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방 손님과 목욕 이야기 2

by 이미


어느덧 사랑방 손님들의 이야기는 점점 깊어지고 있었다. 우리는 서로의 다양한 목욕 관련 경험을 공유하며 신기한 무언가를 발견했다. 희한하게도 목욕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 단 한 명도 없다는 것이다. 물론 목욕의 종류에는 호불호가 갈렸다. 대중탕을 좋아하는 나, 반신욕을 좋아하는 림, 샤워를 좋아하는 윤과 쩡, 사우나나 찜질방을 좋아하는 준과 카까지. 그러나 신기하게도 목욕을 싫어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목욕은 도대체 어떤 힘을 가지고 있기에 이렇게 다양한 사람들의 마음속에 공통의 호감으로 자리하고 있을까. 목욕이라는 주제는 어떤 매력이 있어서 고유한 개인들이 이토록 재미있게 나눌 수 있는 이야깃거리가 되는 걸까.


아마도, 우리 몸과 마음속에 묻은 때를 지워내는 아주 간단한 방법이 바로 목욕이라는 것이 가장 큰 이유가 아닐까 싶다. 우리는 걸어온 인생의 길도 방향도 모두 다르다. 삶에서 겪은 힘듦도, 사는 도중 저지른 실수도 모두 다르다. 그러기에 각자 마음속에 품고 있는 지우고픈 후회와 불안의 크기도 모양도 모두 다를 것이다. 이렇게나 다채로운 인생의 때도, 그저 욕조 안에 들어가 땀을 쫙 빼내는 소행으로 한결 가벼워질 수 있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이야기가 깊어질수록, 사랑방 손님들의 삶에 쓸린 다양한 흉터들도 목욕이라는 공통된 행위로 인해 옅어지고 있었다. 삶이란 칼날에 베여 쩍 벌어진 마음속 상처들이 목욕 이야기 안에서 점점 새살을 채워 회복해 가고 있었다. 그래서 지금 여기, 사랑방에 모인 우리 모두가 목욕을 좋아하나 보다.


무르익은 이야기 속에서 우리는 어느새 어린 시절로 돌아가 있었다.



쩡: 나 어릴 땐, 일요일 아침 일찍 목욕을 갔다 오면 시간이 딱 디즈니 만화 동산 할 때였어. 목욕하고 나서 개운한 마음으로 디즈니 만화를 보는 게 얼마나 꿀맛 같은 시간이었는지. 미처 못 다 마시고 집까지 들고 온, 엄마가 목욕탕에서 사준 바나나 우유를 마저 쪽쪽 빨아 먹으며 TV를 보는 게 제일 행복했던 것 같아. 나는 인어공주를 제일 좋아했어.


준: 나는 라이언 킹! 나도 생각나요. 디즈니 만화 동산 하고, 날아라! 슈퍼보드. 이 두 개는 일요일 아침에 목욕탕을 다녀와서 매번 챙겨 봤어요.


나는 사랑방 손님들의 어린 시절 얘기를 들으며 생각한다. 우리가 어렸을 때는 참으로 소소한 것들에 행복해했구나 하고. 일요일 아침 눈을 비비며 엄마 손을 붙잡고 갔던 목욕탕에서 얻은 개운함이 좋았고, 엄마가 큰맘 먹고 사주는 바나나 우유 하나에 기뻤고, 집에 돌아와서 보는 만화 영화 한 편에 행복했던 어릴 적. 왜 훌쩍 커버린 지금은 그때보다 더 많은 것을 가지고도 덜 행복한 걸까. 사소한 것에 깃든 행복을 찾기보다는 당장 손에 잡히는 물질적이고 가시적인 성공만을 바라기 때문일까. 다시 어릴 적의 소담하게 행복하던 나로 돌아가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어른이 된 지금 다시금 작은 즐거움을 느끼려면 무엇을 하면 좋을까. 일요일 아침 일찍이 목욕을 다녀온 후 동심으로 돌아가 TV 동물농장이나 시청해 볼까나.


윤: 행복이란 게 따로 없어요.


마치 내 속마음을 읽은 듯 윤이 말을 이어간다.


윤: 행복이란 게 따로 있는 게 아니더라고요. 저는 어릴 때 목욕탕 정리 알바를 해봤어요. 임용고시를 준비할 때였는데, 당시 최저 시급을 받으면서 일했죠. 이미 시험에 여러 번 낙방해서 자존감이 많이 떨어져 있었을 때에 폐장 전에 물때가 자박한 목욕탕 바닥을 청소하자니 꽤나 서러운 기분이 드는 거예요. ‘아, 나는 남의 때는 청소하면서 정작 내 때는 못 벗기는구나.’ 이런 느낌? 그래서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나서 막 울었어요. 목욕탕에서 울면 소리가 더 웅웅 울리잖아요. 알죠? 제 우는 소리가 너무 커서 그걸 듣고 세신사 아저씨가 막 달려오는 거야. 무슨 일 난 줄 알고. 그러더니 아무 말 없이 때밀이 침대에 누우라고 하더니, 때를 벅벅 밀어주는 거예요. 처음에는 남자가 별거 아닌 일로 남 앞에서 울었다는 게 부끄러웠는데, 아저씨가 때를 밀어주니까 기분이 점점 좋아지는 거예요. 그때 너무 행복했어요. 지금은 남의 때나 쓸고 있어도, 내 인생의 때를 벗고 개운한 날을 맞이하는 순간이 언젠간 올 거라 생각하니까, 그냥 막 행복해지는 거예요. 세신사 아저씨한테 너무 감사해서 소주 한 잔 사드리고 그랬어요. 소주 한 잔 입에 털어 넣으니 또 씁쓸한 술맛도 나름대로 매력 있고, 시름도 서서히 잊혀지고... 그랬죠.


그래, 옆에서 내 마음을 알아줄 수 있는 사람 한 명쯤, 내가 마음을 알아줄 수 있는 사람 한 명쯤 있으면, 그게 행복이지 달리 무어겠는가?


윤에 이어 준의 행복 지론이 펼쳐진다.


준: 맞아요. 행복이란 게 어찌 보면 딱히 별거 없어. 어쩌면 우리가 너무 큰 행복을 바라면서 살기 때문에 오히려 불행한 걸지도 몰라. 우리, 행복을 목표로 두고 살지 말아요. 행복을 도달해야 하는 종착지로 여기는 순간, 주변은 둘러볼 새도 없이 앞만 보고 가기 마련인 게 인간 마음인 것 같아요. 지금은 돈 벌 때니까 여행은 다음에 가자, 지금은 승진 준비해야 하니까 가정은 나중에 챙기자, 이러면서 미래를 위해 현재를 소모하는 거죠. 사실 행복할 수 있는 모든 순간은 지금 여기에 있다는 걸 망각한 채로 말이에요. 미래에 충실하기 위해 순간의 행복을 모조리 저당 잡히면서도 우린 행복하기 위해 살아간다고 믿고 있잖아요. 이건 진짜 어리석은 거야. 우리만이라도 미래의 행복을 목표로 두고 현재를 살지는 말자고요.


행복에 대해 열변을 토해내던 준은 목욕탕이란 화제에서 이야기가 많이 벗어났다고 생각했는지 짐짓 우리의 눈치를 살피더니 이내 다시 윤과 비슷한 자신의 경험을 읊어낸다.


준: 나도 옛날에 집 사정 때문에 엄청 힘들었던 적이 있었는데 그때 한 친구 녀석이랑 목욕을 갔어요. 온탕에 걸터앉아 있으니 기분이 묘해. 하체는 따뜻한 물에 들어가 있으니까 덥고, 상체는 물 밖에 나와 있으니까 상대적으로 선선한 게 참 역설적이랄까. 내 인생처럼 그렇더라고요. 남들이 볼 때는 멀쩡한 삶을 사는데, 내 속은 사실 썩어 들어가고 있었으니까. 그렇게 생각하니 갑자기 울컥하는 거예요. 그래서 조금 울었던 것 같아. 그때 친구 녀석이 등을 밀어주겠다고 하기에, 등을 맡겼죠. 그때도 계속 눈물이 조금씩 났어요. 그러니까 그 친구가 ‘준아, 힘들면 기대라. 우리 너무 혼자서 뻣뻣하게 살지 말고 의지하면서 살자.’라고 말해주는 거예요. 아, 그때 진짜 감동이었어요. 힘든 와중에도 진정한 우정이 있고, 기댈 친구가 있다고 생각하니까 고약한 내 인생에도 딴은 행복한 구석이 있는 것 같아서 뿌듯한 거 있죠?


림: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이 여자 친구면 더 좋을 텐데 말이야. 빨리 애인이나 만들어, 준!


여자 친구나 만들라는 림의 말에 빨개진 준의 귀를 보고 우리는 이미 그에게 여자 친구가 있음을 알아챘다. 준은 거짓말을 하면, 목부터 귀까지 빨개지는 습성 덕에.


몸에 쌓인 때를 벗기듯, 미지의 여자에게 드리운 베일을 벗기려 달려들고 있는 사랑방 손님들의 손에 투명한 때수건이 씌워져 있는 것 같다. 모처럼 좋은 먹잇감을 발견했다는 듯 준을 놀리는 그들을 보면서 생각한다. 행복이란 어쩌면 아주 가까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마음 맞는 동료들과 든든한 점심을 먹고 향긋한 커피 한 잔을 기울이며, 따사로운 햇살이 비치는 사랑방 소파에 앉아 잠깐의 수다로 웃음꽃을 피워가는 지금 이 시간, 그 자체가 행복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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