을 한 이 아이는 아마 내일도, 모레도 그렇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학교 샤워실에서 비듬이 가득한 머리를 삼 일째 안 감고 오는 아이를 씻기며 윤은 그만 호되게 혼내고 말았다. ‘목욕을 꼭 하고 와야 깨끗해져서 병에 안 걸린다고 했지!’ 아이는 결국 울음을 터뜨렸다. 다 아이를 위해 한 말이긴 하지만 눈물을 본 윤의 마음은 종일 편치 않다. 괜히 혼을 낸 건 아닌지 자책을 하기도, 교육상 필요한 부분이었다고 자기 위로를 하기도 한다. 그래도 마음이 썩 편해지지 않는다.


퇴근 후 집에 돌아온 윤은 온몸을 뒤덮은 꿉꿉한 한여름의 땀내도, 또 불편한 마음도 모두 개운히 씻어내고자 샤워를 시작한다. 샤워 볼에서 몽글몽글 일어나는 바디 워시의 하얀 거품과 상큼한 딸기 향에 한결 기분이 좋아진다. 샤워는 딱히 특별한 뭔가를 하지 않아도, 몸을 씻어내는 행위만으로도 순식간에 윤을 행복하게 만드는 재주가 있다.


윤은 샤워기 헤드에서 쏟아지는 시원한 물줄기에 오늘 하루 아이들과 씨름하느라 뜨거워진 머리를 식히며 생각에 잠긴다. 혹시 오늘, 충분히 참을 수 있었던 일인데도 너무 감정적으로 처리하진 않았는지, 충분히 부드럽게 지도할 수 있었던 일인데도 아이에게 너무 날카로운 말을 건네지는 않았는지, 괜히 그래서 아이의 마음에 상처를 낸 건 아닌지... 어쩐지 약간의 미안함이 윤의 가슴속에 피어오른다.


깔끔하게 샤워를 마친 윤이 시원한 선풍기 바람에 머리를 툴툴 털어 말리며 생각을 이어간다. 내일은 좀 더 열린 마음과 인자한 미소로 아이들을 대해야겠다고, 그들에게 오늘 미처 건네지 못한 따뜻함을 선물해야겠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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