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셉 캠벨 <신화의 힘>을 읽는 시간
태초의 이야기꾼들 / 조셉 캠벨 <신화의 힘 > 제3강 부분
인디언들은 살아있는 모든 것을 ‘그대’라고 불렀다. 들소는 물론 나무, 돌 같은 모든 것, 이 세상 만물을 모두 ‘그대’라 불렀다. 이렇게 부르면 우리의 마음 자체가 달라지는 걸 실감할 수 있다. 2인칭인 ‘그대’를 보는 자아는 3인칭 ‘그것’을 보는 자아와 다를 수밖에 없다. 어떤 나라와 전쟁에 돌입할 때 언론이 노출시키는 가장 중대한 문제는 적국의 국민을 순식간에 ‘그것’으로 만들어버리는 것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권능의 사절이었던 동물은 이제 원시 시대의 인류를 가르치고 인류를 인도하지 않는다. 곰, 사자, 코끼리, 야생염소, 가젤 영양은 이제 동물원 우리에 앉아 있을 뿐이다. 석기시대 수렵민의 삶과 삶의 양식이 우리 육신을 형상 짓고 우리 마음의 얼개를 짜놓았는데도 그 수렵민의 세계는 우리의 육신에도 마음에도 남아있지 않다. 그러나 이 수렵민들의 동물 사절에 관한 기억은 우리가 광야로 나갈 때마다 깨어나 우리의 마음을 흔드는 것으로 보아 우리 안에 잠들어 있음이 분명하다.
-조셉 캠벨 < 금수의 권능을 찾아서 >
고대의 신화는 몸과 마음을 조화시킬 목적으로 빚은 것이다. 우리의 마음은 헛길로 들어서서 하느작거릴 수도 있고 몸이 바라지 않는 것을 바랄 수도 있다. 신화와 의례는 마음을 몸에 조화시키기 위한 수단. 자연이 가르치는 대로 삶을 자연에 조화시키기 위한 수단이다.
매장의례는 가시적인 삶 너머에 있는 다른 삶의 존재에 관한 관념, 가시적 차원 너머에 있는 다른 존재의 차원이라는 관념과 무관하지 않다. 어디선가 가시적인 우리 삶의 버팀목 노릇을 하는 불가시적인 삶이 있을 것... 이것이 신화의 기본적 테마를 이루는 관념이라 할 수 있다.
우리가 알지 못하는 것이 우리가 아는 것을 버티게 한다.
매장 의례의 목적은 개인을, 그 개인의 육신보다 훨씬 큰 형태론적 구조에 귀속시키는 것이다. 매장문화에는 친구는 죽었어도 다른 곳에서 계속 살 거라는 의식이 반영된 것이고, 이런 맥락에서 보면 내가 죽인 짐승도 죽는 것이 아니고 계속해서 살아있는 것으로 본다.
태고의 사냥꾼들에게는 동물신이 있어서, (즉 동물 중 가장 어른 동물) 무리 중 한 마리를 사냥꾼에 내어준다. 동물 세계와 인간 세계의 계약에 의한 것인데 내어준 동물이 단순히 사냥감이 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삶이 육신이 한계를 초월하면 회생의례를 통해 흙으로 돌아오던지, 어머니의 뱃속으로 돌아온다는 것을 전제로 내어주는 것이다.
사냥감을 죽이는 것과 관련된 사냥꾼의 의례가 있다.
사냥꾼은 사냥을 나가기 전에 산꼭대기 흙바닥에 자기가 장차 잡을 짐승의 모양을 그린다. 해가 뜨면 첫 햇살이 뜨는 산꼭대기에서 사냥꾼들은 의례를 베푸는데 햇살이 짐승의 그림을 비추면 사냥꾼들은 빛살을 따라 화살을 날려 짐승 그림을 명중시킨다. 무리 중 여자가 사냥꾼의 도움을 받아 손을 번쩍 쳐들고 소리를 지른 후 사냥꾼들은 사냥을 나가 짐승을 죽인다. 이때 사냥꾼이 쓰는 화살은 조금 전 짐승 그림을 맞추었던 바로 그 화살이다.
짐승을 잡은 사냥꾼은 다음날 아침 해 뜰 녘에 산으로 올라가 동물그림을 지우는데 이 의례는 내가 짐승을 잡은 것은 자연의 뜻에 따른 것이지 개인적인 의도는 아니다는 의미를 품고 있다.
<빨강 수집가의 시간> 제1부 빨강의 기억 : 과거로부터 온 편지 중에서
사냥 그리고 육식의 슬픔
우린 이제 아름다운 사냥감을 돌에 그리지 않는다
달구어진 불판이 날아갈 듯 앉아있다
부족의 창에 걸려든 작은 짐승
마지막 숨이 고요한 지층을 흔들 때
꽃잎 같은 긴 임종을 불 속으로 내던졌다
짐승들이 인간을 사냥하던 그때
저들도 심장을 올려놓은 돌 앞에 앉아 노래를 불렀을까
...
고독한 팔다리를 가진 족속에 대한 그리움으로
혀와 입술이 잠깐 얼어붙기도 했을까
그렇게 서로의 상처를 엿보는 슬픔 하나씩을 지니게 된 걸까
낄낄거리며 뜯어먹는 이 살점의 주인은
어쩌면 내 까마득한 날의 사랑일지도 몰라
...
유미애 < 사냥 그리고 육식의 슬픔 > 부분
언제부터인가 불판에 지글지글 구워지는 고기를 별로 좋아하지 않게 되었다.
그렇다고 고기를 일절 먹지 않는 채식주의자인 것은 더더욱 아니다.
빨간 핏물이 배어 나오는 고기를 썰어 미역국을 끓이고 뭇국을 끓이고... 조금도 주저함 없이 당면과 감자가 듬뿍 들어간 닭볶음탕을 만든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불판에 구워지는... 적당한 두께로 썰어진 붉은 고깃덩어리가 기름을 토해내며 쪼그라들며 검붉게 익어갈 때는 그것을 먹고 싶은 생각이 사라진다.
불판을 사이에 두고 마주 앉은 사람들... 기름진 얼굴, 빨간 불빛에 번득이는 얼굴색...
한 생명의 조각이 불판 위에서 지글거리며 쪼그라들 때면, 불판 위에서 몸부림치는 것을 바라볼 때면
조셉 캠벨이 그의 저서 <신화의 힘>에서 본래 ‘그대’였던 동물이 ‘그것’으로 전락하고 말았다는 생각이 퍼뜩 들곤 한다.
태초에 사냥을 할 때도 짐승의 우두머리와의 계약을 통해 한 마리를 사냥할 수 있고... 또한 그 사냥감의 최후를 존중해 주었다고 하지 않은가. 살생 없는 생존이란 불가능하다. 먹고 먹히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생존의 법칙.
동굴벽에 혹은 첫 햇살이 드리운 산꼭대기 바위 위에 동물(사냥감). 을 새기는 대신
우리는 불판 위에, 냄비 위에, 가스레인지 위에 새긴다...
날마다 반복되는 것, 희생 제의도 없는 당연한 사냥의 결과물로 말이다.
그래도 가끔은 캠밸의 말처럼 수렵민들의 동물 사절에 관한 기억은 우리가 광야로 나갈 때마다 깨어나 우리의 마음을 흔드는 것으로 보아 우리 안에 잠들어 있음이 분명할 지도 모르겠다.
우리가 알지 못하는 것이 우리가 아는 것을 버티게 한다
내가 알지 못하는 것은 얼마나 많은가.
나는 끝이 없는 배움의 세계에 살고 있다
알지 못하는 어떤 것. 초월적인 것이든, 영적인 것이든
눈에 보이지 않지만 실체를 알 수 없는 그 무언가가 나를 하루하루 버티게 해주는 것이리라.
3월 중순 날씨가 초겨울 날씨 같다. 산책을 하고 돌아와 보니 옥탑방 베란다의 동백화분이 쓰러져있다.
산책길에도 뿌리 뽑힌 채 넘어진 어린 단풍나무 한 그루를 보았는데....
창밖에 흔들리는 ‘그대’들이 보인다.
그저 묵묵히 서서 바람이 지나가기를 기다리는 ‘그대들’이 말이다.
‘그것’ 아닌 ‘그대’들과 더불어 살았던 태초의 이야기꾼들. 거룩한 사냥꾼들, 사람과 동등한 관계였던 ‘그대’들을 떠올리는 시간.
해가 지고 있다. 어둠이 내려앉는다. ‘그대’들의 목소리만 들려오는 시간
어디선가 태초의 이야기꾼들이 두런거리는 소리도..../ 려원
<빨강 수집가의 시간> / 수필과 비평사/ 려원 산문집/ 202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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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 아르코 문학나눔 우수도서 선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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