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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게 새롭게 보였던 순간

수영장 가는 날

by 라문숙


2교시에 체육이 있는 날이었다. 그날은 곧 다가오는 체력장에 대비해서 모든 종목을 연습 삼아 한 번씩 해보자고 한 날이었다. 달리고 매달리고 던져야 하는 날이란 끔찍했다. 체력장 당일에 하는 것도 괴로운데 연습까지 해야 하다니, 둔하고 느린 몸이라 미리 한 번 뛰고 매달리고 넘어본다고 해서 기록이 좋아질 리도 없었으므로 나는 단지 하기 싫은 것을 두 번씩이나 해야 한다는 사실만으로 아침부터 눈도 뜰 수 없을 만큼 피곤해 있었다.


체육 수업만 피할 수 있다면 뭘 해도 좋겠다고 생각했지만 달리 무슨 수가 있을 리 없었다. 머리도 아픈 것 같고 가슴은 뛰고 멀미가 났다. 첫 시간 수업이 끝나자마자 교무실로 갔다. 담임선생님께 몸이 아파서 조퇴를 해야겠다고 했다. 거짓말이 아니었다. 체육 시간을 피하고 싶은 마음에 몸까지 병이 들었다. 머리는 점점 더 아파왔고 메스꺼움도 심해져서 어디에라도 금방 누워 버리고 싶었다. 선생님은 내 얼굴을 보더니 얼른 집에 가라고 조퇴증을 써줬고, 교문 수위실에 내고 가면 된다고 했다. 교실로 가서 가방을 챙겨 들고 어리둥절해하는 반 친구들을 뒤로하고 밖으로 나왔다. 교문을 향해 가는 도중 마주친 학생주임 선생님이 어디 가느냐고 나를 불러 세웠다. 손에 쥔 조퇴증을 내밀었다.


“도장이 없네. 선생님 도장이 없잖아.”

“……”

“학생, 담임 선생님한테 다시 가서 도장 찍어 달라고 해.”


학생주임은 나를 돌려세웠다. 체육복을 갈아입은 친구들이 운동장으로 나가는 모습을 보면서 교무실로 향했으나 담임선생님의 의자는 비어 있었다. 옆자리의 선생님이 내 얼굴을 보더니, 의자에 앉아서 기다리라고 했다. 수업이 끝날 때까지 벌을 서는 기분이었다. 눈을 둘 곳이 없어 당황스러웠다. 창밖으로 시선을 돌리는 순간 ‘아! 거기’ 운동장에서 뛰고 던지는 아이들이 보였다


달리기를 하는 아이들은 서너 명씩 출발선에 서 있다가 호루라기 소리가 나면 달려 나갔다. 내가 빠졌어도 매번 꼴찌가 있다는 게 정말 신기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꼴찌는 나만 하는 건 줄 알았다. 공을 멀리까지 던지는 아이가 있는가 하면 바로 앞에서 떨어뜨리고 마는 아이가 있었다. 두 팔로 철봉에 매달리자마자 떨어지는 아이들도 제법 있었다(나는 그래도 몇 초는 매달려 있을 수 있었다!). 친구들은 철봉에서 떨어지거나 멀리뛰기를 하다가 엉덩방아를 찧고 나서도 손을 툭툭 털고 일어났다. 제일 늦게 들어왔다고 아무도 창피해하지 않았고 누구도 놀리지 않았다. 먼저 끝난 아이들은 서너 명씩 그늘에 모여 앉아 놀고(?) 있었다. 교무실 유리창을 통해 바라본 체육 시간은 그동안 내가 생각해왔던 것과 하나도 닮지 않았다.







염혜원의 그림책 [수영장 가는 날]에는 수영장에 가기 싫어하는 아이가 나온다.

나는 그 자그마한 아이가 수영장 가는 날 아침만 되면 왜 배가 아픈지 너무 잘 알 것 같아서 마치 그림책 속으로 들어간 기분이 들었다. 처진 어깨로 느릿느릿 수영복을 갈아입는 모습, 다른 아이들이 물속에서 첨벙거리는 동안 수영장 가장자리에 앉아있기만 하는 아이에게서 오래전 체육 시간의 내 모습을 다시 보았다. 내가 멀찍이 떨어져서 뛰고 구르는 같은 반 친구들을 바라보았던 것처럼 물장구를 치는 아이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아이의 심경이 고스란히 전해져 왔다.




드디어 몸이 물에 둥둥 뜬 순간에 아이가 입을 살짝 벌리고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아주 조용했고, 모든 게 새롭게 보였던’ 순간을 온몸으로 느끼는 장면에서 좀처럼 앞으로 나아갈 수 없었다. 경계를 넘어선 사람의 세상은 이렇겠구나 싶었다.



맞닥뜨리기 싫은 상황 앞에서 뒷걸음질을 칠 때마다 세상은 점점 좁아졌다. 맞서거나 뛰어넘는 대신 못 본 척하거나 빙 돌아가는 것을 택했다. 내 힘으로는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을 거라는 지레짐작으로 아무런 시도도 하지 않은 채 내가 만든 담장 아래서 주저앉아 있는 게 고작이었다. 눈을 딱 감고 상황 안으로 뛰어 들어가거나 주위에 도움을 청할 생각도 하지 못했다. 머물러 있는 것은 싫지만 뚫고 나아가기에는 겁이 나서 걸림돌을 맞닥뜨릴 때마다 필요 이상으로 끙끙 앓았다. 제대로 준비하지 못한 시험날 아침, 시험장에 가다가 넘어져 다리라도 부러졌으면 했던 그 마음이 아직도 내 속에 남아서 불쑥불쑥 나를 괴롭힌다. 수영장에 가기 싫어했던 아이에게서 여전한 내 모습을 본다.


경계를 넘어서는 보다 쉬운 방법은 하지 못해도 괜찮다는 걸 아는 것, 그래서 시도해 보는 것이다. 실패의 두려움 대신 작은 용기를 내는 순간 나도 모르게 갇혀 있던 울타리 바깥으로 나왔음을 알게 된다. 해냈다는 걸 깨닫는 순간 우리들은 안도하고 또 자란다. 삶의 어느 부분은 좀 모자란 듯 놔두어도 괜찮다. 안 되는 것, 겁나는 것, 피하고 싶은 것들을 인정하고 나면 삶이 그만큼 편해진다. 안 보이던 게 보인다. 무엇보다 자신에게 너그러워진다. 좋아하는 것들에 한층 더 집중할 수 있게 된다. 운이 좋다면 여태 할 수 없다고 생각했던, 나와는 인연이 없다고 밀쳐 두었던 뭔가를 잘할 수 있게 될지도 모른다. 숨어있는 재능을 찾아낼지도, 잊었던 기쁨을 발견하게 될지도 모른다. 삶은 매 순간 모습을 바꾼다. 산다는 게 참 신기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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