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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앞으로 오지 않은 편지를 읽다

리디아의 정원

by 라문숙


고등학교 때 나란히 앉았던 친구는 내게 매일 편지를 썼다. 학교 매점에서 파는, 검은 선이 그어진 편지지를 빽빽하게 채운 편지였다. 짝은 내 옆에 앉아서 쓴 편지를 접어 편지 봉투에 넣고 봉한 다음 내 주소와 이름을 적고 우표를 붙였다. 가까이 앉아 있어도 내게 편지를 바로 전해주는 날은 없었다. 친구가 하굣길에 편지를 우체통에 넣으면 다음 날 수업을 마치고 집에 갔을 때 예의 그 편지가 도착해 있었다. 편지에는 어제의 친구 마음이 들어 있었고 내 오늘의 마음 역시 편지 봉투에 담겨 내일의 짝에게 배달되었다. 누가 누구에게랄 것도 없이 맹렬하게 편지를 쓰던 시절이었다.


언제부턴가 편지를 주고받지 않게 되었으나 여전히 읽는 것은 좋아한다. [채링크로스 84번지], [키다리 아저씨], [건지 아일랜드 감자 껍질 파이 클럽] 같은 책들을 읽고 있노라면 어느새 내가 편지를 쓰는 사람 혹은 받는 사람처럼 입술을 오므리고 웅얼웅얼 읽고 있는 걸 발견한다. 내가 읽고 있는 것은 단순히 책을 주문하는 짧은 편지이거나 장학금을 받는 대신 써야 하는 의무로서의 편지, 작가적 호기심을 충족시키고자 쓰는 편지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나는 어쩐지 그들이 편지에 적은 단어와 문장 뒤에 숨겨 보낸 감정들을 찾아낼 수 있을 것 같았다. 누가 사랑에 빠졌는지, 얼마나 보고 싶은지, 염려와 불안으로 잠 못 이루는 밤이 얼마나 긴지를 말이다.






[리디아의 정원]에는 리디아가 쓴 열두 편의 짧은 편지가 들어있다. 짐 외삼촌에게 쓴 첫 번째 편지를 제외한 나머지 편지 어디에서도 우울하거나 슬픈 이야기를 찾아볼 수 없다. 그러나 그림책이 펼쳐 보여주는 세계는 아름다우면서도 우울하고 슬프다. 편지 속 리디아는 꽃을 키우고 빵 만들기를 배우는 것에 온통 정신이 팔린 듯 보이지만, 나는 리디아의 다정하고 솔직한 편지를 한 장씩 읽을 때마다 리디아가 생략한 이야기들이 페이지마다 슬그머니 모습을 드러내고 있음을 놓칠 수 없다. 방금 도착한, 앞으로 살게 될 빵집이 있는 골목에 관하여 리디아는 이렇게 쓴다.


보고 싶은 엄마, 아빠, 할머니,

가슴이 너무 떨립니다!

이 동네에는 집집마다 창밖에 화분이 있어요!

마치 화분들이 저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보입니다.

우리는 이제 봄이 오기만 기다릴 거예요.

할머니, 앞으로 제가 지내며 일할 이 골목에

빛이 내리비치고 있습니다.

1935년 9월 5일

모두에게 사랑을 담아서, 리디아 그레이스

추신, 짐 외삼촌은 잘 웃지 않으세요.


자동차에서 방금 내린 리디아가 빵집 앞에 서 있다. 붉은 벽돌 건물 틈으로 보이는 어둡고 좁은 골목에 빨래가 걸려있고 자동차 사이로 사람들이 희미하게 보인다. 색깔 없이 건조하고 우울한 골목이다. 자세히 보이지는 않지만, 사람들의 표정도 시무룩하니 지쳐 있을 것이다. 리디아는 이제 이곳에서 좀처럼 웃는 법 없는 짐 외삼촌과 함께 살아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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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도 리디아는 우울해하거나 의기소침해지는 대신 빈 화분들과 빵집 건물에 내리비치는 햇살을 편지 속에 풀어놓는다. 꽃 가꾸기를 좋아하는 리디아 눈에는 다가오는 봄에 꽃으로 채울 수 있는 빈 화분들이 자기를 기다리고 있던 것처럼 특별하게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이제 부모님과 할머니는 빈 화분에 담은 리디아의 봄을 기다리는 마음을 나누어 가진 채 다음 편지가 도착할 때까지 함께 기대하며 설렐 것이다. 그녀의 편지에는 그런 힘이 있다.


어린 소녀 리디아가 움직일 때마다 작은 꽃들이 피어난다. 빈 화분들이 꽃으로 채워지고 어두운 골목길이 환해지고 빵집에 사람들이 모여든다. 어쩐지 외삼촌의 얼굴에도 곧 웃음이 피어날 것 같다. 리디아가 뭔가 굉장하고 어마어마한 음모를 꾸미는 동안 색깔 없는 골목길의 삶에도 조금씩 색이 더해진다. 리디아가 가꾼 작은 꽃들이 만들어낸 색이다. 마침내 리디아가 황량하게 버려진 옥상을 비밀정원으로 바꾼 날 짐 외삼촌의 놀란 표정이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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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디아의 편지들은 짧다. 그러나 자세하다. 작은 꽃씨 몇 알만큼 짧지만, 문장을 들여다볼수록 씨앗이 품고 있는 잎과 꽃들의 풍성함만큼 자세하다. 리디아가 혼자 기차를 타고 집을 떠날 때, 집으로 돌아와 할머니와 함께 바구니를 들고 빛이 환한 들판으로 걸어갈 때 꽃씨 봉투들이 떨어진다. 꽃씨 봉투는 편지 봉투처럼 생겼다. 그렇다. 리디아의 편지 속 단어들은 꽃씨였다. 꽃들은 어려운 시절에도 앞으로 나아가기를 멈추지 않는다. 리디아가 엄마 아빠 할머니에게 배운 아름다움을 담아 정원을 만들어낸 것처럼 아름다운 것들은 가난과 슬픔을 이길 힘을 갖고 있다. 꽃씨가 그렇고 편지가 그렇다.






집안에서 마당으로 나갈 때마다 버릇처럼 심호흡을 한다. 갇혀 있던 것도 아닌데 나가면 숨통이 트인다. 마당 식물들을 눈에 담으며 몇 걸음만 걸으면 물처럼 고여있던 생각들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한다. 읽을 것, 공부할 것, 정리할 것, 쓸 것, 연락할 사람, 버려야 할 물건들, 기억해야 할 약속들이 파노라마처럼 지나가고 나면 거기 내가 하고 싶은 일, 내가 보고 싶은 사람, 내가 가고 싶은 곳이 보인다. 잠깐이라도 틈이 날 때마다 옥상에 만든 비밀 정원을 돌보러 가는 리디아의 마음이 이랬을 거라고, 그곳에 올라서서 할머니와 엄마와 아빠를 마음껏 그리워했을 거라고, 두고 온 뜰의 향기와 바람을 기억했을 거라고, 외삼촌 얼굴에 떠오를 미소를 그려보며 꽃에 물을 주고 벌레를 잡아주었을 거라고, 다음번 편지에 전할 기쁜 소식을 만들기에 골몰했을 거라고, 아마 울기도 했을 거라고, 때로는 외롭고 겁나고 불안하기도 했을 거라고, 그 마음들을 외면하는 대신 모두 끌어안고 엄마 아빠 할머니가 가르쳐준 대로 아름다움을 담아내려 노력했던 것을 알 것 같다.


그러니 나도 멈추지 않을 거라고, 느리지만 조금씩이라도 나아지려고 애쓸 거라고, 삶은 원래 그런 거니까. 황량한 옥상이 꽃으로 뒤덮이고 무뚝뚝한 외삼촌이 웃기 시작하고 썰렁했던 골목길 작은 빵집에 손님들이 몰려들고 리디아는 집으로 돌아갈 것처럼, 리디아가 할머니와 다시 만나 햇볕이 쏟아지는 뜰에서 다시 일을 시작하는 것처럼 나도 그렇게 다시 시작할 수 있어서 얼마나 다행이냐고 안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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