_ 오빠
엄마 옆에 붙어 항상 이 책 저책 읽어달라며 떨어질 줄 몰랐다.
반면 나는 밥 먹을 때만 볼 수 있는 파워 E로
엄마 곁을 자유자재로 떨어지며 오빠와 어울렸던 기억이 많지 않다.
그런 오빠가 8살 때, 부천 이모댁에 먼저 올라가 우리는 약 2년간 떨어져 살았다.
오빠는 그 시절을 성인이 되어서도 힘들어했다.
내가 그런 오빠를 이해한 건 불과 몇 개월 되지 않는다.
갑작스러운 엄마와의 이별, 낯선 이모댁에서의 생활.
억울하게 혼나는 일들의 반복으로 오빠는 많이 힘들었다고 한다.
내 딸이 분리불안을 겪으면서 느껴왔던 모든 일들을
오빠는 말하지 않아도 이해하고 있었다.
방학 때면 시골로 내려와 엄마 곁에 있었지만,
방학이 끝나면 이모댁에 올라가야만 하는 그 생활이
오빠를 정말 미치게 했었다고 한다.
엄마는 아이에게 우주라고 하지 않던가?
그런 우주를 신기루처럼 맛보고 사라지길 어린 오빠는 몇 번을 반복했던 걸까?
4학년쯤이었던가, 오빠는 동네 오락실을 잘 다녔다.
나는 동네를 활보하며 그런 오빠를 자주 놀리곤 했었는데,
‘오빠 오락실 갔다고 엄마한테 이를 거야!’
이 한마디면 오빠는 혼비백산하며 나를 쫓아왔다.
그때는 그런 오빠를 놀리는 재미가 있었고, 한편으론 그 말이 그렇게 무섭나?
갸우뚱 거리기도 했다.
하지만 우주와도 같던 엄마와 몇 번이나 떨어져 살아본 경험이 있던 오빠에게
그 말은 살인무기나 다름없었다.
그런 오빠가 지금은 나를 잡아주는 듬직한 친오빠로 자라주어 기쁘다.
어린 날 내 작은 상처들도 커다란 원망덩어리가 되어 나를 집어삼켰는데,
당시 엄마와 떨어져 지냈을 2년이 오빠에겐 얼마나 큰 상처였을까?
가끔 그 시절을 말하는 오빠를 헤아리지 못하고 답답해했던 나를 반성한다.
그리고 감사를 표한다.
지금도 엄마 곁에서, 엄마를 지키며, 마음껏 애정 표현하며, 그렇게 잘 지내주는 오빠에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