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 장면들이 있다.
의도적으로 기억하거나 어떤 매개체가 있어서 상기되는 것이 아닌, 무의식이 끝도 없이 불러와 묶어두고 묶어두는 장면들.
예를 들면, 학창 시절 난 ‘초등학교 3학년 때 체육시간’이 그렇게 잊히지 않았다.
교실을 나오면서부터였을까?
운동장 모퉁이를 돌면서부터였을까?
정확히 언제부터였는지 모르겠지만, 체육을 하러 운동장에 나가는 내내 나는 일행과 잠시 떨어져 나만의 세계에 빠져있었다.
당시에 신승훈의 열성적인 팬이었던 사촌언니 덕에 난 그의 옛날 노래까지 모두 꿰고 있었는데, 그때 속으로 ‘보이지 않는 사랑’을 혼자 흥얼거리고 있었다.
“보이지 않게 사랑할 거야. 너무 슬퍼 눈물 보이지만.”
아마 밖으로 소리 내서 부르지는 않았던 것 같은데, 마치 나는 나에게만 보이는 무대라도 갖춰진 양 내 노래에 심취했었다.
어느 정도였냐 하면, 수업이 시작하고 반 전체가 국민체조를 하고 있는 것도 몰랐다.
“널 사랑하니까~ 따라라라라랄라 라라라”
노래의 절정이 지나고 문득 고개를 돌렸더니, 선생님이 내 쪽으로 흘깃 노려보며 눈치를 주고 있는 게 보였다.
어머!
음악과 무대가 순식간에 확 사라지고, 운동장 가장자리에서 똑같은 체육복을 입은 친구들이 눈에 들어왔다.
나를 뺀 모두가 국민체조의 두 번째 동작인 앉았다 일어서기를 하고 있었다.
그랬다.
모두가 앉았다 일어났다 바쁘게 체조의 동작을 하고 있는 동안, 4열 횡대의 오른쪽 끝에 선 나만 가만히 서서 자기만의 세상에 심취해 있었던 것이다.
깜짝 놀라 후다닥 따라 앉았지만, 얼굴이 붉어지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지금 생각하면 그저 귀여워 피식 웃게 되지만, 그게 아마 내가 기억하는 첫 번째 이불 킥 장면이었을 것이다.
십 대 때는 그게 뭐라고 이 장면을 곱씹으며 부끄러워하곤 했었다.
살면서 그런 일들이 더러 있었다.
특별히 부끄러웠다거나, 특별히 감명받았다거나, 특별히 뿌듯했다거나.
함께 들었던 음악이나 음식 같은 매개체가 없음에도 그냥 문득문득 떠오르는 건, 무의식 말고는 아마 다른 핑계를 찾기 어려울 것이다.
때와 장소도 가리지 않고, 기척도 없이 그런 기억들이 떠오르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리고 그 무례한 무의식은 성폭행 사고가 있기 직전까지의 하굣길을 내게 끝도 없이 무한 반복해서 재생했다.
날이 더워진다거나, 관련 뉴스를 본다거나, 비슷한 음식을 먹었다던가 하는 공통점도 없었다.
그냥 문득문득 방심한 내 기억의 고리에 파고들어, 어느샌가 돌이켜 보면 그 장면들을 떠올리고 있었다.
덕분에 사고와 관련된 기억들을 의도적으로 떠올리지 않으려 애썼던 내 노력이 무색할 만큼, 그날의 하굣길만큼은 지금도 하나하나 또렷하다.
#
그 날 따라, 매일 같이 하교하는 친구 둘이 모두 숙제를 해오지 않았다.
그 날 따라, 보통은 내일까지 해오라고 말했을 선생님은 친구들에게 "남아서 하고, 검사받고 가라"라고 말했고,
그 날 따라, 나는 새초롬해진 기분으로 먼저 나 혼자 집에 가겠노라고 말했다.
그 날 따라, 날이 더워 학교 앞 문구사에서 얼린 불량 식품을 사 먹었고,
그 날 따라, 아이들이 북적거려 계산이 힘들었던 평소와 달리 쓱- 돈을 내고 쉽게 문구사를 빠져나왔다.
낯선 중학생이 다가와 "걔네 엄마가 무서워서 그렇다"며, 친구를 대신 불러달라고 했고
골목을 접어들며 그 중학생이 횡설 수설 거리며 시답지 않은 소리를 할 땐, 혼자 속으로 ‘친구들이 말하던 성폭행 사건 뭐 그런 건 아니겠지? 설마’했었다
거기까지.
그 짧은 수 분의 하굣길을 나는 곱씹고 곱씹고 곱씹었다.
그리고 되뇌면 되뇔수록 그 모든 순간들은 점점 후회로 변해갔다.
만약 친구 둘 중에 한 명이라도 숙제를 해왔다면 그리 따분하지 않게 다른 한 녀석을 기다렸을 테고,
만약 평소처럼 선생님이 내일까지 숙제를 해오라고 했다면 신이 난 녀석들과 난 같이 하교를 했을 테고,
만약 늘 그랬듯 친절하게 친구들을 기다렸다면 고작해야 10분 정도 하교가 늦어지는 걸로 끝났을 테고,
만약 집에 가서 차게 식혀둔 오렌지 주스로 불량식품을 대신했다면 문구사를 들를 일이 없었을 테고,
만약 평소처럼 문구사에 아이들이 바글거려 계산에 시간이 걸렸다면, 내가 그 시간에 그곳을 지나다 범인의 눈에 뜨이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중에서도 특히 나를 괴롭힌 생각은
만약 속으로 ‘이거 뭔가 범죄 같은 거 아닌가?’ 생각했던 그 순간 만이라도
집에 간다고 돌아 나섰다면?
됐다고 혼자 알아서 하시라며 골목으로 접어들지 않았다면?
아직은 대로변이었던 나에게 그는 칼을 들이댈 수 없었을 것이고,
아직은 소리쳐 다른 어른이나 하교하는 친구들을 부를 수 있었을 텐데.
그런 후회가 내내 나를 괴롭혔다.
[멍청하게!! 심지어 ‘범죄가 아닌가?’ 생각까지 해놓고 오지랖을 부리며 거기를 따라가다니.
한심해. 어떻게 그랬지? 대체 내가 왜 그랬지?
안 그럴 수도 있었는데! 어른들한테 수도 없이 들었던 위험한 상황인 게 너무나도 뻔한데!]
나에게 화가 났다.
너무나도 화가 났다.
어느 날부터인지 기억나진 않지만 내 무의식이란 놈은 내가 틈을 보일 때마다 근근이 이 장면을 불러왔고, 나를 원망하는 이 모진 마음은 이십 대 초중반 꽤나 많은 시간을 할애해 나 스스로를 미워하게 만들었다.
나 자신을 잘근잘근 조각내 구렁텅이로 밀어 넣고 간신히 꺼내 두면, 지치지도 않고 다시 밀어 넣고를 반복했다.
지독한 자책의 시간이었다.
더 큰 문제는 자책하는 일이 조금씩 습관처럼 굳어져 간다는 것이었다.
누군가는 자꾸 쓰는 신체 부위에 근육이 발달하는 것에 비유했는데, 정말 생각의 물길은 조금이라도 패인 부분을 침식시키며 더 깊게 흐른다.
문제가 생겼을 때 화살을 내게로 돌리는 건, 어느새 내게 익숙한 생각의 단계였다.
회사에서 논쟁이 생기면 ‘혹시 내 잘못인가?’ 싶어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일한 내역부터 훑어봤다.
특히 사람 사이에 마음을 많이 쓰는 편이었기에, 대인관계에서 문제가 생기면 내 잘못이 아닌 것까지 익숙하게 ‘왜 그랬을까? 내가 그들 사이에서 혹시 뭐 잘못한 건 없을까?’를 생각했다.
#
수많은 영화나 소설에서 다양한 사람의 상처를 묘사하고 그 치유 과정을 보여준다.
앞서 언급했듯이 영화적 장치로써 성폭행도 참 많이 언급되지만, 아동학대, 왕따, 가난, 사랑의 상처, 직장 내 폭언, 차별, 폭력, 죽음. 이루 말할 수도 없이 다양한 이유로 사람은 상처를 받는다.
나 역시 참 많은 영화에서 함께 치유받기도 하고, 주인공이 아플 때 함께 아파하기도 하지만 내게 있어 최고의 치유 장면은 고전 <굿 윌 헌팅>의 한 장면이었다.
숀 교수는 아동학대로 상처 받아 마음을 닫은 윌에게 이야기한다.
"It's not your fault"(네 잘못이 아니야)
당연히 다 알고 있다는 듯, 무심하게 ‘알아요’ 대답하는 윌에게 그는 다시 말한다.
"It's not your fault"(네 잘못이 아니야)
알아요. 아니까 그만해요. 하는 윌에게 또다시 말한다.
"It's not your fault"(네 잘못이 아니야)
"It's not your fault"(네 잘못이 아니야)
"It's not your fault"(네 잘못이 아니야)
마침내 눈물 흘리며 오열하는 윌을 붙잡고 그는 다시 한번 다독이듯 말한다.
"It's not your fault"(네 잘못이 아니야)
#
내 경우만 해도 평소와는 아주 조금씩 이질적이었던 우연들이 반복되어 그 날 그 장소에 나는 혼자 있었다. 덕분에 평소라면 하지 않았을 사소한 행동들을 하나씩 하나씩 되뇌며 "만약"이라는 두 글자를 수도 없이 대입해봤지만, 시간을 되돌리는 영화 같은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았다.
그저 의미 없이 질척 질척한 공상일 뿐이었다.
그리고 또 분명한 건 그 어떤 바보 같은 선택이 선행되었더라도, 한쪽이 악의를 품고 만든 상황에 아둔하게 속은 피해자는 결코 반성해야 하는 대상이 아니라는 점이다. 누구나 실수할 수도 있다. 나쁜 건 악의를 품은 쪽이다.
특히 그게 아이들을 대상으로 하는 범죄였다면 더더욱 그렇다고 나는 굳게 믿는다.
이 너무 당연한 사실들을 나 역시 머릿속으로는 뻔히 알고 있었다.
당연히 알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 많은 시간을 우울해했고, 나 자신을 할퀴어 낼 만큼 자책했으며, 이런 이야기를 함부로 다른 이들과 나누지 못 한 채 안으로 안으로 곪아 있었다.
그런 틈바구니로 뿌려놨던 씨앗 같았던 우울은 빠르게 뿌리를 내려 자라났고, 자책하는 습관이라는 못난 열매를 토해냈다.
#
내 경우는 원인이 분명해서 오히려 생각의 시작점을 찾기가 수월했다.
하지만, 대부분 많은 사람들은 여러 가지 크고 작은 상처들이 쌓여 자기도 모르는 사이 우울에게 자라날 양분과 토양을 내주었을 테다.
그리고 그런 경우, 치유가 가장 필요한 알맞은 시기를 찾기도 어려울 테고.
마치 내가 자책과 우울로 가장 힘들었던 때는 사건으로부터 십여 년이나 떨어진 이후였던 것처럼 말이다.
그래서 글을 써야겠다고 다짐했다.
현실에서 그런 훌륭한 상담가를 적기에 만나기란 말도 안 되게 어려운 일이기에, 나라도 나서서 가난한 문장으로 나마 또박또박 전하고 싶었다.
혹시 그 어떤 이유로든 상처 받은 과거의 기억을 마음이 헤지도록 떠올리며 아파하고 있는 누군가가 있다면,
(비록 흔해빠진 위로지만- )
당신 잘못이 아니에요.
당신 잘못이 아니에요.
당신 잘못이 아니에요.
더 굳어져 박혀버리기 전에 붙잡고 안아주며 말하고 싶다.
말해주고 싶었다.
그리고 이 위로에는 꼭 덧붙여야 하는 말이 있었다.
더 중요한 건 사실 그다음이다.
내가 어린 시절 '네 잘못이 아니다'라는 꼭 필요했지만 흔한 격려의 말을 들었을 때, 난 너무 무서웠었다.
'내가 잘못한 게 아니라는 말' 자체가 일단 내 안의 무언가 크게 잘못되었다거나 망가져버렸다고 확정 짓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에, 어린 난 그 말조차도 겁이 났고 버거웠다. 진짜 나 큰일이 나버린 걸까?
그래서 이 이야기를 꼭 같이 해야만 했다.
"잘못된 건 아무것도 없어. 괜찮아."
그 어떤 상처로 구겨졌든,
소중한 당신이라는 본질은 조금도 헤지지 않았어요.
아주 조금도 낡거나 상처 나지 않았어요.
불행이 우리를 지배하게 곁을 내어주지 말아요.
지금 당장은 믿을 수 없겠지만, 분명 삶은 조금씩 상처를 옅게 하고 사람 사이의 온기는 당신의 아픈 부분을 치유해 나갈 거예요.
아주 확고하게 단언하건대, 삶 속에서 사랑스럽고 소중한 당신 스스로를 깨닫게 될 거예요.
오늘을 살아가요, 우리.