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거리에서 돈을 주으면 주은 사람이 임자인 것처럼, 우리 가게에서도 자신이 주었으니 자신의 돈 아니냐 것이었다. 몰랐다면 그냥 넘어갔을지 모르지만, 알게 된 이상 그냥 넘길 수 없는 질문이었다.
“아니요? 따로 계산하고 드셔야죠.”
그러자 아저씨는 꼬깃거리는 뭔가를 꺼내 주셨다.
쫄딱 젖은 반쪽짜리 지폐였다.
그것도 아주 정확히 반만 있는….
“이것도 계산되죠?”
아저씨의 미묘한 미소와 행동에 순간 미간이 꿈틀댔다.
“아니요. 저 이거 받으면 서울에 있는 한국은행까지 가서 바꿔와야 해요.
여기 카드도 되고 현금도 되니까 계산하시면 될 것 같아요.”
양심고백이라고 하기엔, 최소한의 성의가 느껴지지 않았다.
아저씨는 겸연쩍어하시며 멀쩡한 천 원짜리를 따로 꺼내서 계산했다.
커피는 600원이라 잔돈 400원이 나왔다. 그리곤 뒤돌아 말하셨다.
“잔돈은 됐고, 다음에 그냥 하나 먹을게요.”
이건 또 무슨 소리지?
600원짜리 커피를 다음에 400원에 먹겠다는 선전포고인가?
“아니요! 그러시면 안 되죠. 400원 받으시고요, 다음에 600원에 계산하고 드세요!”
그렇게 아저씨는 계산을 하고 나갔다.
가게 앞을 치워주시는 환경미화원이라 커피하나 대접하는 게 뭐 그리 어렵겠냐라고 묻는다면,
나는 세상에 당연한 권리는 없다고 말하고 싶다.
인정, 배려 역시 자연스레 배어 나와야 하는 것이지,
이유 없이 지속한다면 상대는 자신의 권리로 착각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헤어진 아저씨는 며칠 뒤부터, 우리 가게 앞에서 쪼그리고 앉아 담배를 태웠다.
‘뭐야, 저 아저씨. 지금 나한테 시위하는 거야?’
하필 초등학생들 등교시간에, 그것도 우리 가게 앞에서 저렇게 버젓이 담배를? 일부러 그러는 건가?
뭐라 한마디 할까 하다가, 아이와 함께 있어 그만두었다.
이후 옆가게 편의점에서 레쓰*를 사 와서 드시는 모습을 몇 번 보았다. 신경 쓰지 않았다.
그리고 재고 정리를 하며 수많은 상자박스를 가게 앞에 내놓았다.
나는 재활용박스를 한 번에 정리해 우리 단지 분리수거장에 직접 가져다 버리는데.
그날따라 환경미화원 아저씨가 우리 가게 앞 박스를 작은 쓰레받기에 억지로 담아가는 모습을 목격했다.
그럴 필요 없는 일이었다. 나는 하던 정리를 놓고 급하게 뛰어나와 말했다.
“아저씨, 저희 가게 쓰레기는 제가 직접 버릴게요.”
아저씨는 가져가던 상자들을 대꾸도 없이 휙 놓고 가버리셨다.
신경 쓰기 싫었지만, 뭔가 오해를 한 것 같아 마음이 썩 좋지 않았다.
결국 나는 환경미화원 아저씨에 관해 옆가게에 여쭈었다.
커피 마실 때, 가게에 와서 앉아 먹고 가라고 해도 한사코 그냥 가는 분이라고….
사실 나는 누군가 내 심기를 건드리거나 말이 통하지 않는 순간이 지속되면 손절이 편했다.
그러나 그 기쁨도 잠시, 손절한 관계 자체에 나 자신이 상처받는 걸 알게 되었다.
갈등을 싫어하고 뻔뻔하지 못한 나를 알기에, 나는 그 아저씨를 이해해보고 싶었다.
그리고 며칠 뒤, 또다시 아저씨가 나타나 가게 주변을 정리하고 가셨다.
가게 안에서 일을 보던 나는 박*스를 한병 들고뛰었다.
“아저씨~!”
놀라 쳐다보던 아저씨에게 음료를 건넸다.
“이거 새로 나온 건데 한번 드셔보세요.”
아저씨는 의외로 환한 웃음을 보이시며 흔쾌히 음료를 받아 들었다.
고마웠다.
나는 비록 무인업에 종사하지만,누군가와 소통되는 이런 만남이 소중했다. 오랜 기간 작가지망생으로 살며 경험한 인간관계의 단절 때문인지, 어떤 때는 내가 데뷔하지 못한 무소속의 어려움이라고 치부하며스스로 벽을 쳤다. 그래서 누군가의 인정어린 소통이 너무 소중하고 귀하다는 걸 안다.
나이를 먹었다고 모두 다 어른이 되는 것이 아닌 것처럼,
우린 모두 다 여리고 인정에 목마른 부분이 있지 않나.
잠시의 오해는 있었지만, 그렇게 화해한 우리는 오며 가며 ‘안녕하세요~ 수고 많으세요~’ 같은 인사를 하는 사이가 되었다. 아저씨는 내가 재고정리를 할 때면 들어와 이런저런 사담도 나누게 되었다.
“옆집에선 하나 먹을 값을 여기는 두 개를 먹을 수 있어.”
나는 어느 구역을 청소하시는지, 쓰레기는 어떻게 관리하시는지 이것저것 여쭤보았고 대화가 필요하셨던 아저씨는 신명 나게 대꾸하며 웃곤 하셨다.
우린 너무 각박한 사회를 살고 있기에, 내가 원하는 방식의 소통이나 결과가 아닐 때가 많다. 그럴 때 ‘왜 나만 상처를 받나’ 원망이 들기도 한다. 그러나, 그런 시대이기에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마음이 필요하지 않을까.
아저씨가 나와 상한 감정때문에 우리가게 앞을 제대로 치우지 않는다면 어땠을까?
요즘 같이 추운 날씨에도 매일 성실히 일하시는 아저씨를 볼 때면, 우리 가게에 온장고를 둬야 하나 생각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