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틈으로 스멀스멀 새어 나간 우리의 웃음소리를 따라, 새로운 손님, 생탁과 리리가 사랑방에 들렀다.
“대체 무슨 얘기들을 하시길래 사랑방에 이렇게 웃음꽃이 피어?”
여섯 명까지 앉을 수 있는 소파 위에 더 이상 자리가 없어 간이 의자 두 개를 들여왔다. 만발한 웃음꽃이 살포시 내려앉아 사람 앉을 곳이 없어진 사랑방.
쩡: 우리 지금 준의 데이트 얘기 듣고 있었어요. 엄청 달달해. 빨리 계속 얘기해 봐, 준!
준은 머쓱한 듯 뒷머리를 긁적이고는 이야기를 이어갔다.
준: 영화 보고 밥 먹고 카페 가는 데이트 코스가 너무 뻔하니까, 한번은 찜질방을 갔어요. 찜질방에 가면 게임방, 영화관, 오락실, 식당이 한곳에 다 있어서 진짜 재밌거든요.
준은 사람들로 시끌벅적한 찜질방에서 이리저리 고개를 돌려 여자 친구를 찾아본다. 모두 똑같은 찜질방 옷을 입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준은 바로 그녀를 찾아낸다. 메이크업을 벗은 그녀의 자연스러운 모습과 살짝 덜 말라 촉촉한 머리칼에 깃든 웨이브가 더욱 사랑스러워 보인다. 수많은 사람 속에서 바로 그녀를 찾아낸 것만으로도 준은 그녀와 훨씬 더 가까워진 느낌이 든다. 준은 여느 커플이라면 찜질방에서 한 번쯤은 해보는 양 머리를 만들어 그녀에게 씌워준다. 한층 더 귀여워진 그녀의 모습을 실컷 즐기다 보니 얼굴 위에 저절로 피어나는 미소를 감출 길이 없어졌다.
맥반석 달걀과 식혜로 한껏 부른 배를 퉁퉁 치며 마스크 팩을 하던 준은 옆에 가만히 누워 있는 그녀에게 내기를 제안한다. 불가마에 들어가서 누가 제일 오래 버티는지를 가려 보자는 것이다. 불가마 안에서 더운 숨을 몰아쉬며 땀을 뻘뻘 흘리는 그녀는 질 생각이 없어 보인다. 준은 불가마의 열기를 당연히 더 버텨낼 수 있었지만, 그녀를 위해 먼저 일어나기로 결정한다. 이겼으니 소원을 하나 빌겠다고 환히 웃는 그녀의 땀방울 맺힌 콧잔등을 무심히 톡 때리며 따라 웃는 준이다. 일부러 져 주기로 결심한 자신이 꽤 멋지고 자랑스럽기도 하다.
이번에는 그녀가 먼저 얼음 굴에서 오래 버텨보자고 내기를 건다. 호기롭게 얼음 굴에 들어간 준을 뒤에서 살며시 안아 주며 그녀가 속삭인다. ‘너를 꼭 안고 싶어서 일부러 추운 데로 오자고 했어.’ 밤이 무르익고 시끌벅적했던 찜질방의 분위기도 서서히 고요 속으로 잦아든다. 준은 매끈한 그녀의 피부를 어루만지며 사랑한다고 속삭인다. 부디 이 밤이 길기를. 빨리 끝나지 않기를. 이 순간이 영원하기를 빌어본다.
생탁: 뭐? 여자 친구한테 사랑을 속삭였다고? 이건 완전 찜질방 ASMR이네. 아니, 어떻게 다들 로맨틱한 목욕탕 이야기뿐이야.
리리: 아직 다들 싱글이라 그렇지. 우리처럼 시부모랑 목욕탕에 같이 가서 푸닥거리를 한 번 해봐야 인생이 만만찮다는 걸 알 텐데 말이야.
생탁: 나는 신랑이랑 연애할 때부터 시어머니를 모시고 같이 목욕탕을 자주 다녔거든? 그만큼 친했다는 말이잖아. 그런데 목욕탕만 가면 시어머니 시선이 묘해지는 느낌이 든다? 이게 무슨 느낌이냐면, ‘내 아들을 데리고 간 여자의 몸매가 저따위야?’ 하면서 흘겨보다가도 당신보다 젊은 여자에 대한 질투 어린 눈빛이랄까. 아무튼 되게 오묘한 시선이 내 몸 곳곳을 훑는 느낌이야. 미혼들은 절대 모르는 기분이지.
리리: 아, 난 그 기분이 뭔지 알지. 시모들은 일부러 예비 며느리들을 목욕탕에 데리고 가기도 해. 그래서 속옷은 얌전하게 입는가, 행동거지는 괜찮은가 따위를 판단하는 거야. 예비 며느리의 등을 밀어주면서 때가 왜 그렇게 많으냐며 괜히 한 소리 하기도 하고. 본인 아들 피부는 매끄러운데 내 등엔 여드름이 많니, 피부가 거치니 하며 아무것도 아닌 부분에서 자기 아들을 치켜세우려고도 해. 피부를 위해서 면 옷을 입고 다니라는 잔소리도 잊지 않고 덧붙이면서 말이야.
생탁: 한국 시어머니들은 어쩜 그리 똑같을까. 우리 시모도 그랬다오. 그래서 매번 시모랑 목욕탕을 갔다 오면 친구들한테 시모 욕을 엄청 했어. 근데 진짜 무서운 건, 시어머니랑 동서 그리고 나까지 셋이 가는 목욕에서 시어머니가 나를 보듯 동서를 흘겨보는 나 자신을 발견할 때야. 그때 굳게 결심했어. 나는 절대로 며느리와 목욕탕을 가지 않겠다. 눈에 흙이 들어와도, 절대. 그런데 말이야, 더 웃긴 건 뭐냐면, 나는 시모랑 목욕을 자주 다니는데 우리 신랑은 장인이랑 목욕탕을 간 적이 한 번도 없다는 거야. 그래서 섭섭해진 우리 아빠가 나한테 뭐라고 하는지 알아? 혹시 김 서방 등에 용 문신 있냐고, 그게 아니고서야 왜 자기랑 목욕 한번을 같이 안 가냐고. 웃기지? 하하하.
기혼이라는 공통점을 가진 생탁과 리리 그리고 림은 서로의 마음을 토닥이며 며느리들의 웃음을 나눈다. 다만, 생탁의 말이 도대체 어떤 느낌인지 알 길 없는 미혼들은 사뭇 어색한 웃음으로 분위기를 맞출 뿐이었다. 꼭 넘어 봐야만 그 높이와 깊이를 가늠할 수 있는 산봉우리들이 여러 개 솟아난 하나의 거대한 산이 바로 인생이고, 그 봉우리 중 하나가 바로 결혼일 테니, 겪어 본 적 없는 기혼자의 삶을 미혼자가 알 리 만무했다.
한바탕 목욕 이야기에 인생을 녹여낸 우리 사랑방 손님들. 늦여름에서 초가을로 넘어가는 길목의 따스한 햇볕이 스며든 사랑방에 우리네 고유한 사정들이 가득 담겨 있다. 잠깐이지만 혼자서 만끽하는 홀가분함과 여유 그리고 행복을 느끼기 위해, 우정과 의리 때론 사랑을 느끼기 위해, 우리는 오늘도 목욕하러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