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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아 Oct 10. 2020

에필로그 _딸 키우는 엄마의 마음

#1.

하고 싶던 이야기는 여기까지 이다.

이 이야기는 이십 대의 고독하고 삶에 지쳤던, 그래서 스스로를 망가트리는 게 오히려 편했던 나에게 내내 하고 싶던 이야기였다.


그때 난 행복이 뭔가 싶어 허우적거렸다.

그건 마치 첫 스쿠버 다이빙의 경험 같았다.


첫 바다 다이빙을 위해 보트에서 용감하게 뛰어내린 것 까지는 좋았는데, 바다는 수영장에서 연습하던 것과는 너무 달랐다.

물은 말도 안 되게 차가웠고, 어정쩡하게 장비에 바람을 넣은 탓에 몸은 물 중간쯤에 어중간하게 걸쳐졌다.

지금까지 해변가에서 봐왔던 것과는 깊이가 다른 낯선 파도가 머리 꼭대기까지 올라 치면서 날 위협하는데,

잡고 의지할 곳은 하나도 없어 무섭고 당황스러웠다.

물론 이미 수영장에서 연습하며 여러 번 확인했기에, 등 뒤에 맨 산소통이 있어 죽지 않는다는 걸 머릿속으로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필사적인 두려움에 버둥거렸고, 떨리는 목소리로 악을 쓰며 허우적거렸다.


그때 해야 하는 일은 딱 하나뿐이다.

단지 힘을 빼고, 어깨에 맨 BCD(부력 조절 조끼)에 바람을 빼 천천히 날 삼킬 것 같은 파도의 바닷속으로 기어 들어가는 것뿐이다.

천천히- 조금씩 호흡에 신경 쓰며 바닷속으로 들어가다 보면 그 요란하던 파도는 어느새 멀어져 있다.

그리고 오직 내 숨소리만 들리는 완벽한 고요와 믿기 힘들 만큼 아름다운 전혀 다른 세상을 만나게 된다.


내 삶이라는 바닷속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도 그 과정이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무섭더라도 내 손으로 직접 BCD의 바람을 조금씩 빼야만 한다는 것을 이십 대 때, 나는 미처 알지 못했다.

결국 우울과 불안, 타인의 시선, 일반적으로 기대되는 역할 따위에 압도되어, 보트에서 삶으로 뛰어내리자마자 내가 가진 체력을 몽땅 소진해버렸다.

바닷속같이 펼쳐지던 삶의 아름다움은 보는 둥 마는 둥 했고, 파도에 이리저리 휩쓸리기만 하다가 다시 무겁게 젖은 몸으로 보트를 기어올라가야만 했다.


나는 여전히 파도가 무섭다.

하지만 삶이라는 바닷속으로 들어가기 위해서 파도는 결코 싸울 대상이 아니라는 걸 일러주고 싶었다.


#2.

그리고 난 지금 딸을 키우는 엄마가 되었다.

수많은 범죄 기사 밑에 달린, 그 눈에 박힌 댓글 ‘자식 키우는 부모로서 분노한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어렴풋이 공감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글을 쓰기가 더 어려웠다.


새근거리며 숨소리를 내는 아이를 보면,

세상 누구보다 밝게 웃으며 달려와 폭 안기는 녀석을 보면,

나는 도무지 범죄나 왕따, 성폭행, 폭력, 폭언, 차별 그 어떤 무거운 단어도 녀석에 연결해 생각해 낼 수가 없다.

진심이라는 진부한 말로 밖에는 표현할 수 없을 만큼, 난 내 아이가 행복하길 바라고 또 바란다.


하지만, 그 간절함 만큼이나 시리게 나는 알고 있다. 아마 모두 알고 있을 것이다.

어디에도 어느 시대에도 유토피아는 없었기에 저 조막만 한 녀석도 가끔 친구들 사이에 엉켜서, 사람 사이에 부대끼며 상처를 받을 것이라는 사실을.

가끔 울테고, 가끔 넘어져 까진 상처를 돌아봐야 하겠지.


그래서 다시 마음을 가다듬고 글을 완성하기로 했다.

녀석이 넘어지는 그 모퉁이마다 나는 아이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함께 헤쳐나가도록 노력하겠지만,

무엇보다도 난 그 어떤 상처도 네 존엄성을 조금도 깎아낼 수 없다는 걸 말해주고 말해주고 또 말해줄 것이다.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은가?'를 떠올리며 내 딸아이에게 해주고 싶은 이 마음을 나누고 싶다고 생각했다.


#3.

노파심에서 덧붙이건대, 누군가 성폭행 사건이 있은 후로 '사건을 덮고 지우자'라고 결정했던 우리 부모님의 대처를 문제 삼는다면 난 굽히지 않고 부모님의 편에 설 것이다. 전체적인 이야기와 조금 엇나간 느낌이어서 굳이 하지 않았던 사건 이후의 상황을 에필로그에 조금 덧붙임으로써 혹시나 생길지 모를 오해를 막아두고 싶다.


우선, 사건 직후 집에 와서 가장 먼저 만난 건 아빠였다.

들고 있던 불량 식품이 쏟아져 엉망이 된 옷에 울고 있는 날 보자마자 아빠의 얼굴색이 바뀌었고, 사건 경위를 들은 그는 그 길로 사건 현장을 찾아 끓어오르는 분노를 참지 못했다. 범인이 떠난 자리에 그가 피우던 담배 재떨이가 있었는 데, 아빠는 그 재떨이를 들어 있는 힘껏 유리창을 깨버렸다.

난 아빠가 그렇게 화난 모습을 그 이전에도, 이후로도 본 적이 없었다.


잠시 뒤 집에 돌아와 이야기를 전해 들은 엄마는 가장 먼저 나를 안아줬고, 그대로 병원으로 향했다.

조금이라도 사람들의 시선이 부담스러울까 날 한적한 곳에 두고 다시 접수실로 들어간 그녀는 혹시라도 내가 부담스러울까, 여자 의사 선생님을 애타게 찾고 또 찾았다. 여자 선생님이면 어떻고 남자 선생님이면 어땠을까 싶지만, 접수실 간호사들을 배경으로 선 그녀의 뒷모습에서 내가 조금이라도 덜 상처 받기를 바라는 엄마의 다급한 간절함이 묻어났다.

그 날밤 엄마는 내게 나지막한 목소리로 내게 생긴 일이 무엇인지, 어떤 상황인지 내 시선에서 다치지 않도록 단어를 고르고 골라 설명해주었다. 그리고 그 끝에 원한다면 신고하고 범인을 잡을 수도 있지만, 범인이 중학생인지라 큰 처벌은 기대하기 어렵다고 말하며 미안하다고 했다.


나는 조용히 일상을 다시 사는 편을 택했었다.

그 날 이후, 우리 가족들은 분한 마음을 속으로 삭혀내며 내가 사건을 잊을 수 있도록 함께 노력해주었다.

그 속으로 눌러 몰아둔 마음이 얼마나 많이 무너지고 부서졌을지.

그저 사랑한다고 말할 뿐이다.


덕분에 남편이라는 훌륭한 모니터이자, 실시간 독자를 잃어 글을 쓰는 게 참 어려웠지만,

남편을 포함한 가족들이 이 글을 읽지 않도록 하는 것이 내가 익명으로 글을 쓰기로 한 가장 큰 이유이다.


#4.

세상엔 비극이 너무 많다.

마음이 너무 아파 숨을 고르며 들어야 하는 이야기들이 정말 너무나 많다.

특히 나는 아이들만큼은 충분히 웃으며 컸으면 하는 바람이 간절하다.

그들과 내 체온을 나눌 방법을 고민해, 이제는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행동해 나갈 계획이다.


#5.

문장이 부족해 마음이 글에 잘 담기지 않을까 수도 없이 고민했습니다.

졸작이 될지언정, 전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었기에 무언가 시작해야만 했습니다.

부족한 글 읽어주셔서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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