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덟 달. 제주가 그리운 어느 날

김영갑 I C617.883

by 화온


문득, 제주가 그리운 날이 있다.


어려서 부모님과 함께 다닌 수까지 합하면 정말 여러 번 제주를 다녀왔다.

나에겐 언제 찾아도 늘 새롭고 마음의 평온함을 주는 신비의 섬 제주이다.

코로나 확진자 수가 다시 늘어나 아이들과 집에만 있던 날들 속, 나는 그런 제주를 그리다 김영갑 작가의 사진을 떠올려 본다.

사진첩을 뒤져 큰아이가 세 살쯤 찾았던 그곳에서의 추억을 들여다보니, 젖살이 통통한 사진 속 아이는 잠시 나를 그 시절로 데려가 미소 짓게 한다.



결혼 후 남편과 함께 한 제주에서 처음 찾아가 보게 된 ‘김영갑 갤러리 두모악’은 언제부턴가 제주에 가면 꼭 들르는 곳이 되었다.

지인들에게도 추천하고, 그곳에서의 느낌을 오래 간직하고 싶어 신혼집 냉장고에 붙여 두었던 사진엽서는 꽤 오랜 시간 그곳에 자리했다.
찾아가는 길도 조용한 시골길이었던 두모악은 작은 폐교를 갤러리로 만든 곳이다.

소박한 정원에 발을 들이면 내가 느끼는 평온함의 제주가 그 정원 안에 들어 있는 느낌이 참 좋았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싶은 사진을 정하고, 사진 속 색을 닮은 오일파스텔들을 골라 담아 본다.

오늘은 내가 좋아하는 하늘색과 초록 나무색이다.

사진을 보며 색을 담고 있으면, 내 마음은 벌써 그곳에 한걸음 다가가 있고 살짝 설레는 그 느낌이 좋다.





제주의 평화와 고요가 내 사진 안에 있다._김영갑


서울에 살다 제주도의 풍경에 이끌려 20년 가까운 긴 세월 동안 제주의 많은 사진을 남긴 작가 김영갑.
그는 사십 후반 얻은 루게릭병으로 굳어 가는 몸을 이끌고 직접 만들어 간 두모악 갤러리에서 생을 마감했다.

끼니는 굶어도 모은 돈으로 필름을 사고 일 년에 한 번씩 꼭 개인전을 가졌다고 한다.
하지만 일부로 누구도 초대하지 않았고, 작품들을 떼어내기 전 생각들을 거름 삼아 그는 다음 작품에 몰입했다고 한다.



모두에게 인정받기보다는 나 자신에게 인정받는 게 우선이다.
다른 사람은 속일 수 있어도 나 자신을 속일 수는 없기에 늘 자신에게 진실하려 했다.



그는 섬의 오지를 찾아다니며 초가집, 돌담, 노인, 아이, 마을, 초원, 바다, 오름을 수도 없이 필름에 담았다.
바닷가에서 살던 그는 중산간 초원의 분위기에 매혹되어 중산간 마을로 옮기게 되는데, 인기척 없는 중산간 마을에서 그는 외로운 노인들의 말벗이 되어주며 '중산간 마을은 내 영혼의 고향'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사진 속에는 그의 마음이 고스란히 담겨 보는 이에게 전해진다.


중산간의 광활한 초원에는 눈을 흐리게 하는 색깔은 없다.
귀를 멀게 하는 난잡한 소리도 없다.
코를 막히게 하는 역겨운 냄새도 없다.
입맛을 상하게 하는 잡다한 맛도 없다.
마음을 어지럽게 하는 그 어떤 것도 없다.
나는 그런 중산간 초원과 오름을 사랑한다.



그림을 그리며 초원 가운데 우뚝 선 나무를 자세히 들여다본다.

하나의 나무인데 기둥이 여러 개처럼 보인다. 저 나무는 실제로 어떤 형태를 가진 나무일까?

저 넓은 초원 위에 홀러 서서 수많은 계절을 덤덤히 겪어냈을 나무.

작가는 사진기를 들고 그 나무를 마주하며 저 초원에 홀로 서 있었겠지..


그림을 바라보면 전체적인 형태나 색의 느낌으로 보게 되지만, 그림을 그리면 손이 가는 모든 곳을 살피고 생각하게 된다.

그러면서 얻는 감정은 나를 또 다른 세상으로 안내한다.



내 사진은 내 삶과 영혼의 기록입니다.



그는 같은 장소를 수십 번, 수백 번 반복해서 찾아가 사진을 찍었는데 같은 곳이지만 자연은 늘 새롭고 신비했다.

그리고 내면의 소리에 귀 기울여 마음이 변하는 순간을 사진으로 담았다고 한다.
사진을 찍는 황홀한 한 순간을 위해 보고 느끼고, 찾고 깨닫고, 기다리기를 헤아릴 수 없이 되풀이 한 그.

그의 사진에는 시원한 바람, 자연의 움직임 그리고 하늘의 흐름이 느껴진다.






그가 마흔을 넘을 즈음 그의 몸은 서서히 굳어갔고 루게릭병이라는 진단을 받게 된다.
사진을 찍을 수 없고 혼자 음식을 먹기도 힘들어진 그는 삶을 체념하는 대신 희망을 선택한다.
모두가 만류하는 갤러리를 열기로 결심한 뒤, 하루하루를 자신이 할 수 있는 일들에 몰입하며 지내기 시작한다.
꾸미지 않은 듯 제주의 소박한 아름다움을 표현하는 것이 그가 생각하고 바라던 갤러리의 모습이었다고 한다.

내가 그곳에서 느꼈던 감정과 그의 영혼이 담긴 노력의 결실에 숙연해진다.

뼈만 앙상하게 남은 그에게 내일이란 기약할 수 없는 시간이었고, 아침에 눈을 뜨면 허락된 오늘 하루가 있었다.

그 하루를 평화롭게 보내려 할 수 있는 일 하나에 몰입하며 마음의 평화만을 생각했던 그.
그렇게 그는 두모악에서 고이 잠들었고, 그의 뼈는 갤러리 마당에 뿌려졌다.
지금은 아픔 없는 그곳에서 두모악을 찾아오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평화롭게 쉬고 있겠지..


세상 흘러감에 연연하지 않고 자신의 굳은 신념과 의지로 사람들의 마음에 제주의 황홀한 아름다움을 선물한 김영갑.
책을 읽고 사진을 찾아보고 추억을 더듬으며 그림을 그린 시간 속 나는, 내가 좋아하는 그곳에 잠시 들른 기분이 들어 마음이 평화롭다.

어느 해 다시 제주를 가게 되어 두모악에서 그의 사진들을 본다면 그땐 어떤 느낌이 들까..?



철 따라 피어나는 야생화와 곤충, 나무, 돌... 자연의 모든 것이 나의 동무였다.
그것들이 싫증 나면 바람 따라 구름 따라, 들판으로 오름으로 바다로 흘렀다.
흐르다 보면 가슴 벅찬 감동을 만나기도 했다.
살다 보면 불현듯 찾아오는 슬픔, 분노, 두려움, 절망, 그리고 힘든 상황을 극복해야 할 때마다 나는 자연에서 해답을 구했다.
그 속에 숨겨진 아름다움과 신비로움을 통해 지혜를 얻었다.
아름다움을 통해 인간은 구원받을 수 있다고 믿었다.
그때 터득했던 지혜가 마음을 평화롭게 해 준다.
현실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면 어떤 상황도 편안하게 맞을 수 있다.

_두모악 갤러리에서 김영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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