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수아 Oct 10. 2020

니체는 말했다. 씻고 자라.

문제들을 확인한 뒤, 우울한 기분에 허우적대지 않기 위해 내가 가장 먼저 한 일은 ‘씻고 자는’ 것이었다.

<니체의 말>이란 책에서 매일 하루의 끝에 반성하지 말라는 이야기가 퍽 와닿았다.

아마도 어릴 때부터 매일 일기를 쓰고, 하루를 돌아보라는 얘기를 귀에 박히게 들어왔기 때문에 더욱 신선했으리라.

아, 선생님들이 틀렸을 수도 있겠구나! 매일 반성하는 삶이 좋은 게 아닐 수도 있구나!


피곤한 저녁에 일기를 쓰며 하루를 반성하는 것은 우울한 생각에 휩싸이게 하기 쉽다.

결국 그의 요지는 우울할  고민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난 조금이라도 더 퇴근 이후의 시간을 즐기고 싶은 욕심에 웹툰이나 사두었던 책을 읽었고, 특히 멍하게 SNS를 보는 일이 많았다.

다른 이들의 SNS는 언제나 행복하고 평화롭다. 텅 빈 자취방에 혼자 앉아 다른 이들의 행복을 넘겨보는 건 유쾌하지 않은 일이었지만, 아쉬운 마음에 매일 난 정해진 시간까지는 핸드폰을 붙들고 늘어졌다. 그러다 보면 씁쓸한 기분으로 이런저런 생각에 빠져 잠이 오지 않았고, 다시 퀭한 눈으로 핸드폰을 켜는 악순환을 반복했었다. 피곤했다.


그전까지도 물론 변화를 주기 위해 다양한 시도를 하고 있기는 했다.

명상도 해보고, 기분이 좋아진다는 음악들도 끌어다 틀어보았다.

따뜻한 우유에 소금을 조금 타 마셔보기도 했고, 허브 나무나 디퓨져를 사다 머리맡에 두기도 했었다.

글로 써보는 게 도움이 된다고 해서, 부지런히 일기를 썼지만 내 조막만 한 노트에는 우울한 이야기들만 채워지기 일쑤였다.

‘힘들다, 외롭다, 나만 늦은 건 아닐까? 괜찮을까?’ 하는 생각을 머릿속에서 글로 옮긴다고 해서 달라지는 건 그다지 없었다.


그래서 그냥 씻고 자기로 했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생각들이 방심한 틈에 자라나지 못하도록, 먹먹한 기분이 조금이라도 밀려오면 당장 몸을 일으켜 뜨거운 물로 노곤해질 때까지 목욕을 했고, 곧바로 기분 좋게 보송한 침대에 누웠다. 일이 고단했던 날은 저녁 8시에도 잠을 청했다.

처음으로 효과가 있었다.

돈과 시간과 정성을 들여 무언가를 노력하는 대신 휴식을 취하는, 이 지극히 단순한 일만을 실천했는데도 자책하는 시간을 놀랄 만큼 줄일 수 있었다.

돌이켜보면 가끔씩은 나도 내가 배고픈 줄, 피곤한 줄 모르고 우울한 생각에 매달릴 때도 있었던 것 같다.

불안하거나 자책하게 될 때는 ‘왜?’ 같은 질문을 지우고 일단 잘 먹고 쉬었다.


#

다음으로는 견딜 수 없는 기분이 들 때마다 혼자 홀짝이던 맥주를 끊었다.

혼자 먹든 여럿이 먹든, 우울한 기분에서 술을 마시면 술이 주는 들뜨는 듯한 몽롱한 느낌이 더 도드라져 조금만 더 조금만 더 하며 술을 찾게 됐었다.

하지만, 술을 마시며 기분이 좋아지는 것은 단순히 다음 날의 기분까지 미리 땡겨쓰는 것이 분명하다.

술이 깨며 밀려오는 허무한 공복감과 공허함은 카드값 빠져나간 내 월급통장만큼이나 날 더 기운 없게 만들었다.

술은 기분이 좋을 때만 마시기로 했다.


#

매달 찾아오는 생리 주기도 더 꼼꼼하게 체크했다.

단순히 시작일 뿐만 아니라 몸과 기분 상태를 빡빡하게 적어두자, 패턴이 보였다.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내 경우는 생리를 시작하기 일주일 전쯤부터 이유를 알 수 없는 불안감이 엄습했다.

마음에 박혀 울리던 상사의 모진 말이라던가, 미처 끝내지 못한 업무라던가, 남자 친구 없이 이대로 괜찮은 걸까 하는 신세한탄이라던가.

밑도 끝도 없이 절망적일 만큼 우울한 기분이 들 때, 대부분은 진짜 무언가 잘못되었거나 불길한 미래를 예측하는 나의 뛰어난 육감 같은 것이 아니었다.

그저 시간이 돼서 찾아오는 호르몬의 장난인 경우가 허다했다.

물론 이유를 알았다고 해서 불안한 기분 자체가 사라지지는 않겠지만, ‘아, 별거 아니구나. 이 기분 또한 3일쯤 지나면 스르르 녹아 없어지겠구나’ 하고 푹 안심이 되었다. 

‘진짜 무언가 잘못된 거 아닌가?’하는 불안한 공상을 멈출 수 있었다.


#

별 거 아니었던 이 작은 변화들이 효과를 보이자, 규칙을 몇 개 더 정했다.

단순히 피곤한 시간을 피하는 것에서 더 나아갔다. 나는 내 기분을 살피거나 반성하는 일은 화창한 햇볕 아래서 좋아하는 카푸치노를 한잔 시키고, 사랑스러운 아이유 노래를 들으면서만 하기로 했다.

요즘은 풀 냄새가 좋은 곳으로 가 ‘비밀의 화원’을 듣는 게, 우울한 고민을 정리하기에 가장 효과적이다.

쓱- 쓱- 펜으로 문제들을 적어 내려가며,

[어제의 일들은 잊어. 누구나 조금씩은 틀려]

하는 몽글몽글한 목소리를 듣고 있으면 꽤 괜찮은 해결책들이 떠오르곤 한다.

가끔은 설령 좀 멍청한 짓을 했다고 해도 그 결과가 그다지 비극적이지는 않다는 걸, 훨씬 더 쉽게 인정할 수 있었다.


허무하거나 무기력하게 느껴질 때는 시험과 휴가를 동시에 잡았다.

미뤄뒀던 자격증 시험이나 진급을 위한 영어 시험을 금요일에 잡으면 그 주 주말은 어디로든 여행을 계획했다.

순천, 강릉, 안동, 강화도. 국내여행도 떠났고, 가끔은 홍콩이나 괌처럼 그리 멀지 않은 해외 여행지들도 예약해 두었다.

그럼 그때부터 시간과 밀당이 가능해진다.

시험 일정을 떠올리면 시간이 부족한 것 같은 촉박한 기분이 들다가도, 여행을 생각하면 스트레스가 누그러지며 시간을 재촉하게 된다.

두 가지 바쁜 일정으로 시간과 밀당하다 보면, 허무하거나 무기력했던 실체 없는 무게감은 어느새 잊힌 지 오래였다.


이게 내가 찾은 나 스스로와 화해하고 나를 위해주는 소박한 방법들이었다.

물론 당장 멋지게 사표를 던지고 나를 찾아 순례길을 걷거나, 발리에서 한 달 살기 같은 걸 할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만 현실감 없는 이야기들은 접어두기로 했다.  

퇴사가 유행이라지만 내 경우에는 우울하다거나, 짜증 나기 때문에 하는 우발적인 행동들은 오히려 마음을 불안하게 했다.


#

정답은 물론 없다.

어떤 이는 멋지게 던지는 사표가 일생일대의 희열 일수도 있다.

나 조차도 앞 뒤 재지 않고 술에 취해 한바탕 떠들고 웃고 울고 해야 살아있는 기분이 들었던 적도 있었다.

또 출산 후에 불면증을 직접 앓고 나서야, 누군가에게는 ‘그냥 생각을 떨치고 잠들어’하는 조언이 전혀 가치 없는 말이라는 걸 무섭게 깨달았다.


다만 우울이나 자책이라는 함정에서부터 나를 끄집어낼 수 있었던 나만 알고 있기엔 너무 아까운 두 가지 효과적인 규칙을 이야기하고 싶었다.

- 피곤하고 배고플 때 생각하지 마라.

- 반성해야 하는 문제가 있다면, 다른 요인들이 끼어들 수 없는 좋은 환경을 만들어라.


적어도 내게 있어서는 해결책 없이 수도 없이 들었던 ‘그만 생각해라’, ’ 힘내라’, ‘아픈 게 당연하다’하는 위로보다는 확실하게 나를 조금씩 밝은 방향으로 다시 옮겨 놓을 수 있는 직관적인 행동수칙들이었다.

이전 09화 네 잘못이 아니야.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