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장 수집가의 이야기

프롤로그: 꽃잎이 아닌 문장, 문장이 아닌 꽃잎

by 이다이구

저녁 11시, 외투를 챙겨 입고 집 밖으로 나왔습니다. 우리 집 바로 옆에는 동네 뒷산으로 연결되어 있는 산책로가 있습니다. 산책로를 걸으며 밤공기를 깊게 들이 마시니 어쩐지 축축한 공기가 들어왔습니다. 곧 비가 오려나 싶었습니다. 비가 오기 직전 저는 냄새로 알 수 있는데 이를 놀랍게 여기는 사람들이 더러 있습니다. 비가 오기 직전의 냄새는 어린 시절, 산골에 위치한 할머니 집의 앞마당 냄새와 비슷해 강한 노스탤지어를 불어 일으킵니다. 비가 오기 직전의 냄새를 모르는 사람은 전원의 노스탤지어가 없는 사람이지 않을까 조심스럽게 추측하고 있습니다.


오랜만에 마주한 꽃들이 신기해 쭈그려 앉아 관찰하는데 문득 한 시가 떠올랐습니다.


노트에 꽃잎을 올리니

시가 되었다


제 문장 수집 노트에 초록 잉크로 적혀 있는 시의 한 연입니다. 안리타의 시집, <모든 계절이 유서였다>의 "시"라는 시입니다.


문장수집용 노트, "필사 노트"


내가 바라보고 있는 이 작은 하얀 꽃의 꽃잎을 하나 똑 때서 제 노트 위에 올려보고 싶은 마음이 들었지만 이내 참기로 했습니다. 우리가 노트 위에 올려야 할 꽃잎은 내 눈앞의 꽃잎이 아니라는 걸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노트 위에 올려야 할 꽃잎은 오직 문장입니다. 꽃잎이 보이는 문장. 꽃잎보다 더 꽃잎 같은 문장. 그걸 노트 위에 올리는 것이 제 목표입니다. 목표라기엔 너무 비현실적이라 꿈이라고 해야겠습니다.


제 문장 수집 노트는 세상에서 가장 무거운 노트입니다. 이 노트에는 꽃잎도 있고, 사랑하는 사람도 있고, 행복도 있고, 친구도 있고, 고양이도 있고, 삶과 죽음, 그리고 신도 있습니다.


매일매일 한 문장 씩 수집하다 보면 어느새 노트가 세상만물로 가득 차집니다. 제 노트에는 서툰 아름다움이 가득 차 있습니다. 제 꿈을 이룬 위대한 사람들의 문장을 수집하고 배우다 보면 언젠가 그들처럼 되리라 하는 야망도 노트에 고스란히 남겨져 있습니다. 아름다움을 가득 가지고 있는 사람은 언젠가 아름다워지리라 생각하고 있습니다. 야망을 가득 가지고 있는 사람은 언젠가 꿈을 이우리라 생각해고 있습니다.


매일 문장을 수집하는 모습에는 떨림, 감탄과 감동, 그리고 위로가 있습니다. 수집된 문장을 오랜 시간 뒤에 다시 찾아볼 때는 다급함과, 갈망, 그리고 기쁨이 있습니다.


제 노트 위에 꽃잎이 올려지는 순간, 그 꽃잎으로 감동하는 순간, 위로받는 순간을 기록합니다.


아, 그래서 결국 비가 내렸습니다. 본래 비 맞기를 좋아하는 사람이고, 못 견딜 정도로 많은 비가 쏟아지진 않아서 천천히 보슬비를 맞으며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돌아와 문장 수집 노트에서 "시"를 다시 찾아 읽었고, 문장 수집가의 이야기를 쓸 계획을 세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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