_아버지, 그리고 사람들.
그러나 자식들은 부모가 한 명이든 두 명이든
죽을 때까지 자식노릇하느라 이기적일 수밖에 없다.
나는 내가 생각한 이상적인 틀에 내 부모님을 맞추려 했다.
그러다 보니 부모님의 부족한 면만 보였다.
그리고 내 딸이 나를 향해 이상적인 부모상을 그리는 모습에
강박적인 육아를 해왔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엄마와 난 많이 멀어졌다.
엄마는 두 명의 남편을 만났고, 헤어졌다.
친아버지는 사별이고, 새아버지는 이혼이다.
나는 언제나 친아빠가 궁금했다.
엄마를 통해 듣게 되는 아빠에 대한 기억과 사진이 내가 아빠를 저장하는 전부였지만,
엄마가 기억하는 아빠는, 사별 후 급격하게 사이가 나빠진 시댁에 대한 트라우마로 뒤덮여있었다.
아빠를 그리워하던 작은 아버지는 우리를 볼 때마다 술기운에 찬 호통으로 많은 사람들을 괴롭히다
결국 자살하셨다.
그래서 나는 엄마나 친척이 기억하는 아빠 말고,
그냥 한 사람으로서의 아빠는 어떤 사람일지, 무한히 상상했던 것 같다.
늦은 나이에 시나리오를 공부하면서
아빠가 탈영병 총에 맞아 돌아가셨다는 진실을 알게 되었다.
적성에 맞지 않아 순경을 그만뒀던 아빠는 다른 직업을 찾아 친구를 만나러 가던 길이었다.
의협심 있지만 가장으로선 우유부단했던, 그럼에도 가족의 중심이었던 아빠….
오래된 신문기사 한편에 실린 사망 피해자의 얼굴로 아빠를 봤을 때.
아빠도 그저 앳된 청년에 불과했구나.라고… 아빠를 있는 그대로 인식하게 되었다.
(이 이야기는 시나리오로 개발 중에 있습니다. ^^ )
나를 키워주신 새아버지는 재혼 후 우리에게 경제적 안정과 정서적 불행을 동시에 안겨주고 떠났다.
뿌리가 없는 가정은 얕은 바람에도 잘 흔들렸고, 그렇게 우리는 원래의 땅으로 흩어진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전보다 단단하게 서로를 보듬었고, 그렇게 다시 본토가 되었다.
그래도 30년 가까이 한 가족으로 지냈는데, 몇 달 만에 관계가 정리되는 허무함을 보면서
가족의 의미가 뭔지, 가슴속 허기가 더 큰 구멍이 될 무렵… 한복집 시절이 생각났다.
사별, 재혼, 이혼을 모두 경험한 엄마는 한 여성으로서 굴곡진 삶은 사신 것이 분명하다.
수 없이 실패했고, 수 없이 일어섰다. 그 모든 과정에 하나님이 계셨다.
가난한데 행복하다는 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그러나 당시 우리 가족의 어려움은 모두 교회에서 채워졌다.
외식은 못해도 성가대에서 먹는 중식이 그렇게 맛있었다.
여름, 겨울마다 떠나는 수련회가 우리 가족의 휴가였다.
찬양단 활동을 하면서 음악에 대한 감수성을 배웠고,
독창대회, 성가대회를 비롯한 각종 대회에 나가 많은 상을 탔다.
공부를 잘하면 장학금을 받았고, 크리스마스 전야제를 준비하며 어린 시절 추억을 쌓았다.
교회는 친구들과 어울릴 마실이 되어주었고, 허기질 때면 집사님, 주일학교 선생님
누구든 만나서 따뜻한 밥을 얻어먹을 수 있었다.
가난했지만 마음만은 풍족했다. 나에게 교회는 사랑이었다.
우리를 돌봐주는 많은 사람들이 있었기에 혼자였던 엄마도 강인하게 삶을 이겨낼 수 있었다.
가난하지만 행복했다.
지금 다시 혼자가 되신 엄마는 여전히 일을 좋아하시고, 여행을 즐기며, 신앙인으로 매일을 살고 계신다.
나는 그런 엄마를 존경한다.
이제는 자식의 쓴소리에 금방 몸이 아플 정도로 노인이 되셨지만,
그럼에도 엄마는 내가 필요하면 제일 먼저 달려와 나를 위해 싸우시는 세상에서 가장 빛나는 수호자다.
나 역시 엄마처럼 살기 위해, 내가 무엇을 할 때 가장 행복했는지, 언제 가장 열정적이고 반짝거렸는지,
그림을 그리며 나를 찾아가고 있다.
그리고 이 시간을 빌어, 그 시절 우리를 감싸줬던 수많은 사람들에게 감사를 표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