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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주희 May 21. 2022

담임교사와 피해자 사이

 “최oo 어디 있어요?”

 “oo이는 왜 찾아?”

 금요일 아침, 1반 아이 둘이 손을 잡고 우리 반 adhd 학생인 유명이 이름을 불러 찾았다. 알고 보니 등굣길에 유명이가 둘 중 하나를 신발주머니로 팔과 다리를 몹시 때렸다고 했다. 다른 한 명은 그저께 수요일에 컴퓨터실 근처 복도에서 목을 졸렸다고 했다.


 오랜 가정 폭력으로 인한 이혼으로 증거의 중요성에 숙달된 나답게 동의를 구하고 녹음기를 켰다. 유명이는 이미 지난 화요일에 교실에서 우리 반 남자아이 하나의 이마를 계속해서 때려 내가 몸으로 막은 일이 있었다.


 1반 아이의 설명은 이러했다. 핸드폰을 새로 사서 하나가 남는데, 그걸 유명이에게 줄까 아니면 다른 친구에게 줄까 문구점에서 얘기 중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점점 이야기하다보니  핸드폰을 유명이에게   같지 았고, 유명이는 화가 났다. 그러고 보니 지난주인가 유명이가 했던 말이 기억났다. 집안에 핸드폰과 아이패드, 컴퓨터를  부숴버렸다고 했었다. 화가 나서. 그때  아이의 변화를 알아챘어야 했는데.


 피해 학생이

 “네가 여기 여기를 때려서 아팠어.”

 라고 말할 때, 녹음한 내용을 교과 시간에 다시 들을 때 전남편에게 맞던 나를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이성을 잃고 사정없이 주먹질을 하던 유명이에게 맞고 있던 건 순간적으로 나였다. 하지만 나를 때린 건 유명이가 아니라고, 얘는 아이일 뿐이라고 나 자신을 달래야 했다. 나는 선생님이니까. 하마터면 그 애에게 큰 소리를 지를 뻔했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어 어머니를 학교로 호출한 게 바로 그 전날이었다.

 “그래도 우리 아이가 많이 참고 있다는 걸 알아주세요.”

 라며 눈물을 흘리는 엄마의 모습에서 시어머니의 얼굴이 떠올랐다. 팔은 더럽게도 안으로 굽는다. 이미 시작하며 상대 학부모가 걸면 학폭 사안이 충분히 된다는 걸 설명했기 때문에 더 미주알고주알 말하지 않았다.

 “제가 왜 oo이를 미워하겠어요.”

 하지만 사실은 미워할 수 있었다. 누구보다 더.


 그렇게 긴급 호출로 학부모 상담을 한 지 몇 시간 만에 또 등굣길에 다른 반 아이를 때리는 일이 생기다니. 역시나 집에서 아무런 교육이 안 이루어진 게 분명했다. 전남편의 폭력에 어찌할 수 없었던 무기력이 오랜만에 다시 찾아왔다. 2017년 가을이던가, 태어난 지 얼마 안되는 아이들에게 손찌검을 한 후 크게 반성하며 그는 이제 매일 아침 절 수련을 하겠다고 했었다. 야심 차게 절 할 때 쓸 푹신하고 커다란 회색 방석까지 샀지만, 나는 그가 절하는 모습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처음이 어렵지 한 번 시작된 폭력은 좀체 브레이크를 걸기 힘들다. 그런 면에서 그 아이는 전남편과 같은 전철을 밟게 될 가능성이 높다. 그 과정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유감스럽게도 없을 것이다. 아니, 무엇을 해도 막을 수 없다는 게 더 정확한 표현일 거다.

 상대 친구가 맞을 짓을 했기 때문에 맞아도 싸고, 더 나아가 죽어도 싸다는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그 애를 보며 소름이 돋았다.

 “세상에 반 이상이 나쁜 사람이에요. 강도, 강간, 살인 같은 게 얼마나 많은지 아세요?”

 ‘열 살밖에 안된 너는 도대체 어쩌다 이렇게 되었니.’

 형이 자기를 때린다고 했다.

 “형이 때릴 때 네 기분이 어때?”

 “안 좋죠.”

 “그런 안 좋은 기분을 너도 주는 사람이 되고 싶어? 너도 그런 나쁜 사람이 되고 싶어?”

 누구나 다른 사람에게 맞으면, 살고자 하는 가장 원초적인 본능이 깨어난다. 나는 그 아이의 심연에 살고 있는 어둠을 알아보았다. 그것은 이전에 내 안에 살기도 했던 같은 종류의 어둠이었으므로 알아보기에 어렵지 않았다.

 동시에 그 아이에게서 전남편을 본다.

 그리고 나는 괴롭다. 나를 해하려 했던 자의 얼굴을 그 아이에게서 보면서도 그 아이를 안아주어야만 했다. 그 아이를 안으며 나 자신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 문제는 앞으로도 얼마나 많이 그래야 하는지 모른다는 거다.




 “우리 아이가 많이 참고 있어요.”라고 말해 사태의 심각성을 좀 더 알려드려야 했던 어머니께 첫 번째 녹음 파일을 지체 없이 보내드렸다. 그러자 오늘 아이가 약을 안 먹고 갔다며 남편을 보내 바로 데리고 오겠다고 하셨다. 죄송하다는 말과 함께. 아이들끼리는 서로 충분히 대화와 화해를 시켰다. 유명이는 겉보기에 어느 정도 진정이 되어 내가 있는 동안은 괜찮을 것 같았는데 4교시에 교과 시간이 있어 나도 조금 걱정이 되기도 했다. 결국 유명이는 그날 1교시를 끝으로 조퇴를 했다.


 오후에 친정 엄마께 전화가 왔다. 요즘 학교 생활이 힘들다고, 유명이 이야기를 했다.

 “어머나, 그렇게 힘들어서 어쩌니. 그래도 우리 딸 하는 일은 잘 될 거야.”

 아무 도움이 되지 않는 말이었다.

 “그런데 지난번 네 생일 때 보니까 우리 딸 이중턱이 보기 싫던데, 유튜브 보고 좀 없애는 거 따라 해 볼래? 맨날 피부 관리만 다니지 말고. 엄마도 보고 따라 하니까 효과 있는 거 같아.”

 만일 엄마가 유명이로 인해 되살아난 내 어둠을 조금이라도 눈치챘다면 그런 말을 할 수 없었을 거다. 부장을 맡고 있는 요즘 유튜브를 보며 그런 걸 따라 할 여유도 없다.

 또래에 비해 과하다 싶을 정도로 관리하고, 그래서 젊어 보인다. 좀 덜 해도 된다 싶을 정도로  적게 먹고, 늘 새로 나온 피부과 시술이 나오면 눈에 불을 켜고 찾아보는 나였다.

 그런데 이제 유튜브를 보며 그런 얼굴 마사지까지 따라 하라는 건가. 화가 난다.

 “엄마. 이제 예뻐져서 뭐해요?”

 “사람 일 모르는 거다, 너? 내가 나를 사랑해야지?”

 사람 일 모르는 거라니. 이건 무슨 소리일까. 재혼이라도 하라는 말일까. 벌써.

 ‘그런데 엄마는 왜 나를 있는 그대로 사랑해주지 않아요? 자기를 낳아준 사람에게서 조차 단 한 번도 있는 그대로 사랑받지 못한 사람이 퍽이나 스스로를 사랑할 수 있겠어요.’

 나는 그렇게 말하려다 그만둔다. 엄마와의 대화는 늘 지는 싸움이다. “다 너 잘되라고 그러는 거지.”라고 마지막에 방점을 찍으시면 그전에 한 모든 말이 뜻이 사라진다. 그래, 엄마는 잘되라고 내 결점을 지적한다. 나는 그 결점을 없애기 위해 노력한다. 하지만 이내 다른 결점이 엄마 눈에 띄기 마련이다. 그렇게 나는 누구에게도 마음에 쏙 들지 못하는 존재라는 걸 늘 매사에 기저로 깔고 살아간다. 지금은 이 메커니즘을 알기에 스스로를 토닥이려 애를 쓰지만, 알면서도 쉽지 않다. ‘괜찮은 나’에서 ‘부족한 나’로 넘어가는 간극이, 너무 좁다.


 너무 피곤했다. 세상에 누구 하나 내가 겪은 일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사실이.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그 애가 누구를 때리는 순간 나는 담임교사에서 가정폭력의 피해자로, 너무 급격한 롤러코스터를 타고 지상과 지하를 왔다 갔다 해야 했다. 그 변화 속도가 너무 빨라야 해서, 그 양쪽의 명암 차이가 너무 극명해서, 내가 보여야 할 자세와 아직도 남아있는 마음속 피해자의 심정이 너무 큰 차이가 있어서

 그리고 무엇보다 자발적으로 그 일을 해내야 해서

 그래서 너무 힘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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