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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주희 Jul 23. 2023

교실은 어떻게 좀비가 되었나

가정 폭력을 당했던 내게 서이초 신규 교사의 죽음은  남일 같지 않다.

같은 공간에 나를 해할지도 모르는 사람과 함께 있어야 하는 건 상상을 초월하게 불안하다. 쌍둥이가 갓난쟁이 때 남편이 처음 아이를 때렸는데,  순간너무나 놀랐지만 그 이외에 아기를 돌볼 이가 없었기에 바로 항의의 말조차 하지 못했다. 그러다 이내 나에게도 그 폭력은 번졌고, 나는 그와 함께하는 하루하루가, 그리고 특히 그가 하루종일 집에 있는 주말을 두려워하게 되었다.


2019년에는 교실에서 학생에게 폭행을 당했다.

그 아이는 당시 5학년이었는데, 입학 때부터 정서적으로 불안해 전교에 소문이 나있었다. 나는 고작 그 아이의 영어교과교사였는데, 시월쯤 되자 사춘기가 오던 그반 아이들 몇몇은 그 아이를 더 못 참고 곧 큰 싸움이 날 것만 같았다. 영어시간에 수업을 하기 어려울 정도가 되었고 나는 수업을 지속적으로 방해하는 그 빨간 잠바 아이에게 여러 번 시정을 요구했지만 담임 선생님도 두 손을 놓고 하루하루 보내기만 하던 그 반을 일개 교과교사가 바꿀 수는 없었다.

결국 모든 학생이 보는 앞에서 나는 그 아이가 던진 필통에 맞고, 목을 졸릴 뻔했고, 팔을 이로 물렸다.




남편의 폭력성으로 이미 정신과에 다니고 있었던 나는 긴급하게 다시 의사를 만났다. 대치동에 이름 있는 의사였다. 안 그래도 무너져가던 나는 가정과 직장 양쪽에서 온전하게 존재할 수 없는 위험에 노출된 셈이었다. 남편이 폭력성을 휘두르기 시작한 지 이미 일 년도 더 넘은 그때 우리 집은 더 이상 참지 않고 폭력 사안이 생기면 112 신고를 했었다. 경찰이 해줄 수 있는 건 생각보다 적었다. 오히려 남편이 역신고를 해 폭력에서 벗어나 집밖으로 도망가는 내게 "남편분이 아내가 가출한다"며 신고했다면서 행선지를 시시각각 전화하기도 했다. 자신이 먼저 손을 올렸으면서 말다툼 중에 욱해서 먼저 신고한 때도 있었다. 나는 요즘 학교폭력 가해 학부모들의 뻔뻔한 천태만상을 듣다 보면 전남편의 이런 어이없다 못해 분노를 부르는 행동들이 떠오른다. 자신의 잘못을 전혀 인지하려 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둘은 같다.


가정폭력을 몇 년간 당하며

나는 너무 외로웠다.

기본적인 인권을 박탈당하면서도 아무도 내 처지를 온전히 알지 못한다는 느낌 때문이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가까운 이들에게 "그냥 참고 살아."라는 말을 들을 리는 없다.

교실에서 폭력 사건이 터졌을 때도 그렇다. 쉬쉬하려는 관리자는 에 아이가 문 자국이 벌겋게 남은 채 교무실로 내려간 내게 "애들은 사랑으로 가르쳐야 하는데..."라며 대충 며칠 쉬다 오라는 소리를 했다. 그 말 한마디로 나는 졸지에 아이들을 제대로 사랑하지 않아 교실에서 손을 물린 교사가 되었다.

사과를 하겠다며 찾아온 학부모는 더 가관이었다.

"우리 애가 수업시간에 선생님께 그런 건 죄송합니다. 그런데 애가 그런 걸 알면 선생님께서 자극하지 마셨어야죠? 우리 애가 성적에 얼마나 민감한데." 아이 지도 때 성적 운운한 걸 꼬투리 잡는다. 내가 당시 가진 가장 최후의 무기가 성적 밖에 없고, 수업은 제대로 이뤄지지 않는데 그럼 어떻게 하라는 인가.


그 후 나의 집요한 요구로 교권보호위원회가 열리고, 서울시교육청으로부터 최초로 교권침해 후 병원비도 돌려받았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그반 담임인 선배교사의 무기력함을 넘어 아무것도 안 도우려는 태도에 더 충격을 받았다. 그 선생님은 정말 그 반을 그렇게 썩어가는 대로 보관만 하고 방관하고 계셨다.




그 일이 있은 후, 나는 학교에서 학생이 지나친 행동을 해서 문제가 있어웬만하면 학부모에게 알리지 않는다. 그렇게 해 보았자 대부분의 학부모가 그런 현실에 관심이 없다는 걸 그 사건으로 인해 뼈저리게 깨달았기 때문이다. 소위 금쪽이로 불리는 문제 학생의 학부모는 대개 자기 자식이 학교에 가서 수업을 방해하고 문제 행동을 하건 말건 관심이 없다. 그리고 그 사실을 안다 해도 걔를 고쳐 쓰는 건 자신의 몫이 아닌 교사의 일이라고 여긴다. 행여 교사가 그런 일로 전화라도 거는 날이면 "우리 아이를 미워한다"며 '교사는 모든 아이를 사랑해야지'라는 말도 안 되는 논리를 갖다 붙인다.


교육 현장은 병이 들 대로 들었다. 이렇듯 교실은 몇몇 감당이 전혀 안 되는 두세 금쪽이들로 인해 정상적인 운영이 어렵게 된 지 오래다. 전남편이 자신보다 약한 나와 아이들에게 선택적 분노장애를 일으킨 것처럼, 아이들도 교사가 자신의 털끝하나도 건드리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기에 교사의 말을 듣지 않는다. 외려 교사가 자신에게 부당한 표정과 말 한마디를 한 것 같으면 부모가 알아서 아동학대죄로 신고를 해준다. 그게 작금의 실태이다.


그리하여, 나는 말하고 싶다. 그렇게 큰 아이들이 어디가 정상이겠느냐고. 이렇게 아이를 망치며 키울 바에는 아예 처음부터 낳지 않는 편이 좋지 않았겠느냐고. 정상적인 아이들은 기를 못 펴고, 문제 아동과 그 뒤의 부모가 정신을 놓고 활개를 치는 대한민국의 교실은 회생불가의 시체를 너머 좀비가 되어버렸다.




젊은 날 피어보지도 못하고 교실에서 스러져간 선생님, 부디 그곳에서는 편히 쉬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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