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끼지 말고 기록하자
기록은 기억을 지배한다. 나는 나의 기억을 많이 불신하기 때문에 기록 덕후다. 몰스킨 노트만 크기별로 2가지를 들고 다닌다. 작은 노트는 일상적인 생각 기록용. 조금 큰 노트는 스케치하면서 아이데이션, 브레인스토밍용. 그리고 에버노트의 노트 개수는 1만 3천 개가 넘으며 최근에는 노션도 쓰고 있다. 생각들을 버리기 아쉬워서 쓰기 시작한 것이 나의 생산을 위한 강력한 무기가 되었다. 지적 생산을 위한 코어 근육 키우기 에서 기록하는 습관을 추천했으니 내가 어떻게 그 습관을 만들었는지 다시 정리하고 싶어 졌다.
고수는 도구를 탓하지 않는다고 했는데 나의 기록은 심하게 도구를 탄다. 우선 Grid(격자 모눈) 형식의 몰스킨 노트를 쓴다. 가로줄 노트는 너무 글씨만 써야 할 것 같고 무지 노트는 너무 휑해서 부담스러워서. 격자 노트는 가로로 글도 쓸 수 있고 표도 만들 수 있고 그림도 그릴 수 있다. 구속과 자유의 중간 느낌이랄까? 필기구로는 라미 사파리 만년필을 몇 년째 쓰고 있다. 사파리 만년필 하나와 4색 볼펜 하나. 기본적인 사항을 사파리 만년필로 서걱거리며 기록하고 거기에 추가하거나 표시하는 것은 4색 볼펜으로 작성한다.
일단 생각나면 기록한다. 아끼지 않는다. 몰스킨에 생각나는 대로 한 페이지를 할당하여 쓴다. 처음에는 종이를 아낀다고 적고 아래에 또 적고 이렇게 했는데 그렇게 하다 보니 구분이 안되기도 하고, 계속 아까워만 하면서 진짜 생각을 자유롭게 표현하지 못하기도 했다. 그래서 과감하게 결단을 내렸다. 한 페이지에는 한 가지 생각만 적는다. 그 한 가지 생각을 주제로 해도 정말 다양한 생각들이 기록되니까. 그러다가 아예 양쪽면에 한 가지 생각만 기록하는 단계로 나아갔다. 왼쪽면에는 아무렇게나 쓰고 오른쪽은 정리한다던지, 왼쪽 면에는 글로 쓰고 오른쪽 면에는 표나 그림으로 정리한다던지 하는 형태로.
그리고 제한을 두지 않는다. 노트라고 항상 똑바로 세워서 쓰라는 법은 없다. 특히 이것은 노트가 격자무늬일 때 더욱 강력하게 작용한다. 90도 돌려서 가로로 넓게 써도 격자무늬 형태인 것은 동일하니까. 위아래가 넓은 것에서 좌우가 넓게 변경되니 또 다른 쓰는 재미가 있다. 이렇게 계속 나의 생각의 틀을 깨면서 자유롭게 기록하는 즐거움을 나에게 선사하는 것이다. 최근에 페이스가 살짝 줄었지만 재작년 까지만 해도 매 분기마다 몰스킨 노트를 하나씩 채우는 것을 5년가량 했던 것 같다.
에버노트도 일단 다 쓴다. 아끼지 않는다. 회사 일과 관련된 것들, 언젠가 볼 것 같은 것들, 아이디어도 기획노트도 전략노트도 말씀묵상 관련도 책 관련도. 다 쓴다. 쓰면서 나의 노트북 스택의 구분을 다시 정리해보니 회사 일 / 여행 / 신앙 / 학습 / 독서 / 대학원 / 기타, 총 18개 스택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중 업무 관련이 3개, 학습 관련이 3개, 발전 및 성장 관련이 1개, 독서 1개, 여행 1개, 신앙 2개, 나머지가 기타. 13,000개가 넘는 노트가 이렇게 다양하게 분포하고 있었다. (에버노트는 3단계로만 구분이 되어있다. 노트 - 노트북 - 노트북 스택)
물론 처음부터 이렇게 구분이 된 것은 절대 아니었다. 쌓은 후 기준을 정해서 구분하기 시작하고, 그 후에 계속 노트북도 더 생기고 스택도 더 생기고 했던 것이지. 처음에 쓸 때에는 구분이 안되었고 어떻게 써야 정말 막막해서 시작한 후에 1년은 그냥 두기도 했다. 그래서 다시 쓰기 시작할 때에는 한 노트북에 다 썼다. 일단 모아놓기에 좋았다. 일상에서 쓰는 것을 예로 한번 들어보자면 다음과 같다. 서점 놀러 가서 괜찮은 책들, 사고 싶은 책들이 정말 많다. 하지만 다 살 수 없고 지금 다 볼 수 없으니 일단 표지들을 찍어둔다. 서점 도서관 놀이 노트북에 그날의 날짜와 방문한 서점 명을 적어은 노트를 만들어서. 그러다 새로 책을 읽기 시작할 때에는 그 책을 노트를 하나 또 만든다. 기록이 많이 되지는 않지만 리스트만 봐도 어떤 책을 내가 봤는지 알 수 있고 필요하다면 사진을 찍어둘 수도 있다. 업무상 미팅을 위한 노트를 하나 만들고 미팅을 기록하고, 기획서 작성을 하려고 또 만든다. 그날의 성경 말씀 묵상한 것을 정리하기 위한 노트도 하나 또 만든다(요즘은 잘 안 해서.. 다시 해야겠다).
종이와 디지털 두 가지를 쓰는 이유는 둘 다 장점이 있기 때문이다. 종이 노트는 손이 움직이기 때문에 생각이 더 정리되고 자유롭게 발산하면서 구조화하기 좋다. 디지털 노트는 검색이 용이하고 사진 등 다양한 것을 일단 모아둘 수 있다. 장점만을 취하기 위해 일단 다 쓴다. 그리고 종이 노트도 아끼지 말고 에버노트도 아끼지 말자. 생산자인 나를 위한 극히 소소한 투자로 생각하고.
한참 정리한 후에는 한 번씩 돌아보자. 몇 번씩 반복해서 쓰는 것들이 많다. 그것이 나의 생각이고, 사업 기획이 되고, 프로젝트 기획이 된다. 계속 생각이 가다듬어지면서 정교해진다. 또한 쌓였을 때의 즐거움과 성취감이 있다. 일단 쌓이면 그것을 더 쌓고 싶어 진다. 마치 글을 계속 쓰면 멈추지 않고 싶어 지는 것처럼
기록 자체가 생산은 아니다. 노트에 끄적이는 것이 글은 아니니까. 하지만 아주 중요한 재료들이다. 생산의 ‘시작’이다. 생각을 잡아둬야 발전시키고 글로 쓰고 새로운 일을 만들 것 아닌가. 하나의 글을 쓰기 위해서 그것에 대한 생각과 소재가 10배는 있어야 풍성한 글이 나오는 것 같다. 기록을 하면 안심하고 계속 새로운 것들을 머리가 더 생각하는 것 같다. 더 다양한 것에 관심을 가지기도 하고 더욱 선순환 구조가 생긴다. 떠다니는 모든 것을 일단 잡아두고. 소스로 삼고 나의 것으로 만들 수 있게 된다.
그러니 지금 기록하는 습관을 시작하자. 내가 정말 자주 들고 다니고 싶은 노트와 필기구를 하나 사는 것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