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의 밑바닥이 하얘졌다. / 설국 / 가와봐타 야스나리
설국을 읽다
‘국경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자 눈의 고장이었다.
밤의 밑바닥이 하얘졌다. 신호소에 기차가 멈춰 섰다.’ p 7
일본의 정서를 아름답게 드러낸 수작으로 뽑히는 『설국』은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역작이다. 하나의 완결된 작품으로 구상된 것이 아니라 단편 ‘저녁 풍경의 거울’을 시작으로 비슷한 이미지의 단편들을 모아 중편 『설국』이 무려 13년의 시간을 지나 완성되었다. 『설국』은 작가가 영감을 받아 단숨에 써 내려간 작품이 아니며 서사에 치중한 작품이 아니다. 배경 묘사와 어우러진 인물의 심리 묘사가 이 작품의 두드러진 특징이다.
설국은 일본적 성향이 강한 작품이지만 시마무라와 고마코. 요코의 동선을 따라가다 보면 그들의 마음이 읽힌다. 해마다 겨울이면 설국을 읽는다. 설국을 읽는 계절이 따로 있을까 싶지만 눈이 펑펑 내리고 무릎까지 쌓이는 계절이 설국을 읽기 적격일 듯싶다.
설국의 공간적 배경은 나가타현의 에치고 유자와 온천 지구이며 개통한 지 얼마 되지 않는 시미즈 터널에서부터 시작된다. 한적한 곳의 온천장에서 게이샤로 살아가는 고마코와 기차에서 우연히 알게 된 찌를 듯 아름다운 눈을 지닌 요코, 시마무라의 관계가 『설국』의 핵심이다.
악기 연주와 춤을 가르쳐준 선생님, 선생님의 아들은 고마코의 잠정적인 약혼자였다, 동기로 팔려갈 때 배웅을 나온 사람. 고마코의 일기에는 그렇게 기록되어있다. 요코는 장결핵에 걸린 선생님의 아들을 사랑하는 여자로 그려진다. 시마무라를 배웅하러 나온 기차역. 숨도 못 쉴 듯 달려온 요코는 환자가 고마코를 찾으니 지금 바로 돌아가야 한다고 말하지만 고마코는 끝내 가지 않는다. 환자의 마지막 기록이 되어주어야 한다는 시마무라의 말까지 듣지 않는다.
시마무라가 처음 온천장을 찾았을 때 만난 고마코에 대한 인상은 ‘깨끗하다’였다. 눈처럼 새하얀 목덜미, 가끔 붉어지는 얼굴은 연 복숭아 빛이었다.
"연회가 있어 오지 못할지도 몰라요. 당신은 참 이상한 사람이야. 도쿄 사람들은 거짓말을 잘하잖아요.”
고마코는 술에 취해 비틀거리면서도 동백실의 시마무라를 찾아온다. 시마무라가 처음 고마코를 만났을 때 성적인 대상으로 다른 게이샤를 불러달라고 했던 것도 고마코에서 느껴지는 깨끗함 때문이었다.
화롯불 같은 정열을 애써 감추고 그 사랑으로 바득바득 다가오는 고마코에게 시마무라가 해줄 것은 하나도 없다. 고마코는 “다신 오지 말아요, 이제 가면 다시는 오지 말아요. 당신이 떠나면 난 이제 성실하게 살 거예요.”라고 말하면서도 시마무라를 본능적으로 기다린다. 반어와 모순... 고마코는 시마무라에게는 반어적 감정표현을. 잠재적 정혼자였던 그 남자에게는 모순된 감정을 드러낸다.
잠재적 정혼자의 치료비를 대기 위해 게이샤 일을 시작한 고마코와 죽어갈 것이 뻔한 그 남자의 치료에 온 정성을 쏟는 요코. 뜨거운 불을 감추고 사는 여자. 고마코가 화롯불 같은 여자라면 요코는 이글거리는 아궁이의 불꽃같다. 누군가를 위해 덧없는 헛수고를 반복하는 것이 고마코와 요코식 사랑법이다.
관성처럼 1년에 한 번 찾아오는 자신을 기다리는 고마코도 헛수고. 다 죽은 남자의 묘에 붙들려 떠나지도 못하는 요코의 삶도 헛수고. 시마무라에게 그녀들의 삶은 헛수고로만 보였다.
시마무라는 두 여인의 헛수고를 보며 이제는 더 이상 이곳에 와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한다.
/눈 내리는 계절을 재촉하는 화로에 기대어있자니 시마무라는 이번에 돌아가면 이제 결코 이 온천에 다시 올 수 없으리라는 느낌이 들었다. 여관 주인인 특별히 꺼내 준 교토산 옛 쇠 주전자에서 부드러운 솔바람 소리가 났다. 꽃이며 새가 은으로 정교하게 새겨져 있었다, 솔바람 소리는 두 가지가 겹쳐 가깝고 먼 것을 구별해 낼 수 있었다. 또한 멀리서 들리는 솔바람 소리 저편에서는 작은 방울 소리가 아련히 울려 퍼지고 있는 것 같았다. 사마무라는 쇠 주전자에 귀를 가까이 대고 방울 소리를 들었다. 방울이 울려대는 언저리 저 멀리, 방울소리만큼 종종걸음 치며 다가오는 고마코의 자그마한 발을 시마무라는 언뜻 보았다. 시마무라는 깜짝 놀라 마침내 이곳을 떠나지 않으면 안 되겠다고 마음먹었다. / p134
여인이 한 남자에 대해 갖는 열정은 눈처럼 차갑고 새하얀 것이면서 뜨거운 불처럼 달아오르기도 한다. 고치 창고 2층에 난 불로 요코가 인형처럼 아래로 추락하는 장면은 말 그대로 덧없는 아름다음의 극치를 보여준다. 아마도 요코의 무덤은 그 남자의 곁이 될 것이다. 요코는 끝내 이곳을 벗어나지 못하였다.
어떤 한 사람을 향한 마음이라는 것은 이토록 애처롭고 아름답다. 다른 투숙객들의 방에서 춤을 추고 노래를 부르며 교태를 부리면서도 여전히 시마무라에게 가고 있는 고마코의 마음 한 자락은 마음이 가는 길이며 마음이 만들어 낸 길이다. 결국은 죽음으로서 그 남자의 곁에 있게 된 요코의 삶도 마음이 만들어 낸 길이다.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설국』은 눈의 나라에 그려지는 새빨간 사랑의 언어들에 대한 헌사이다.
'설국'은 겨울의 시작을 알리는 책 중 하나다.... 어쨌든 12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