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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아 Oct 10. 2020

우울은 자책에 뿌리를 내리고 자라고 있었다.

돌이켜 보면 매번 그랬다.

지지부진한 연애나 썸이 끝나는 시점마다, 나는 꼭 그 화살을 나에게로 돌렸다.

잔뜩 움츠려들은 내 모습이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리고 한참이 지나 탈탈 털고 자리를 일어날 때 즈음에는 ‘다음에는 그러지 말아야지. 내가 진짜 잘해봐야지.’ 해놓고, 번번이 다시 갖은 핑계를 대며 새 사람들을 내치기에 바빴다.


그것뿐만 아니었다.

술을 먹고 다툼이 있었다던가, 누군가 내게 빈정거려 기분이 상했다던가, 하는 부정적인 일상의 많은 일들에 ‘혹시 내가 잘못한 것은 없을까?’하는 고민을 하느라 시간을 할애했다.

‘내가 어제 그 친구를 만나서 무슨 얘기를 했지?’

‘내가 그때 나서서 이건 틀렸다고 말했다면 어땠을까?’

‘아, 이 얘기를 했었어야 했는데.’

‘이 이야기가 이렇게 들렸으려나?’


사실 이런 고민이 재발을 막기 위한 건강한 반성이었다면 좋았으련만, 난 대체로 뒷북에 가까운 ‘자책’을 하고 있었다. 그렇게 매번 주위의 부정적인 일들 모두에 온 마음을 써야 했기에 여간 피곤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친구들과 만나고 돌아온 날은 나눈 대화를 하나하나 되뇌었다.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에 늘 신경이 곤두섰고, 내가 잘 알고 있는 사람보다 '누군가 그러더라' 하는 근본 없는 이야기는 더 마음에 남았다. '누가, 언제, 왜, 어떤 뉘앙스로 그런 이야기를 했을까?'를 상상하느라 시간을 허비했고, 그 마지막은 일어나지도 않은 (그리고 대체로 일어나지도 않을) 극단적인 최악을 상상하는 것으로 끝났다. 익명으로 된 단톡 같은 건 날 정말 미치게 괴롭혔다.


언제부터였을까?

왜 나는 매번 어차피 완벽해질 수 없는 나 자신을 책망하는데 의미 없는 시간을 보내는 걸까?

예전에는 이렇지 않았던 것 같은데, 왜 늘 날을 세우고 그날로 스스로를 찌르고 있는 거지?


그 답을 얻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199X 년, 사건이 있었던 시점으로 시계를 돌려야만 했다.


#

초등학교 때 사건이 생기고 나는 의도적으로 학교에서 가장 먼 중학교를 1 지망으로 택했다.

우리 가족은 아무에게도 사건에 대해 알리지 않고, 아빠의 일터에 영향을 끼치지 않는 범위 안에서 사건으로부터 자연스레 멀어지기로 결정했었다.

당시는 지역을 기준으로 학교를 결정했기에, 우리 가족은 서둘러 나쁜 기억이 있는 동네를 떠나 이사도 끝마친 터였다.  

내가 다닌 초등학교에서 그 중학교로는 단 세명만이 배정받았었다.


사실 20-30분쯤 걷는다면 닿지 못할 거리도 아니었다. 하지만, 사는 동네가 바뀌었고 새로운 친구들을 만났다는 것만으로도 나는 사건의 기억으로부터 꽤 멀어질 수 있었다.

여중에서의 3년 동안, 난 학원도 딱히 다니지 않았다.

친구들과 어울리는 걸 좋아했지만, 그렇다고 무리하게 인맥을 넓히지도 않았기에 그리 넓지 않은 내 생활 반경 속에서 난 완벽하게 안전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간은 금세 흘렀고, 새롭게 배정된 고등학교는 집에서 조금 멀어 버스를 타고 가야 하는 곳이었다.

그리고 고등학교 인원은 다시 이 중학교, 저 중학교의 학생들을 섞어 배정했기에, 입학식 날 난 옛날 초등학교 친구들과 다시 만날 수 있었다.

3년 만의 일이었다.

초등학교 때는 이름만 서먹하게 알고 지냈던 친구들, 그리고 꽤 가깝게 어울렸던 친구 몇이 "수아야!" 하거나 "XX초등학교 나왔지?" 하며 나를 금세 알아봤다.

다행인 건 사건 이후 어떠한 대외적인 조치도 취하지 않았기에 친구들이 내게 일어난 사건에 대해 알지는 못했고, 사실 나도 사건으로부터 떨어진 채 꽤 시간이 흘렀기에 껄끄러운 기억보다는 반가움이 앞섰다.


봄이 지나고 다시 날씨가 후끈해질 무렵, 동아리 친구들과는 매일 점심시간과 쉬는 시간마다 만나 산책할 만큼 친해졌고, 반에서는 초등학교 때는 대면대면 이름만 알고 지내던 친구 둘과 단짝이 되었다.

밥을 먹으며, 숙제를 같이하며, 중학교 때보다 더 길어진 학교 생활에서 친구들과 참 많은 이야기들을 나누게 되었던 것 같다.


그러던 어느 날, 반 친구들이 쉬쉬하며 초등학교 때 있었던 성폭행 사건에 대해서 이야기를 했다.

심장이 쿵쾅 거리기 시작했다.


‘그때 그런 일들이 있었다’며 이야기를 해준 친구는 당시에 피해자로 소문이 난 친구 한 명을 지목했다.

사건이 있기 한 해 전에 같은 반이었고, 성이 특이했기에 이름을 듣자마자 난 단박에 친구를 떠올릴 수 있었다.

체육을 참 잘했다. 까무잡잡한 얼굴에 똑 단발이 어울렸었고, 언제나 환하게 웃던 밝은 성격의 친구로 기억하고 있었다.

친구의 이야기로 미루어 그녀는 (아마도) 내 사건이 있던 이후로 (아마도) 같은 범인에게 성폭행을 당한 듯했다.

그 이후로 그녀는 무너졌다고 한다.

담배를 배웠고, 공부를 포기했고, 몇 번씩이나 가출을 하는 방황하는 중학교 시절을 보냈다고 했다.


그 이야기를 듣는데 내가 무너지는 기분이었다.


난 사건 이후 아무 일도 없는 척하기에 바빴다.

다행히 곧 방학이 시작됐고, 내게 일어난 끔찍한 일의 기억을 조금이나마 덜어낼 여유가 있었다.

그리고 남은 한 학기 동안에도 매일 하굣길에 친구들과 함께 했으며, 텅 빈 집으로 가는 대신 엄마가 있는 가게로 향했다.

가족들 이외에는 누구에게도 사건에 대해 털어놓지 않았기에 학교에서도 친구들 사이에서도 아무 일 없는 척, 아무렇지도 않은 척했다.


하지만 사실 그 남은 한 학기 동안 난 그 범인이 다시 학교 안에 다른 친구들을 노리고 있는 걸 알고 있었다.

하교 길에 다시 한번 그를 마주쳤었기 때문이다.

 시선이 그쪽으로 향하자, 그는 바쁘게 주차된  뒤로 몸을 숨겼었다.

그때 나는 친구와 지나가며 못 본 척 시선을 돌렸지만, 범인은 다시 하굣길에 숨어 혼자 하교하는 친구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나는 알고 있었지만 다른 이의 불행을 막을 여력이 없었다.

그저 못 본 척 빠르게 시선을 돌리고 친구들의 걸음을 재촉해 자리를 피할 뿐이었다.

더운 날이 아니었음에도 식은땀이 등줄기를 타고 흘렀다.

매일 걷는 걸음이 어색했고, 매 초 내쉬는 숨이 의식될 만큼 긴장하며 모퉁이를 돌아나갔다.

그리고 그대로 엄마 품에 안겨 이제 안전해졌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나서야 깊은숨을 몰아낼 수 있었다.


#

‘어쩌면 범인을 다시 마주쳤던, 그날 그 하굣길에 내 친구가 다른 피해자가 됐을 수도 있었겠구나.’

그렇게 생각하자 소름이 끼쳤다.

나는 타인의 불행을 막을 수 있는 기회를 외면했다.

드라마나 영화에 나오는 야무진 아역 배우들처럼, 익명으로 경찰에 신고를 한다거나 누군가에게 도움을 요청할 생각도 못했다.

엄마 품에 안겨서도 한동안 내 눈치를 보며 마음 쓸 엄마가 걱정되어, 다시 범인을 마주쳤다는 이야기도 하지 못했다.


‘어쩌면 내가 그 친구의 불행을 막을 수도 있었겠구나.’

그 생각은 완전히 나를 압도했다.

그리고 꽤 오랜 시간을 숨 막히는 죄책감에 시달리며, 잠도 못 이루게 했다.


아마도 그날 밤이 내겐 ‘내게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이게 다 무슨 의미지?’를 고민하며 지새웠던 그 초등학교 여름날의 사건 당일보다 훨씬 더 많이 아팠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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