곰씨의 의자
연한 올리브 그린 색 표지에 부드럽고 온화한 표정과 넉넉한 몸집을 한 곰씨가 책을 읽고 있다. 무심코 책장을 넘기다가 긴 의자에 앉아 있는 곰씨를 봤다. 커다란 몸에 단아한 찻주전자와 찻잔, 반듯하게 접은 담요를 옆에 두고 책을 읽다가 미소를 지은 채 눈을 감고 있는 곰씨의 모습을 보는 순간 나는 그림책을 덮고 바로 계산대로 향했다. 그 안에 내게 보내는 편지라도 들어 있는 것 같았다. 집에 가서 무엇에도 방해받지 않고 느긋하게 책장을 넘기고 싶었다. 마음이 흔들릴 것 같은 예감에 설렜다.
그날, 그림책을 읽기도 전에 곰씨는 여러 번 내 앞에 나타났다. 나는 조용한 곳에서 시를 읽기 좋아하는 곰씨가 찻주전자와 찻잔, 담요를 챙겨서 혼자만 알고 있는 비밀스러운 장소에서 호젓한 시간을 보내는 즐거움이 책 속에 가득할 거라고 상상했다. 더 솔직하게 말하자면 자기가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알며 그것을 일상에서 자연스럽게 누리는 특별한 이야기를(그때까지도 책을 보기 전이었으므로 나는 내용이 뭔지 몰랐다.) 가능한 오래 아껴 두고 싶은 마음이었으나 예상은 빗나갔다. 그건 곰씨의 홀로 있음의 평온과 균형에 관한 게 아니라 ‘함께’와 ‘홀로’ 사이의 갈등과 소란과 치우침에 관한 이야기였다.
아파트에 살던 때였다. 마트에 들렀다가 낙엽이 쌓인 길을 느릿느릿 걸어서 집으로 돌아오는 중이었다. 비록 장바구니는 들고 있었지만, 은행나무가 노랗게 물든 길을 걷다 보니 산책이라도 다녀오는 기분이었다. 경비실을 지나는데 앞집 식구들이 계단에 나란히 앉아있는 걸 발견했다. 가을볕을 쬐는 가족들의 모습이 보기 좋았다.
“안 들어가세요?”
“아, 현관 열쇠를 잃어버려서 애들 아빠 올 때까지 기다리는 중이에요.”
처음에는 계단에 앉아있는 그들이 편안하고 느긋해 보인다고 생각했는데 열쇠가 없어 집에 들어가지 못하는 상황을 알게 되니 조금 피곤한 기색이 엿보였다. 나까지 염려가 되었다. 남편이 곧 온다고 연락이 왔고, 날씨도 좋아서 괜찮다고, 소풍 하는 기분이라는 앞집 아이 엄마에게 인사를 하고 집에 들어가서 장 봐온 것들을 대충 정리한 후 저녁 준비를 시작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쓰레기봉투를 들고 현관을 나섰는데 ‘아, 거기’ 그들이 아직도 있었다.
가을 해는 짧아서 어느새 아파트 뒤로 넘어간 후라 공기가 차가웠다. 아이들도 아주머니도 지쳐 보였다. 우리 집에 들어와서 기다리는 게 어떻겠냐고, 그러다가 아이들 감기라도 걸리면 어쩔 거냐고 등을 떠밀다시피 집으로 데리고 들어왔다. 찻물을 올리려고 주전자에 물을 받는 순간 어질러진 싱크대 주변이 눈에 들어왔다. 저녁 준비를 하는 중이었으므로 주방이 어수선해도 어쩔 수 없었다. 앞집 식구들은 좀 쉬게 하고 나는 저녁 준비를 계속하면 될 테니까. 오늘은 간단히 만들 수 있는 것들로 메뉴를 바꿔야겠다고 생각했다.
아이들은 엄마 옆에 오종종히 붙어 있었다. 몸이 따뜻해지자 긴장이 풀리는지 이곳저곳 기웃거리기 시작했다. 닫혀있는 방문을 열고 도자기 인형들을 만지작거렸다. 복도를 내달리다가 미끄러지면서 웃음을 터트렸다. 난감해하는 아이 엄마에게 괜찮다고 말은 했어도 슬슬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가족들이 돌아올 시간이 다가오고 저녁 준비는 늦어지고 있는 데다가 나도 집안도 어수선하기만 했다.
‘앞집의 문은 언제 열릴까?
쌀을 더 씻어야 하는 건 아닐까?
우리 집 식구들에게 앞집 식구들이 와 있다고 미리 알려줘야 할까?
도대체 앞집 남자는 왜 오지 않는 걸까?
나는 왜 저들을 집안으로 데리고 들어왔을까?
그렇다고 이제 우리 집 식구들이 돌아올 때가 되었으니
당신들은 나가줘야겠다고 말할 수도 없는 노릇이 아닐까?’
곰씨는 토끼에게 혼자 있고 싶다고 말할 수 없었다. 혼자 끙끙 앓으면서 어떻게 하면 과거의 평온함을 되찾을 수 있을지 궁리하는 것이 고작이다. 곰씨는 토끼를 비난하고 싶은 마음은 없으므로 토끼에게 난처한 말을 하지 않고 어떻게든 혼자 해결해 보려고 하지만 신통한 방법이 없다. 곰씨가 새로운 시도를 할 때마다 토끼들 역시 곰씨와 계속 함께 있을 방법들을 고안한다. 결국 곰씨는 혼자 있을 수 없음에 낙담하고 좌절된 시도들에 지쳐 쓰러지고 만다. 토끼는 곰씨와 즐겁게 지내려고 한 것뿐인데 곰씨가 쓰러져버려 당황한다. 곰씨는 울다가 더듬더듬 이야기한다.
“여러분이 좋아요. 하지만 그동안 저는 마음이 힘들었어요.
물론 우리가 함께하는 시간은 소중해요.
가끔은 혼자 있고 싶어요.
저는 조용히 책을 읽고 명상할 시간이 필요해요.
앞으로 제 코가 빨개지면 혼자 있고 싶다는 뜻이니 다른 시간에 찾아와 주세요.
그리고 무엇보다 소중한 제 꽃을 살살 다뤄 주세요.
다시 한번 말하지만 저에게……”
‘혼자’와 ‘함께’는 동시에 있을 수 없지만, 서로 자리를 바꿀 수는 있다. 오히려 ‘홀로’와 ‘함께’ 사이를 빈번하게 오갈수록 우리는 더 강해지고 우아해질지도 모른다. 다만 그걸 위해서는 내 코가 빨개졌다는 걸 보여주는 용기가 필요할 뿐이다. 비록 쉬운 일은 아니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