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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나는 여행에서 향하는 여행으로

모네의 정원

by 라문숙

혼자 여행을 떠난 적이 있다. 대학교 1학년 가을 학기 기말고사를 앞두고 문과대 로비 게시판에 내 이름이 붙었다. 어떤 장학금인지 지금은 기억나지 않지만, 아무튼 그 명단에 내 이름이 있었다. 뜻밖에 생긴 그 돈으로 나는 기차표를 샀다. 평소 학교에 들고 다니던 가방에 옷과 세면도구를 챙겨 넣었다. 어디를 갈 것이며 어느 곳에서 잠을 잘지 계획도 없었으나 염려도 불안도 없었다. 엄마는 내가 방학 중에도 외삼촌 집에서 계속 머물며 학교 도서관에 다닐 것으로 알았을 것이고, 외삼촌 내외는 방학이니 당연히 집에 가는 것으로 알았을 터였다. 당돌한 열아홉 살이었다.


일주일 동안 진주 남강, 남원 광한루, 안동의 도산서원, 강릉 경포대를 돌았다. 가능하면 기차를 오래 탈 수 있는 곳으로 다음 목적지를 삼았다. 모르는 이들과 함께 있는 것, 그게 내가 혼자 있을 수 있는 가장 완벽한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부산하고 소란한 기차 안, 기차가 역에 설 때마다 타고 내리는 사람들로 어수선하고 시끄러웠으나 나는 그 모든 소음과 움직임에서 떨어져서 평온하고 고요하게 혼자 있었다. 기차가 한 역에서 움직이지 않고 몇 시간 동안 서 있어도 조바심이 나거나 답답하지 않았다. 간혹 어디 가느냐 왜 가느냐 묻거나 삶은 밤이나 귤을 건네는 이들도 있었지만, 그들도 곧 나를 놔주었다. 그때 내게 가장 필요했던 건 내 주변에 고인 침묵이라는 걸 설명 없이도 알아줬던 그들이 지금도 고맙다.


겨울바람은 가슴속까지 들어와 휘몰아쳤고 발은 시렸다. 그러나 그 여행은 강의실과 시험과 리포트가 사라진 ㅇㅇ대학교ㅇㅇ학과 누구누구란 옷을 버스정류장 옆 꽃집 큰딸이란 옷으로 갈아입어야 할, 뭘 해야 할지 몰라 불안한 마음을 들키고 싶지 않았던, 그래서 학교와 집, 친구들과 가족에게서 떠나 홀로 있고 싶은 마음이 벌인 일이었다. 그러니 혼자 떠나야 했고 어디로 갈 것인가가 중요하지 않았으며 뭘 해도 상관없었다.


여행은 일주일 만에 끝이 났다. 슬슬 고단하기도 했던 데다가 돈도 떨어져 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어딘가로 떠난다는 건 마음만 가지고 되는 일이 아니라는 걸 그때 알았다. 다가가는 것과 멀어지는 것의 차이, 어딘가로 향하는 것과 어딘가에서 떠나는 것의 차이를 너무 일찍 알아버렸을까? 그 겨울 여행 이후로 나는 한동안 ‘여행’이라는 단어를 떠올리지 않고 살았다. 내 첫 여행이 그러했으므로 내게 여행은 언제나 그렇게 무언가로부터 도망치는 것이었다. 그래서 결혼 후에도 휴가를 떠날 때는 항상 집에서 멀어지는 것에 방점을 찍었고, 집에서 했던 모든 일을 까맣게 잊고 싶었다.


당연히 내게 여행이란, ‘집’이라는 단어로 대표되는 일상에서 멀어지는 것이었다. 보이는 나를 벗어나 숨어버리는 것이고, 여행을 끝내고 집으로 향하는 것은 다시 돌아오는 것이었다. 그런 내게 여행이란 단어가 실제로는 ‘일이나 유람을 목적으로 다른 고장이나 외국에 가는 일’을 뜻하며 필연적으로 어딘가를 향한다는 속성을 가졌다는 것, 그러하므로 당연히 설렘과 기대가 따른다는 걸 보여준 그림책이 [모네의 정원에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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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네아처럼 모네가 그림을 그렸던 정원을 직접 보고 싶어서 파리에 간다는 식의 여행이란 마치 내가 [제인 에어]나 [폭풍의 언덕]을 읽고 나서 하워스에 가보고 싶다고 하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 그건 마치 다른 세계로 가는 여행 같아서 나는 함부로 기대하거나 희망하지도 못할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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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여행도 있구나 싶었다. 여행이란 건 어쩌면 인상파의 그림을 보는 것과 같지 않을까? 짧지만 빛나는 순간의 인상을 만나려는, 무엇이든 반짝이는 순간이 있고 그건 발견하는 자의 차지가 된다는 것 말이다. 내게도 집을 떠나기만 하는 여행이 아니라 어딘가에 도착하는 여행을 위한 몫이 남아있는지 궁금해졌다. 리네아가 파리에 다녀온 것을 알게 된 친구들은 리네아에게 에펠탑은 어땠는지 묻지만 리네아는 에펠탑을 볼 시간은 없었다고, 에펠탑보다 훨씬 중요한 것들을 봐야 했다고 대답한다. 파리에서 에펠탑을 보는 것보다 중요한 그 일은 지베르니에 있는 모네의 정원에서 수련이 자라는 연못을 보러 가는 것이었고, 그곳에 있는 일본식 다리에서 연못을 바라보는 일이었다.


“지베르니에 다녀오지 않았다면 내일 지베르니에 가면 좋을 텐데.”

“같은 일을 두 번 할 수도 있단다. 그게 아주 특별한 일이라면 말이다.”


사람 사는 게 다 거기서 거기 아니겠느냐고 남편은 이야기한다. 바람은 저 아랫동네에서 우리 집 마당까지 매일 불어오는데 굳이 경비를 들이고 시간을 내서 하워스라는 듣지도 보지도 못한 시골까지 찾아갈 게 뭐냐는 거다. 브론테 자매가 여태 살아 있는 것도 아닌데 비행기 타고 날아가서 말도 통하지 않는 사람들과 손짓 발짓하며 스트레스를 받아야 하느냐는 그에게 무라카미 하루키의 글을 읽어줬다. 하루키도 비슷한 질문을 받았던지 한 여행기에 이렇게 썼다.


소소한 기념품 말고는 몇몇 풍경에 대한 기억뿐이다. 그러나 그 풍경에는 냄새가 있고 소리가 있고 감촉이 있다. 그곳에는 특별한 빛이 있고 특별한 바람이 분다. 뭔가를 말하는 누군가의 목소리가 귓가에 남아있다. 그때의 떨리던 마음이 기억난다. 그것이 단순한 사진과 다른 점이다. 그곳에만 존재했던 그 풍경은 지금도 내 안에 입체적으로 남아있고, 앞으로도 꽤 선명하게 남아 있을 것이다. 그런 풍경들이 구체적으로 어떤 쓸모가 있을지는 아직 알 수 없다. 결국은 대단한 역할을 하지 못한 채 한낱 추억으로 사라져 버릴지도 모른다. 그러나 원래 여행이란 그런 것이 아닐까. 인생이란 그런 것이 아닐까.

무라카미 하루키, [라오스에 대체 뭐가 있는데요?] p. 181~1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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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생각하면 열아홉 살일 때 어떻게 그런 마음을 먹었는지 신기하다. 지금의 나를 봐서는 시간을 되돌린다고 해서 그토록 겁 없고 무모하고 용감할 수 있을지 자신이 없다. 내가 써버렸던 시간, 마음껏 낭비하고 탕진해버렸던 일주일, 살면서 그렇게 완벽하게 혼자일 수 있는 편안하고 자유로운 날들을 또 만날 수 있을까? 무엇으로부터 떠났던, 떠나는 자체로 완벽했던 여행은 이미 오래전에 경험했으니 사정이 허락한다면 어딘가로 향하는 무엇인가를 위한 여행을 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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