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장. 너에게 나를 맡겨

너는 영광의 항구에 이를 것이다. - 단테 -

by 청연
2장. 너에게 나를 맡겨
- 너를 만나러 가는 길, 밀리터리 하이웨이
- 조지아, 너에게 나를 맡겨
- 단 하루, 가이드로 '머리 올린' 날
- 나는 여행 연출가가 되리


너를 만나러 가는 길, 밀리터리 하이웨이


카즈베기에 가고 싶어요!

큰 맘먹고 장거리 현장답사를 계획했다. 트빌리시는 워낙 많이 걸어서 트빌리시를 벗어난 관광지들을 직접 답사해보려는 것이었다. 특히 조지아의 하이라이트라고 명성이 자자한 카즈벡 산 Mt. Kazbeg과 그 가는 길, 밀리터리 하이웨이 Military Highway는 꼭 봐야 할 것 같았다.


무려 해발고도 5,047m의 카즈벡 산을 볼 수 있는 마을의 정식 명칭은 ‘스테판츠민다 Stepantsminda - 성 스데반이란 뜻’였는데 현지에서는 카즈벡 산의 이름을 따라 가볍게 ‘카즈베기 Kazbegi’라고 불렀다. 특히 트빌리시에서 카즈베기 가는 길을 ‘조지아 밀리터리 하이웨이 - 옛 군사 도로’라고 하는데 조지아에서 가장 아름다운 길 중 하나라고 해서 기대가 컸다.


그런데 거길 어떻게 가지?


아무래도 대중교통을 이용하면 교통비는 적게 든다. 하지만 조금이라도 귀동냥해서 배우려면 현지 가이드가 동행하는 일일 투어 프로그램에 참가하는 게 좋을 것 같았다. 그래서 트빌리시 시내에 일일 투어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현지 여행사 몇 곳을 방문해 보고 한 여행사에서 참가비를 내고 신청서를 작성했다.


“여권을 주시겠어요? 복사해둬야 하거든요.”

“네? 여권요?”

역시 외국에서는 여권이 생명이다. 마침 비상용으로 들고 다니는 여권 사본이 있어 그걸로 제출했다. 여권은 소중하니까!


신청서 작성이 끝나자 여행사 직원이 친절하게 여행 일정을 브리핑해 주었다.


“카즈베기 가는 길에 구다우리 Gudauri에 있는 조지아-러시아 우호조약 기념 조형물을 잠깐 탐방하고, 최종 목적지인 카즈베기까지 왕복하는 프로그램입니다. 출발 시간에 절대 늦으면 안 돼요!”


일정 내내 러시아어 가이드가 동행한다고 하니 배울 게 많을 것 같아 기대가 컸다. 이상하게도 구소련 국가에 있을 때는 영어보다 러시아어가 편했다.


3년 동안 줄곧 듣고 썼던 언어라서 그런가?


내 뒤에 있던 여행객도 같은 프로그램을 선택했다. 아무래도 여러 여행객이 모여서 함께 승합차로 함께 가는 프로그램이다 보니 편의보다는 ‘싼 맛’에 많이들 찾는 것 같았다.


할 말은 하고 사는 속 시원한 외국인?

들뜬 마음으로 미리 챙겨둔 지도와 출력해둔 자료들을 챙겨서 출발 지정장소인 자유의 광장 Liberty square으로 이동했다. 출발 시간에 절대 늦지 말라고 해서 서둘러 걸었더니 일찍 도착해도 너무 일찍 도착했다. 한참 지나 하나둘씩 여행객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는데 생각보다 모인 사람들이 많았다.


역시 이래서 저렴한 거였어...
미니버스에, 저 많은 인원이 다 탈 수 있나?


승합차는 만석이었고 러시아어 가이드는 조수석 뒤쪽에 걸터앉아 여행객들들 향해 오프닝 멘트를 시작했다. 지금은 여름이 절정으로 치닫는 7월 말. 날씨도 더운데 차 안 가득한 여행객들이 품어내는 열기를 차량 에어컨이 감당하지 못했다. 나는 땀이 삐질삐질 나도 참고 있는데 유럽에서 온 여행객이 차라리 창문을 열자고 강력하게 건의했다. 대부분의 동의하에 창문을 열었고 외부 공기가 들어오니 바람은 후덥지근하긴 했지만 그래도 좀 살만했다. 이번에는 저 외국인이 아주 잘 제안했다. 산소부족으로 고통받던 모두를 살렸으니...

생각해보면, 대부분의 외국인은 자기 의사 표현을 참 잘하고 산다. 그래서 가끔은 당황스럽고 속으로 얄밉기도 하지만 때론 ‘솔직하게 자기표현을 할 줄 아는’ 그들이 부럽기도 하다. 어찌 보면 해외 생활 가운데 ‘예의’와 ‘체면’을 잘 구분하는 것은 너무도 중요하다. 체면 꼭 나쁘다곤 할 순 없지만 과하면 결국 속이 많이 곪게 된다. 때로는 그런 사소한 것들 때문에 이민 생활의 고비를 맞기도 한다.


밀리터리 하이웨이를 달리다

트빌리시를 벗어나 한 시간을 좀 넘게 달려 산길로 접어드니 제법 공기가 시원해졌다. 우리와 동행한 러시아어 가이드는 이동하는 중간중간 조지아 역사와 문화 이야기들을 해주었다. 문제는 버겁게 달리는 자동차 엔진 소리와 바람 소리에 묻혀 도저히 알아들을 수가 없다는 것. 아무래도 온전히 집중해 설명 듣는 것은 불가능했다.

문득 핸드폰에 담아둔 자주 듣던 음악이 생각나서 조심스레 이어폰을 연결했다. 뭐라는지 들리지는 않지만 열심히 설명하는 가이드에게 조금 미안해서 잘 보이지 않게 한쪽 귀에만 이어폰을 끼웠다. 좋아하는 음악이 잔잔한 음악이 흘러나왔고 설명을 꼭 듣겠다는 욕심을 버리니 마음도 편해졌다.


음악을 들으며 지나가는 풍경을 보고 있으니 문득문득 떠오르는 지난 몇 년의 여정들이 또 새롭게 다가왔다. 첫 이민기, 좌충우돌했던 사업기, 가발 공장 매니저 그리고 이제 가이드까지... 참 다양하고 다이내믹한 길을 걷고 있다.


두 시간 좀 못되게 달려 아라그비강 Aragvi river에 댐을 설치해서 생긴 코발트 빛 진발리 호수 Zhinvali lake에서 잠시 휴식 시간을 가졌다. 현지 가이드는 빙하가 녹아내린 물이 모인 거라고 했다. ‘카즈벡’은 ‘얼음이 덮여있는’이란 뜻이라면서 카즈벡 산 정상 부근이 빙하 지역이라고 했다. 빙하, 빙하수... 이런 내륙국가에는 어울리지 않은 단어 같은데 빙하수라고 생각하니 왠지 호수가 더 시원해 보였다.

몸바사는 게들의 천국, 조지아는 견공들의 천국

트빌리시 시내에서도 참 많은 개를 봤는데 너무도 순수한 영혼들이었다. 낯선 길을 걸을 때마다 낯선 이방인을 졸졸 따라다녔던 그들은 공격성이 ‘제로’에 가까웠다. 역시 이곳에도 개들은 널려있다. 한 여성 여행객이 어슬렁거리는 개들을 보고 겁내자 현지 가이드가 공격성이 없으니 전혀 걱정할 일 없다고 달랬다. 단지 손으로 빵이나 먹을 것만 직접 주지 않으면 물릴 일 없다면서... 정말 맞는 말이었다.


“여기 개들은 정말 순해요. 카자흐스탄에 떼로 몰려다니는 개들은 가끔 사람을 공격해서 물기도 하거든요!”

(실제 지인이 당한 사례다. 그런데 병원에 치료차 갔더니 자초지종을 들은 의사 왈, ‘당신을 물은 개를 잡아 오시오!’)


옆자리에 앉은 여행객과 서먹한 침묵을 깨고 처음 나눈 이야기는 그 안 겪었던 ‘개’들에 관한 정말 웃기고도 슬픈 이야기였다.


반유목생활을 해왔던 산악인인 조지아 사람들에게 양치기 개들은 그야말로 친구 같은 오랜 반려견이었다. 그러니 개라고 부르기보다 ‘견공’이라고 불러줘야 격에 맞겠다 싶다.


진발리 호수가 품은 아나누리 성채 / 밀리터리 하이웨이
진발리 호수 Zhinvali lake는 햇살이 좋은 날 코발트색으로 여행객을 환영해 준다.
그 아름다운 색은 빙하 움직이면서 그 속에 부서져 유입된 작은 돌가루들이 빛에 반사되어 그렇다.

아나누리 성채 Ananuri Fortress Complex는 AD 13c부터 이 자리를 지켜왔다. 400년 원수인 두 가문이 결국 누구도 온전하게 차지하지 못했던 비극을 간직한 비극의 성채다.
문득 인간 최고의 미덕, 용서와 관용의 의미를 되짚어 보게 한다.


자, 지금부터 ‘점입가경’입니다


여기서부터 카즈베기까지 2시간 길이 조지아에서 가장 아름다운 길입니다!


가이드가 자신 있다는 듯 힘주어 강조했다. 우리 차는 중세의 아나누리 성채를 지나 아라그비강을 따라 북으로 북으로 달려갔다. 가이드가 말했던 것처럼 아나누리를 지나면서부터는 확실히 지나온 풍경보다 조금씩 더 자연 그대로의 자연에 가까운 풍경이 펼쳐지기 시작했다.


오, 저기 양 떼들 좀 봐요!


시원하게 흘러가는 강 옆길과 초목이 자라는 빈들을 따라 한가로이 풀을 뜯으며 줄을 지어가는 양 떼가 보였다. 카자흐스탄에서도 양을 많이 보긴 했었지만 여기 양들은 또 다른 느낌이었다. 좀 더 ‘촉촉한 느낌’이랄까?

구글 내비게이션을 켜고 어디쯤 가고 있는지 중간중간 체크하고 있었는데 파사나누리 Pasananuri라는 마을을 지날 즈음에는 돼지 가족이 도로 위 갓길을 따라 걷고 있었다. 어미돼지를 따라 새끼돼지 네 마리가 졸졸 따라가는 모습이 어찌나 귀여운지. 집돼지가 이렇게 귀엽게 보인 건 처음이었다. 소, 말, 양 심지어 돼지까지! 조지아는 정말 모든 가축을 다 방목했다.


돼지 절벽 타다. 직접 보기 전엔 믿을 수 없는 풍경
‘클래스’가 다른 조지아 집돼지
조지아 샤틸리 Shatili 여행 중 만난 집돼지들은 놀랍게도 절벽을 타고 뛰어다녔다.
정말 ‘신선한 충격’ 그 자체였다.


돼지와 개 중 누가 더 똑똑할까요?


가이드가 돌발 퀴즈를 냈다. 당연히 개가 더 똑똑할 것 같은데 문제를 내는 의도가 있지 싶어 선뜻 대답을 못 했다. 여행객들 사이에서도 돼지인지 개인지 의견이 분분했다. 과연 누가 더 똑똑할까?


“돼지가 더 똑똑합니다!”


정말? 의외의 답이었다. 조지아 집돼지는 아침에 집을 나가서 버섯이나 도토리 같은 것을 알아서 찾아 먹고, 해가 질 때면 집도 아주 잘 찾아온다고 했다. 과연 실제 IQ도 그럴지 조금 의심스러웠지만, 일단 가이드의 말을 신뢰하기로 했다.


나중에 기억이 나서 동물 아이큐 순위를 검색해 보니, 돼지 아이큐가 무려 65~70 정도 된다고 한다. 개 아이큐보다 평균 5~10이 더 높았다. 그동안 우리 속에 갇혀있는 돼지만 보고 너무 과소평가했다. 결론적으로 돼지는 생각보다 똑똑하다!


아라그비 협곡, 그리고 구다우리 그 숨 막히는 절경

강줄기를 따라 아라그비 협곡으로 차가 들어서니 가파른 사행길 언덕에서 아래로 내려다보이는 풍경은 그야말로 예술이었다. 높은 산들 그 아래 산 중턱 초지에서 풀을 뜯는 양과 말 그리고 소들... 무리의 구분은 있지만, 다툼 없이 조화로운 모습...


‘Peace’ 정말 이럴 때 쓰는 게 아닌가?


어느 여행자가 조지아를 ‘스위스’에 견주었었는데, 스위스를 가보진 않았지만 그곳은 어떤 느낌일지 상상이 됐다. 알프스 산맥에 스위스가 있다면 코카서스 산맥에는 조지아 있다!


깎아지는 듯한 구불구불한 절벽 길을 돌고 돌아 정상 부근에 올라서니, 장엄하게 펼쳐지는 풍경에 여행객들은 하나같이 탄성이 쏟아냈다.

“아직 일러요!”

가이드는 회심의 미소를 띠면서 아직 대 코카서스 산맥의 지류일 뿐이니 ‘탄성 지르기’는 참아 달라고 농담을 했다. 오늘은 현장답사를 나왔는데 현장 감탄만 하고 가는 것 같았다.


스키 리조트로 유명한 '구다우리 Gudaruri' 마을을 지나면서 ‘상부 구다우리 Upper Gudaruri’라는 지명 표지판이 보였다. 바로 그 표지판을 지나자마자 절벽 휘감는 아슬아슬한 사행 길과 앙상한 뼈대로 오픈된 아주 오래된 터널을 지났는데 기사 조금만 실수해도 천 길 낭떠러지로 떨어질 듯한 협로였다. 이 길은 정말 스릴감을 주는 웬만한 놀이기구보다 더 스릴 있었다.


터널을 지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조지아-러시아 우호조약 기념 조형물'에 잠깐 차를 멈추었다. 사실 대형 모자이크 조형물도 조형물이지만 아래쪽 절벽으로 펼쳐지는 절경에 탄성에 탄성을 거듭했다. 정말 대 자연의 웅장한 예술 그 차제였다. 전망대 난간에 기대어 풍경을 둘러보는데 해발 고도가 2,300m 가까이 되다 보니 여름인데도 서늘한 바람이 불어왔다.


구다우리 전망대에선 본 가을 풍경

트빌리시는 한여름인데 여기는 초가을쯤 되는 것 같았다. 풍경도 공기도 어느 것 하나 빠지는 게 없었다. 저 위쪽 언덕에서는 패러글라이딩하는 사람들이 절벽으로 힘차게 도움닫기 해서 비행을 시작했다.

순간 밀려드는 부러움!

아, 저건 조지아 버킷리스트다!


전직 조종사로서 즉시 감이 왔다.


그간 인생 마지막 순간에 서고 싶은 곳을 찾아 헤맸다. 오늘 그곳을 발견해 너무 기쁘다. - 무명 손님 --


우리는 조지아 밀리터리 하이웨이의 피크인 해발 2,395m의 즈바리 패스 Jvari pass(십자가 고개)를 넘어 카즈베기 마을까지 한 40분 되는 마지막 구간을 정차 없이 달렸다. 저쪽 산 중턱에 어마어마한 수의 양들이 풀을 뜯으면서 대이동을 하고 있었다. 말로 다 설명하기 이 어려운 광경은 마치 컴퓨터의 윈도 바탕화면 같았다.


놀라운 것들을 보았지.
새롭고 날카로운 마치 꿈꾸는 것 같은 느낌.
구름도 거대한 절벽 위에서 하룻밤 묵어가는 곳.
조지아 밀리터리 하이웨이 그것은 시였고 놀라움이었고 환상적인 이야기들이지...
혹시 8,000ft 상공에 있는 너를 상상해 볼 수 있어?
지금 상상하고 있지?

- 안톤 체호프 Anton Chekhov가 1888.8.12., 즈바리 패스에서 쓴 편지(작가 번역) 중 -




조지아, 너에게 나를 맡겨


So Lucky!

예상했던 것보다 날씨가 훨씬 좋았다. 카즈베기 마을로 들어서면서부터 만년설이 덮인 카즈벡 산 정상이 깨끗하게 보였다. 웅장하고 성스럽게 느껴지는 산. 마침내 그 앞에 서게 됐다.


아...


한눈에 담기는 감동적인 첫인상에 말을 잠시 있었다.


조지아의 대작가 알렉산더 카즈베기 동상, 그 너머로 츠민다 사메바 Tsminda Sameba(성 삼위일체) 교회, 그 너머로 병풍 같은 카즈벡 산과 대 코카서스 산맥. 그야말로 완벽한 ‘삼위일체’였다!


신이 허락하시다

산 중턱을 지나가는 구름과 어우러지는 만년설 봉우리의 느낌이 너무도 시원했다. 오는 길에 가이드가 만년설과 빙하지대인 카즈벡 산 정상은 ‘신이 허락해야만 볼 수 있다’고 했는데 과연 오늘은 흔쾌히 허락하신 것 같다.


가이드는 마을에 도착하기 전부터 카즈벡 산 중턱에 있는 츠민다 사메바 교회에 사륜구동 차량으로 오를 사람을 파악했었는데 물론 주저 없이 손을 들었다. 별도의 비용을 지급해야 했는데 비용이 문제겠는가? 차를 타고 비포장 산길을 삼십 분 정도 올라가 교회에 도착하면 삼십 분 정도 자유시간이라고 했다.


아, 겨우 30분이라니...


일일 투어다 보니 이런 절경을 여유롭게 즐길 수 없는 게 못내 아쉬웠다.


대부분의 여행객이 사메바 교회를 오른다고 신청해서 삼삼오오 사륜구동 승합차에 올라타고 해발고도 2,170m에 있는 사메바 교회로 향했다. 기사들은 마치 ‘카레이서’ 같이 앞 다투어 질주하기 시작했는데 기사들의 레이스는 덥수룩하고 거친 수염만큼이나 거칠었다. 마치 황야의 무법자 같았다. 곧 왜 그토록 앞서가려 하는지 알게 됐다. 마른 비포장 길이라 앞차에서 날리는 먼지가 뒤따르는 차들을 완전히 덮었다.

“에어컨을 좀 켜면 안 되나요?”

“안 돼요.”


창문을 닫고 달리니 답답해서 조심스레 부탁해 보았지만 단호히 안 된다고 했다. 등반 경사가 심해서 차가 무리하면 엔진 과열로 냉각수를 쏟아내면서 멈춰 선다면서... 기사는 미안했는지 내려오는 길에는 꼭 틀어주겠다고 했다. 이제 선택은 창문을 열고 먼지를 잔뜩 먹거나 창문을 닫고 더위를 참거나 둘 중 하나. 우리 일행은 차라리 먼지를 먹는 쪽을 택했다. 일단 살고 봐야지!


아무리 사륜구동 승합차지만 정말 이런 길을 오를 수 있나?


그저 경이로웠다. 교회로 올라가는 길은 어찌나 경사가 심하고 험한지 이러다 차가 뒤집히는 건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지금은 아쉽게도(?) 고생스레 올라가야 했던 길이 아스팔트로 잘 포장되어 있다.) 비가 얼마나 왔었는지 비포장 길이 깊게 팼고 굴러 내려온 돌들로 베테랑 기사들도 구간 구간 거북이 운전을 해야 했다. 그렇게 삼십 분 남짓 부지런히 언덕길을 오르니 어느 순간 고원 평지로 올라섰다.

그리고 눈앞에 펼쳐진 환상적인 그 광경!



푸르른 초지에 나지막이 핀 야생화들이 한들거리고 저쪽으로는 말들이 한가로이 풀을 뜯고 있었다.

시선을 들어 멀리 보니 절벽 끝에 걸려있는 듯 우뚝 서 있는 투박하지만 고풍스러운 중세 교회...

그저 보이는 모든 게 아름다웠다.


가자, 가자 어서 가자!


초원으로 난, 가르마 같은 길을 달려 교회 아랫자락 주차장에 도착했는데 급한 마음에 승합차에서 제일 먼저 뛰어내렸다. 어서 정상으로 올라가 보고 싶어 언덕 위 교회로 난 언덕길로 걸음을 재촉했다. 주어진 시간 30분. 조금이라도 더 둘러보려면 서둘러야 했다.


이제 거의 다 왔다. 힘내자!


교회 내부를 빨리 한 바퀴 돌아보고 마을이 내려다보이는 절벽 같은 돌담 위에 걸터앉았다. 하늘 같은 이곳에서 내려다보는 저 낮은 세상. 해발 4,500m 돌산 아래로 평화롭게 자리 잡은 마을을 내려다보고 있으니 감동이 용솟음쳤다. 아랫마을 쪽에서 산을 타고 불어 올라오는 서늘한 바람이 머리를 날려 눈을 감고 잠시 바람을 느꼈다. 마음이 고요하고 평화로웠다. 평안함에 심장 뛰는 소리가 마저 들리는 것 같다.


혹, 여기에 오려고 지난 4년을 돌고 돌았을까?


지나온 기억들이 바람같이 스쳐 지나갔다.

지난날을 위로하듯 나를 쓸고 지나가는 바람, 그리고 낮은 속삭임.


그동안 고생했어. 여기까지 오느라...


잠깐이었지만 남은 삶을 결정할 만큼 확고한 생각이 들었다.


나는 여기, 조지아에 살겠다!


교회 내·외부에 서서 무슨 연고인지 그토록 간절히 기도를 드리는 사람들처럼, 나도 간절한 한 가지 바람을 기도로 묻어 두고 내려왔다.


허락하신다면, 이곳에 살게 하소서...




교회 돌담에 걸터앉으면 내려나 보이는 마을 풍경


힘들었던 지난날

‘나의 별 따르기’를 포기했었다면

그 '희망'을 포기했었다면

지금 이곳에 서있지 못했을 것이다.


늘 꿈꾸던 곳

늘 동경했던 곳

어떤 이가 마지막에 다시 서고 싶다 했던 곳

마침내 나는 그곳에 섰다.


나는 그곳을 살고 있다.




자유를 연상케 하는 말과 신성한 카즈벡 산


트빌리시로 돌아 내려오는 길, 생애 가장 완벽했던 하루

즈바리 패스로 향하는 길, 흩어서 뿌린 구름 같은 양 떼와 하늘하늘 손짓하는 빨간 개양귀비 꽃이 다시 새로웠다. 바라보기만 해도 미소 짓게 되는 풍경이었다.


언제고 가이드를 시작하게 되면 함께 이 길을 걸을 손님들에게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
산들바람 같은, 편안한 휴식 같은 사람. 그 가이드가.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노래가 나도 모르게 흥얼거려졌다.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꼭 보여주고 싶은 또 들려주고 싶은 오늘이다.





살아가는 이유


꿈을 꾸는 이유


모두가 너라는 걸


네가 있는 세상 살아가는 동안


더 좋은 것은 없을 거야


어느, 잊지 못할 멋진 날에...


- ‘시월의 어느 멋진 날에’ 중 -








단 하루, 가이드로 ‘머리 올린’ 날


마운트에 설 기회가 생각보다 빨리 왔다


“하루 일정만 가능할까요?”


열심히 공부하고 있던 한날, 현재 투어 인솔 중인 가이드 선생님의 일정이 중복되어 하루만 대신해서 손님을 모실 수 있겠냐고 물어왔다. 그동안 열심히 준비하셨으니 충분히 가능할 것으로 본다는 말씀에 순간 힘을 얻어 겁도 없이 “네. 가능합니다.”라고 대답해 버렸다.


막상 전화를 끊고 나니 걱정이 밀려왔다. 아직 며칠 남았으니 미리 하루 일정을 받아서 열심히 준비하면 가능할 것 같긴 한데, 아직 가이드로서의 나 자신을 믿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잘할 수 있을까?


사실 그랬다. 은근 욕심쟁이인 나는 ‘잘’하고 싶었다. 이왕이면 칭찬받고 사랑받는 가이드로 첫 데뷔 무대를 꿈꿔왔었다. 그런데 생각보다 무대에 설 기회가 너무 일찍 와버렸다. 비록 하루 일정이긴 하지만.

바로 사무실에 방문해 전체 투어 일정과 내가 맡게 될 할 하루 일정을 설명 듣는데 심장이 막 두근거렸다. ‘긴장감과 설렘’이 교차하는 두근거림이었다. 일정표를 받아 든 내 손이 살짝 떨렸다. 무척 긴장하고 있는 내 손이 보였을까? 지사장님이 기운 돋는 한마디를 보태 주셨다.


처음부터 너무 잘하려고 하면 오히려 실수합니다.

너무 긴장하지 말고 준비한 대로만 차분히 해보세요.


사무실로 나올 때는 나온 김에 간단하게 장까지 보고 들어가려고 했었는데, 막상 일정표를 손에 쥐니 빨리 뭐라도 준비해야 할 것 같아 곧장 집으로 돌아왔다.


‘D-day’ 준비 : 숙고, 잘 준비된 대본, 그리고 커닝 페이퍼


어떤 이야기부터 꺼낼까?


빽빽이 정리해둔 노트와 자료들을 몽땅 꺼내 책상 위로 올렸다. 그동안 차곡차곡 정리해둔 이야기보따리 중에서 가장 의미 있고 흥미로울 만한 몇 가지 주제를 선정하는 것만도 한참이 걸렸다.


조지아에 어떤 관심과 기대를 가지고 오시는 걸까?

조지아에 첫발을 들이면서 가장 흥미롭고 관심이 갈만한 이야기는 뭘까?

손님들이 들어 가치 있을 만한 이야기들은 뭘까?...


고민은 되지만 그나마 이야기 주머니가 커져서 하루 분량은 충분히 나눌 수 있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물론 손님들에게 조리 있고 맛깔나게 잘 전달할 수 있을지는 아직 의문이지만...


‘D-day’가 가까워질수록 학창 시절 시험 전날 벼락치기하는듯한 긴박한 마음이 들었다. 아무래도 암기력에는 한계가 있었다. 횡설수설하지 않으려고 노트에 다시 흐름을 재정리하고 다시 포스트잇에 주제별로 키워드들을 선정해 조금 큼직하게 써 옮겼다. 이 노란색에 검은색 글씨로 눈에 잘 띄게 적어둔 포스트잇들은 이것들은 말문이 막힐 때 사용될 비상용 ‘커닝 페이퍼’였다. 그러니 힐끗 봐도 눈에 잘 들어오는 샛노란 바탕에 흑색 글씨가 가장 좋았다. 일어선 채로 책상 모서리 끝에 이 키워드 포스트잇을 실전처럼 커닝해 보았는데 위치만 익숙해지면 확실히 한 번에 눈에 들어왔다. 좋아, 됐어!

다음 단계로 거울 앞에 서서 같은 주제로 몇 번씩 실전 같은 ‘주제 강연’ 연습을 해보았는데 정말 어색하고 부자연스럽고 매끄럽지 못했다. 알고 있는 것보다 잘 전달하는 것이 훨씬 더 어렵다는 게 새삼 느껴졌다. ‘음. 음.’ 목청을 가다듬고 자연스럽게 혀에 익고 입에서 나올 정도를 목표로 하는 밤샘 리허설이 이어졌다. 그러다 부자연스러운 부분을 수정하고 다시 읊어보고... 마지막 리허설이 끝날 무렵엔 동이 트려고 했다. 왠지 목표를 향해 최선을 다해 준비하고 있는 새벽에는 뿌듯함이 밀려왔다.

마침내 ‘D-day’, 가이드 머리 올리는 날

신발을 아주 반짝거리게 닦고 옷매무시를 가다듬었다. 타고난 외모를 바꿀 순 없지만 좋은 첫인상을 드렸으면 좋겠다 싶어 신발장 옆 거울에 얼굴을 비추고 몇 번이나 미소를 연습해 보았다.


아, 콧대가 조금만 더 높았더라면 역사가 바뀌었을지도 모르는데...


유난히 낮은 태생적 콧대를 손으로 몇 번 세워보며 다시 제자리로 돌아가는 콧대의 아쉬움을 뒤로한 채 집을 나섰다.


약속된 장소에서 투어를 돕는 현지 가이드를 만나 인사를 나누었는데 아주 잘생기고 석학인 친구였다. 조지! 그의 이름도 역시 조지였다. 아제르바이잔에서 조지아로 육로 국경 Lagodekhi border을 넘으시는 손님들을 맞이하러 내리 2시간 반 거리를 달렸고 버스로 이동하는 내내 준비한 원고를 읽고 암기했다. 버스 안에서 책을 보면 늘 멀미를 심하게 했는데 긴박하니 멀리도 잊어버렸다. 참 신기한 일이었다.


늦지 않으려고 일찍 출발한 탓에 국경에 도착해보니 아직 손님들이 도착하기까지 한 시간 반 정도 여유가 있었다. 막상 국경에 도착하니 준비했던 원고는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국경 건물을 보고만 있어도 긴장되는 탓에 화장실만 몇 번을 다녀왔는지 모른다.


Mr. Daniel(현지 닉네임), are you OK?


조지는 내가 건강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했는지 화장실을 계속 왔다 갔다 하는 나를 불안해했다. 기다리는 한 시간이 왜 그리 길게 느껴지는지... 초조, 긴장, 불안 등 ‘매’ 맞기 전 증상이 한꺼번에 몰려왔다. 역시 매는 빨리 맞는 편이 낫다.


아, 저기 국경을 넘어오시네!


8월 중순, 뜨거운 햇빛을 받으면서 손님들이 조지아 국경으로 한 분씩 도착하기 시작했다. 무더위에 벌써 땀이 범벅이 되신 손님들을 벌써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아... 이 침체된 분위기를 어쩌나...


투어는 아직 시작도 못했는데 온 더운 날씨와 터질 듯 팽팽한 긴장감으로 몸이 땀으로 홀딱 젖어 버렸다.


몸에 익은 습관, 변화가 필요해

일정상 두 곳의 방문지가 있었는데 무난하게 탐방을 마치고 트빌리시로 출발하기 전 잠깐 자유 시간을 가졌다. 그런데 그때 한 70대 즈음으로 보이는 한 여성분이 내게 다가왔다. 괜찮으면 잠깐 얘기 좀 나누자고 하셨는데 혹시 실수한 게 있나 싶어 살짝 불안했다.


선생님, 가이드 경험은 많이 없죠? 혹시 전에 군인이었어요?


“아, 네. 어떻게 아셨죠? 둘 다 맞습니다.”


이분은 마치 점쟁이처럼 내 과거와 현재를 꿰뚫어 보셨다.

“제가 100개국 이상을 여행하면서 참 많은 가이드 분들을 만났어요. 그러다 보니 가이드들에게 들었던 이야기가 많이 중복되어 가이드의 멘트에 잘 집중하지 않는 편입니다. 그런데 오늘은 가이드 선생한테 처음 들어본 얘기도 있고 많이 배운 것 같아서 좋았습니다. 여기 같이 여행 온 사람들도 적게는 50개국 가까이 여행을 다녀본 사람들이니 나랑 비슷한 생각일 겁니다...”


“아, 네. 과찬이십니다. 감사합니다.”


칭찬이신 건가? 의외의 말씀에 조금 안도가 됐다.


“다만 마치 군인이 이야기하는 것처럼 딱딱하게 들려요. 내가 여자라 군대는 안 갔지만 마치 군대에서 브리핑하는 느낌? 조금만 더 부드럽게 말을 다듬으면 훨씬 더 잘 전달되고 듣기에도 좋을 것 같아요."

첫 가이드 피드백을 이렇게 듣게 될 줄은 생각지 못 했다. 조금 부끄럽기도 했지만 경륜 있으신 분이 진심으로 조언을 해주시니 달게 느껴졌다. 군복을 벗은 지 벌써 5년. 십 년을 넘게 군 복무하면서 굳어진 군대식 습관과 어투 ‘다, 나, 까!’ 그동안 많이 부드러워지고 소위 ‘사제, 민간화’ 되었다고 생각했는데 손님들의 눈에 비치는 내 모습은 여전히 군인 같은 사람인 것 같았다.


길을 발견한 단 하루, 그 운명의 순간

단 하루라는 ‘초단기 처녀 가이드’ 경험은 내가 힘써 가야 할 길을 발견한 의미 있는 시간이었다. 나에게 ‘딱 맞는 새 옷’을 입은 것처럼 말씀을 나누는 내내 희열 그리고 만족감 솟아났다. 그 소중한 발견이 내가 걸어야 할 길에 확신을 주었다.


그래! 이 느낌이야!




마침내 나는 길을 발견했다.

가슴 뛰는, 무척 설레는 그런 길을 발견했다.

그 길을 열심히 걸어보려 한다.



[사람을 만나다]


길 위에서 만난 사람


조지아에 살면서 우연한 기회로 만나 교제하게 된 한 중년의 화가이자 시인인 선생님이 있다. 그는 말도 통하지 않는 곳에서 무려 1년이란 시간 동안 조지아 온 전역을 종횡무진하면서 이방의 낯선 땅을 온몸으로 담아낸 분이었다. 가끔 그분을 떠올릴 때면 그분의 그런 삶, 그 자체가 '예술 Art'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긴 여정을 마치고 한국으로 귀향하시는 날 배웅 차 공항으로 동행 한 길 위에서 헤어짐의 아쉬움으로 나누었던 그분과의 마지막 대화는 오랫동안 여운으로 남았다.


그림에 미친 듯이 살았어요. 미친 듯이...


그림은 그의 직업이자 꿈이자 삶의 이유인 듯했다.

마치 사춘기 소년의 ‘일탈’같이 생면부지의 땅을 찾았던 그의 ‘열정 Passion’ 에는 그림뿐만 아니라 원초적 꿈에 대한 설렘과 사랑이 가득해 보였다. 무엇보다 중년이라는 무심한 세월의 담 넘어 군더더기 없는 마치 ‘날것 같이 거칠고 생생한 꿈’을 추구할 수 있는 그 내면의 젊음이 참 아름다워 보였다.



결코 그리지 않은 그림 - 고흐의 편지에서


고흐가 말했지

‘가장 아름다운 그림은 침대에 누워

파이프 담배를 입에 물고서 꿈꾸는,

그러나 결코 그리지 않는 그림인지도 모른다고’


나는 가을이 길을 가다 멈춘

창밖이 보이는 소파에 누워

그리지 않는 그림을 그려보네...


- 시인, 화가 한희원 -


결코 꿈꾸지 않았지만 그동안 꾸었던 꿈보다 더 꿈같은 이곳 그 꿈같은 현실을 살아가는 지금,

내게 다가온 시인의 노래는 특별했다. 이내 쉬이 마음을 빼앗겨버렸다.


이미 이루었지만 아직 완성하지 못한 꿈.

그 꿈을 좇아 오늘도 한 점 한 점, 한 선 한 선을 외 붓으로 그려간다.


시인의 노래처럼

내게 주어진 팔레트에 물감이 다 할 때까지

오늘을

내일을

그리고 마지막을,

끝내 '결코 그리지 않는 그림'까지 그려 보려 한다.




나는 여행 연출가가 되리


<내가 쓰는 인생 4막>
- 시놉시스 : 삶, 그 단편 여행
- 제목 : 환희 Great Glee 歡喜


‘작전 명령서’를 작성하다

무더위가 기승을 정점에 달하는 팔월 하순 마침내 고대하던 첫 번째 그룹이 배정되었다. 회사에서 어렵게 준 첫 기회이니만큼 성공적인 데뷔를 약속했다.

100%의 목표를 이루려면 120%를 계획하고 준비하라.


대학 시절 존경했던 경영학 교수님의 말씀이 떠올랐다. 지금 내게 필요한 단 하나의 문장 같았다.


일과를 30분 단위로 끊어서 나눌 이야기들과 동행하는 현지 가이드가 해야 할 일들을 꼼꼼히 체크하고 리스트를 만들었다. 좋은 풍경에 어울릴만한 연주곡들도 준비하고 조지아를 사랑했던 러시아 국민시인 푸시킨의 시도 한 수 준비했다. 욕심이 과한 것 같기도 하지만 계획대로만 된다면 성공적인 8박 9일의 무대가 연출될 것 같았다.


이번에 호흡을 맞출 현지 가이드는 조지. 지난번 '하루 가이드' 때 봤었는데 오늘도 함께 호흡을 맞추게 되었다. 아무래도 안면이 있는 친구니 반갑고 마음이 편했다.


내가 편집한 투어 일정표를 보고 문제 있으면 얘기해 주세요.


국경으로 달리는 버스 안에서 조지에게 따로 세세하게 작성해온 일정표와 체크리스트를 건넸다. 30분 단위로 끊어서 계획한 빽빽한 조지아 5일간의 타임라인! 그 작전 명령서를 하달받은 조지는 찬찬히 읽어보더니 안색이 조금 변했다.


Mr. Daniel! You are like a Swiss watch!


그는 나를 보면서 ‘한 치의 오차도 없는 스위스 시계’ 같다면서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신도 당신 시간표에 맞춰 주시려면 스트레스 좀 받으시겠어요!


가수 박진영, 토크 쇼 호스트 자니 윤, 아나운서 전현무 그리고...

국경에서 손님들을 받아서 첫 목적지로 출발했다. 출발하면서 가이드와 스텝을 소개하고 본격적으로 이야기를 시작하려는데 앞쪽에 앉으신 한 여성분이 한 말씀 던지셨다.


“우리 가이드 선생님, 야구선수 추신수하고 많이 닮았네!”

“어머, 진짜 그러네!”


옆자리와 뒷자리에 앉아 계신 분들도 고개를 복도 쪽으로 내미시며 정말 많이 닮았다며 맞장구를 치셨다. 학창 시절에는 가수 박진영을, 대학 시절 살이 빠졌을 때는 토크쇼 호스트 쟈니윤을, 최근에는 아나운서 전현무를 닮았다는 얘기를 들어 보긴 했지만 추신수는 처음이었다. 미국 메이저 리그 텍사스 레인저스 추신수 선수! 다행히 좋은 이미지였다.

“네. 사실 추신수가 제 동생입니다.”

그렇게 어색한 분위기를 깨는 아주 어설픈 농담으로 우리 투어는 시작됐다.


그런데 조지아에 온 지는 얼마나 되셨어요? 참 멀리도 오셨네.


분위기가 좋아서일까?

무언 갈 설명할 틈도 없이 질문 공세가 시작됐다. 더욱이 예상치 못했던 질문에 순간 당황이 됐다. 솔직하게 두 달밖에 안 됐다고 말씀드리면 혹시 불안해하실까 봐 고민이 됐는데 그렇다고 거짓말을 할 수도 없었다.


아, 네. 조지아에 온 지는... 일 년이 조금 덜됐습니다.


아주 정확하진 않지만 그렇다고 거짓말도 아닌 애매한 대답을 드리고 빨리 주제를 전환시켰다. 긴 일정을 나에게 맡기셔야 하는 손님들께는 그게 더 안심되셨을 것이다.

여행, 추억을 공유한 우리가 되어 가는 길


'시간의 묘 妙'랄까?


함께 한 여행이 일주일을 넘어서면서부터는 점점 ‘우리’가 되어갔다. 우리는 같은 곳을 보며 함께 달렸고, 예쁜 거리를 함께 걸었고, 와인보다 더 진한 추억을 함께 공유했다.


긴 여정의 마지막 밤. 아르메니아의 한 고급 호텔에서 마지막 체크인을 도와드리고 방 열쇠를 한 분씩 나눠드렸는데 하나같이 벌써 내일이면 한국으로 돌아가야 하니 아쉽다고 하셨다. 각자의 방으로 올라가시는 분들의 뒷모습을 보고 있으니 그 긴 여정을 어떻게 지나 여기까지 왔는지 신기하기만 했다. 그런데 마지막까지 로비에 남아계시던 남성분이 갑자기 내 팔을 잡으셨다. 그분은 여행 일정 동안 은은한 미소를 뗘주셨던 참 조용하셨던 분이셨다.


그런데... 어디서 그렇게 한국어를 잘 배웠어요?


“네?” 이게 무슨 말씀이신지...(이 사건은 실화다.) 지난번에 고려인 이야기를 깊게 나눈 적이 있어서 아무래도 고려인으로 오해하신 것 같았다. 아니면 정말 동남아 사람처럼 생겨서 그럴 수도 있고...

아무튼 어떻게 이런 충격적인 오해를 하셨는지 알 수는 없지만 진지하게 물어보시니 웃으면서 대답을 드렸다.

아, 네. 한국에서 배웠습니다. 사실 한국 사람이니까요!


나만의 색을 가진, 여행 연출가가 되리

손님들을 배웅하고 집으로 돌아오는 버스 안, 이상하게도 심장이 다시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뭐지? 왜 다 끝났는데 심장이 다시 뛸까?


두근거리는 심장을 달래며 머리를 의자에 기대고 눈을 감았다. 바짝 긴장했던 몸도 이제 모두 끝났다는 안도감에 스르르 풀려버렸다. 그리고 잠시 꿈꾸듯 생각에 빠졌다.


나만의 색깔은 뭘까?


일전에 20년 가까이 여러 나라와 대륙을 종횡무진하며 가이드했던, 심지어 겸손하기까지 해서 무척 존경스러운 선배 가이드에게 몇 가지 조언을 구한 적이 있었다. 그 오랜 세월 가이드를 했으니 정말 웃기고, 아주 슬프고, 엄청 황당했던 에피소드들이 정말 많았다. 그런데 마지막에 그가 결론같이 들려준 말은 새내기 가이드에게 성공적인 가이드 지침을 주는 것 같았다.


무엇보다 자기만의 색깔을 가지도록 노력해 보세요.
처음에는 다른 유능한 가이드들을 보고 배우는 것도 좋겠지만
남들과는 다른, 자기만의 스타일과 색깔을 만들어 가는 게 가장 이상적입니다.




유쾌 가이드?... 음 그건 좀, 뭔가 너무 가벼워...

지식 가이드?... 음 그건 좀, 뭔가 느낌이 부족해...

음... 여행 연출가? 그래 여행 연출가가 좋겠다!

깊은 감동으로 안내하는, 울림과 떨림이 있는 여행 연출가!

울림과 떨림이 있는 그 사람, 그 여행 연출가!


대한민국, 카자흐스탄, 케냐 그리고 조지아.

짧은 인생이었지만 어느덧 인생 4막이 열리고 있다.


내가 쓰는 인생 4막은 이랬다.

시놉시스는 ‘삶, 그 단편 여행’, 제목은 ‘환희 Great Glee 歡喜’








keyword
이전 17화1장. 너의 별을 따라가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